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는 해까지 內醫院都提調로 宮中의 醫藥을 관장한 儒醫
평생동안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등 네차례의 전쟁을 경험하면서 국제적인 정세를 꿰뚫고 있었던 洪瑞鳳은 현대 한의사가 본받아야 할 儒醫의 전형이다.
본관이 南陽이고 號가 鶴谷인 洪瑞鳳은 1590년 진사가 된 후로 1594년 별시문과에 합격하여 정언, 부수찬, 이조좌랑, 성주목사, 경기도 암행어사, 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성공한 후로 예조판서, 대사헌, 이조판서, 좌참찬, 대제학 등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최명길과 함께 청나라와 화의를 주장한 주화파로서 병자호란이 터진 후에 청나라 진영에 가서 항복문서에 조인하는 일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가 의학과 관련된 사무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을 근거로 보면 1626년 무렵부터이다. 첫기록은 1626년 9월21일의 내의원 부제조로서 慈殿(임금의 어머니 즉 인목대비를 말함)에게 川芎茶調散을 처방한 기록이다. 이 무렵부터 洪瑞鳳은 副提調로 활동하다가 1640년 내의원 도제조로 승진하여 인조의 질환을 관리하였다.
1645년 죽는 해까지 그는 내의원 도제조로서 金堉 등과 의약을 논한다. 특히 1645년 6월11일의 기록에 醫書에 나오는 腰眼穴에 대해 논하면서 『東醫寶鑑』에 인용된 『丹溪心法』, 『古今醫鑑』, 『醫學入門』 등의 의서들을 원용하면서 主治를 논의하는 기록을 보면 洪瑞鳳은 수준 높은 의학이론을 설하고 있다. 같은 해 여름에 그는 生脈散 등의 약을 처방하고 더위로 인한 각종 질환을 염려하는 발언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나이와 연륜에서부터 출발한 오랜 의학 경험에서부터 나온 소산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