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絶聖棄智, 民利百倍. 絶仁棄義, 民復孝慈. 絶巧棄利, 盜賊無有.
‘성(聖)’이란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라 분별해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고 하는 분별지(分別智). 이것은 참된 앎이 아닌 감성(感性)적 앎이다. 참된 앎에는 분별이 없다. 노자는 이런 앎을 ‘도(道)’라 하였고, 석가는 ‘불성(佛性)’이라 하였으며, 예수는 ‘하느님’이라 하였다.
의식적 발전과정에서 볼 때는 자아(自我, ego)에 속한다. 그러니까 그러한 분별해서 생각하는 자아(ego)를 끊고 감성적 분별지(分別智)를 버리고 참나[眞我] 즉 전자아(前自我, pre-ego)로 돌아가면 백성들의 이익이 몇 백배가 될 것이다. 무엇을 식별하거나 알량한 지식을 가지고 일을 헤아려 나아가는 그런 짓을 제발 그만두라는 것이 노자의 이야기다.
사랑을 한다고 눈짓으로, 입으로 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영원한 사랑이란 괴로울 때나 기쁠 때나,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언제 어디서나 변함없는 사랑이 참사랑이다. 노자는 눈짓이나 입으로 하는 따위의 자선을 끊고 사람들의 작위(作爲)적 도의를 버리라고 하였다. 이것이 절인기의(絶人棄義)이다. 헷갈리는 이야기다.
그동안 우리는 학교에서 어질고 의로워야 한다고 배워왔다. 그런데 그 ‘어짐(仁)’과 ‘의로움’을 끊고 버리라니 말이다. 노자가 볼 때 ‘어짐’이나 ‘의로움’은 모두가 분별지(分別智)이다. 그러니까 다 가식이지 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끊고 버리라고 했다. 그래야 백성들이 부모에게 효도하게 되고 자식에게는 자애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대도(大道)가 무너졌으니까 ‘인(仁)’과 ‘의(義)’를 강조하는 것이요, 가족이 서로 불화해서 ‘효(孝)’와 ‘자(慈)’가 나온 것이다. 요즘 보면 ‘어버이날’이니 ‘스승의 날’이니 하여 무슨 날이 그리도 많은지 모르겠다. 어버이에게 늘 효도하고, 스승을 늘 섬기면 구태여 그런 날들을 정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런 날들을 정해 놓아서 부작용이 더 많아지는 것은 아닌지? 그러니까 노자가 ‘어짐’과 ‘의로움’을 끊고 버리라는 것은 대도(大道)를 회복하라는 것이다. 대도와 하나가 되면 ‘어짐’과 ‘의로움’이 저절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따로 얘기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분별지란 모두 꾸밈에 지나지 않는다. 지도자가 대도와 하나로 되면 백성은 저절로 효도하게 된다. 또 잔재주의 가르침을 끊고, 이익을 버리면 도둑과 사기꾼이 없어진다.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게 하라. 이건 이렇게 하면 좋을 것이고, 저건 저렇게 되면 좋을 것이다” 하는 그런 잔재주를 끊고 또한 이익을 버리면 도둑과 사기꾼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그럼, 도둑놈은 뭐고 사기꾼은 뭔가? 내놓고 남의 물건 가져가는 놈은 도둑이고 알랑알랑 거리면서 속여서 물건을 내주게 끔 해 가져가는 놈은 사기꾼이다.
그러니까 지도자라는 사람이 잔재주를 피우고 이익만을 도모하면 백성들이 그따위 도둑놈과 사기꾼으로 된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고 도둑과 사기꾼이 들끓는 사회는 지도자가 잔재주나 부리고 이익만 챙기기 때문이다. 그러니 근본으로 돌아가 도와 부처와 하느님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근본(根本)이라는 게 뭔가? 그게 뿌리인데 뿌리가 죽으면 꽃이고 열매고 아무것도 없지만 뿌리가 살면 그런 것들이 저절로 맺히니까, 뿌리를 살려야 한다. 성(聖)이니 지(智)니 의(義)니 인(仁)이니 하고 자꾸만 얘기하는데 그것은 뿌리를 버려두고 열매나 잎사귀 따위를 가지고 뭘 어떻게 해보려는 것이다. 참으로 답답할 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