신상훈 교수

기사입력 2009.10.01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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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의학의 정체성 확립과 미래 발전 방향
    (3) 한의학의 정량화와 표준화

    필자는 e-learning을 통해 ‘유비쿼터스(Ubiquitous)와 건강’이라는 과목을 3년째 강의해오고 있다. 인터넷 강좌의 특성상 교수의 설명보다는 유인물에 의존해서 공부하는 불량학생들을 위해 매년 출제하는 문제가 있다.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의 특징을 비교한 것 중에서 틀린 것을 모두 고르는 문제인데, 보기들 중에는 “동양의학은 철학적이고 서양의학은 과학적이다”라는 틀린 보기가 있다. 유인물만 암기한 불량학생들 중에는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학생들이 있다. 틀린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현대의학은 과학이고 한의학은 철학이라는 생각이 일반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학에서 이공계 분야를 전공하다가 대학 입학시험을 다시 봐서 한의대에 입학한 소위 이공계 나사들 중에는 한의대에 입학하면서 자신의 전공서적을 모두 태워버렸다고 자랑하는 학생들이 있다. 과연 한의학을 잘하려면 현대과학과 단절해야하는 것일까? 현대과학보다는 음양오행이 한의학에 적합한 것일까?

    의학은 그 시대의 문화와 과학을 반영한다. 현대의학은 고대 그리스의 문화적 전통을 이어받아 인체를 단순하게 바라봤으며, 현대과학의 성과물들을 이용해 인체의 현상들을 설명했다. 수천년 전 고대중국의 전통을 이어받은 한의학은 우주만물을 설명하는 고대의 첨단과학인 기(氣)와 음양오행(陰陽五行)을 빌어 인체의 현상을 설명했으며, 복잡한 현상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중시했다. 고대의 첨단과학인 기와 음양오행이 철학이 되어버린 지금, 한의학은 철학적이라는 오해를 받고 있다.

    최근 GM의 파산사태를 바라보면서 ‘변화와 생존’이라는 두 단어가 연상됐다. GM은 지난 76년 동안 자동차시장 부동의 1위였다. 토요다에게 1위를 빼앗겼을 때, GM은 그 의미를 파악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세계의 자동차시장이 연비가 좋은 중·소형차나 하이브리드 시장에 집중할 때도, 그들은 크고 힘세고 튼튼한 대형차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더 나아가 경쟁에 밀려난 대형차 회사를 인수하는 고집까지 보여줬었다. 시대의 변화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지 여실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의료서비스시장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요즈음 신문이나 방송에 자주 등장하는 유헬스(U-Health)란 유비쿼터스의 기술을 의료분야에 접목해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무엇에 상관없이 예방, 진단, 치료, 사후관리의 보건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생활에서의 유헬스는 개인정보 보호나 의료사고 발생에서의 책임소재와 같은 법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아직까지는 실용화 단계는 아니나 의료기관 내에서의 유헬스는 병원정보화를 중심으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병원정보화란 의사의 처방이 전산을 통해 전달되고(Slipless), 검사결과를 컴퓨터로 조회하며(Filmless), 병원의 행정법무가 전산화되고(Paperless), 의료진이 환자의 기록을 어디서나 조회할 수 있도록(Chartless) 하는 움직임을 말한다.

    지난번 한의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 필자는 유헬스가 한의학과 궁합이 잘 맞는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질병 중심인 서양의학과는 달리 환자가 불편해 하는 증상과 증후에 초점을 맞춘 한의학은 태생부터 환자 중심이며, 미병(未病)과 양생(養生)이라는 탁월한 예방 및 건강관리 방법으로 무장되어 있다. 유헬스의 도움을 받으면 한의원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을 벗어나 네트워크라는 가상공간을 통해서 더 많은 의료소비자들과 만날 수 있으며, 양방의료서비스보다는 한방의료서비스가 강점을 가지는 아건강(亞健康, Sub-health) 시장을 통해 전 인구의 75%가 한방의료서비스의 고객이 되는 푸른바다(Blue Ocean)를 개척하자고 제안했었다.

    그렇다면 유헬스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네트워크상의 모든 정보는 디지털이므로, 사용되는 모든 정보를 정량화해야 한다. 그러므로 의사의 주관적인 감각에 의해서 행해지던 진단과 치료의 과정을 정량화할 수 있는 도구의 개발이 절실하다. 치료 전후에 있어서 환자의 상태를 정량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평가지표 및 평가도구가 개발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한의학의 기본 진단지표인 팔강(八鋼)을 정량화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표준화의 필요성이다. 의료서비스의 신뢰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한방의료기관들 사이의 협력뿐만 아니라, 양방의료기관과의 협력도 필요하다. 그러나 상호협력에 앞서 반드시 전제되어야할 것은 표준화이다. 표준화란 일반적으로 사물, 개념, 방법 및 절차 등에 대하여 합리적인 기준을 설정하고 다수의 사람들이 어떤 사물을 그 기준에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진단용어의 표준화와 진단절차 및 진단결과의 표준화가 시급하다.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됐다. 기와 음양오행이 철학으로 가버린 지금, 한의학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한방의료서비스시장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도구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유헬스는 지금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도구이며, 유헬스의 실현을 위해서는 한의학의 정량화와 표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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