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열 교수의 노자이야기 37

기사입력 2009.07.28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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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孔德之容, 唯道是從. 道之爲物, 惟恍惟惚.

    큰 덕의 모습은 오직 도를 따르는데 있다. 그럼, 도(道)라고 하는 그 물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을까? 노자는 이를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고, 없는 것 같으면서도 있는 아물아물한 것이라 했다. 신비롭고 신비롭다는 말이다.

    있는 듯, 없는 듯한 것을 따르는 데서 덕(德)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러니 여기서 모습이라고 한 ‘容’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모양’하고는 다르다. 그건 일정한 형태의 모습이 아닌 형상과 물건과 정신을 함께 포용한 그런 모습이다.
    또 대개 말하길 덕(德)을 도(道)의 드러난 모습이라고 하는데 이는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것으로 이른바 인륜도덕을 말한다.

    즉 대도(大道)가 무너져서 질서가 무너지면 그 질서를 잡고자 얘기하는게 덕(德)이다. 유가의 덕은 인위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인데 도가의 덕은 그런 것이 아니라 무위자연의 행위로써 그러니까 무위자연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유가는 인간의 현실생활 속에서 질서를 찾으려고 하는데 도가는 자연 질서 속의 질서를 생활 그자체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가에서는 인위적으로 사람이 만든 것에 대해서는 그걸 그만두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마치 예수님 당시에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거기에 목숨까지 걸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아버지의 말씀(道)만을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과도 같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율법을 없애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고 왔다”고 말씀하셨다. 노자가가 ‘하지 말라(無爲)’라고 하신 것도 유가의 ‘하라(有爲)’는 것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를 보다 확실하게 온전(溫全)하게 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는 유가와 도가를 상반된 적대적 관계로 보며, 또한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를 자기의 방해꾼으로 보았다. 답답한 노릇이다.

    노자는 도의 생긴 모습을 ‘유황유홀(惟恍惟惚)’이라 했다. 있는 것 갔으면서도 없고, 없는 것 같으면서도 있다는 말이다. ‘황(恍)’은 ‘어슴푸레 할 황’자로 분명하지 않은 상태다. ‘홀(惚)’은 ‘황홀할 홀’자로 흐릿하여 유무가 분명하지 않은 모양을 말한다.

    따라서 ‘황홀(恍惚)’이라고 하면 있는 듯 없는 듯 분명하지 않은 미묘(微妙)한 상태를 말한다. 미분화(未分化)된 혼돈(混沌)의 상태이다. 무엇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상태다. 정현(鄭玄)은 이를 ‘허무(虛無)’라 했다.

    이치로서 그것을 설명하자면 ‘도’라 할 수 있고, 숫자로서 그것을 설명하자면 ‘하나’라고 하겠으며, 물체로서 설명하자면 ‘무’라고 할 수 있다. 만물이 열려 통하는 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도’이고, 미묘하여 예측할 수 없는 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신’이며, 계기에 따라 변화하는 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역’이다. 종합해서 보면, 이 모두는 ‘허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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