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열 교수의 노자이야기 36

기사입력 2009.07.07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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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我愚人之心也哉, 沌沌兮. 俗人昭昭, 我獨若昏. 俗人察察, 我獨悶悶. 澹兮其若海,
    兮, 似無所止. 衆人皆有以, 而我獨頑且鄙. 我獨異於人, 而貴求食於母.

    나야 말로 바보로구나! 내 마음은 정말 바보스런 마음이란 뜻이다(我愚人之心也哉). 멍청하고 멍청하구나(沌沌兮)! 세상 사람들은 빛나고 있는데(俗人昭昭), 나 홀로 어두운 것 같고(我獨若昏) 세상 사람들은 똑똑해서 아는 것도 많건마는((俗人察察) 나 홀로 어둡고 둔하구나(我獨悶悶). 고요하기(澹兮)가 잔잔한 바다와 같고(其若海) 끝없이 흐르기를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것 같다(似無所止). 어디에도 묶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쓰임새가 있는데(皆有以), 나는 홀로 완고하여 쓰일 곳이 없구나(而我獨頑且鄙). 여기서 ‘이(以)’는 ‘쓰임새’라는 뜻으로 ‘용(用)’과 같은 뜻이다. ‘천할 비(鄙)’는 ‘이(以)’와 대(對)가 되어 쓰일 바가 없다는 뜻이다. 나 홀로 세상 사람들과 달라서( 我獨異於人) 어머니한테 젖 먹임 즉 양육됨을 귀하게 여긴다(而貴求食於母).

    여기서 ‘먹을 식(食)’은 ‘기를 사(食)’로 해석해야 한다. ‘모(母)’는 ‘도(道)’를 가리킨다. 그러니 도(道)한테서 양육됨을 귀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정중한 대답과 오만한 응대, 선하다는 것과 악하다는 것이 ‘본질적으로’ 다른 이원적인 것이라는 가르침은 결국 ‘본질론 자들’의 이분법적 발상이다. 이분법적 상식의 세계를 넘어서서 초 이분법적 의식세계에서 사물을 보는 사람은 이처럼 딱 부러진 흑백논리에 지배되지 않는다.

    상식적 윤리세계에서는 ‘예’와 ‘아니요’가 분명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하겠지만, 윤리적 차원을 넘어선 사람들을 보면 아주 흐리멍덩하고 답답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위대한 사람은 뭇 사람의 이해를 얻지 못해 외로운 법이다. 이를 일러 위대한 인물의 ‘실존적 고독’이라고나 할까?

    노자도 여기서 자신의 이런 심정을 이야기한 것이다. 세상사람 모두 희희낙락하고, 똑똑하고, 영리하고, 분명하고, 여유 있고, 쓸모 있고, 목적의식이 투철하고 희망으로 가득한 것 같은데 자기 혼자 멍청한 것 같고, 아리송한 것 같고, 맹맹한 것 같고, 촌스럽고, 답답하고, 미욱하게 보이고, 빈털터리 같고, 정처 없이 떠다니는 것 같고…. 하면서 자기의 ‘홀로임’을 슬픈 어조로, 그러나 담담하게 읊고 있다.

    이런 경우는 공자도 예수도 마찬가지다. 공자는 “아, 아무도 날 이해하지 못하는 구나…, 하늘 밖에 없구나”(『논어』14;37 )하셨고, 예수가 “나의 멍에는 가볍다”, “내가 쉼과 자유를 주겠다”고 하셨지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가 메시아로 임할 때 그들이 누릴 권력이나 부귀 등 세상적 가치 때문에 그를 따르던 뭇 사람 혹은 그를 받아 드릴 줄 모르던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면서 ‘우셨다’고 한다.
    인간 역사는 이처럼 위대한 사람들이 그의 고독 속에서 밝힌 진리의 등불로 이 정도라도 밝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이런 분들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를 부끄럽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이런 위대한 선각자는 일반사람과 무엇이 어떻게 다르다는 것인가? ‘어머니의 기름(食母)’을 소중히 하는 점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어머니는 도(道)를 상징하는 것이니 결국 도에 의존하여 도와 함께 사는 삶을 소중히 여긴다는 말이다. 이런 삶은 이분법적 의식을 초월하여 ‘양극의 조화’를 체득한 삶이다. 이렇게 홀로 도와 하나 되는 삶을 살아감으로 고독한 사람을 두고 ‘The Alone with the Alone’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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