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열의 노자이야기 32

기사입력 2009.04.21 10:44

SNS 공유하기

fa tw
  • ba
  • ka ks url
    歸根曰靜, 靜曰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아무리 휘황찬란하고 뻔쩍이더라도 전원(電源)이 꺼지면 조용하고 컴컴하다. 공동묘지가 그렇고 겨울 해수욕장이 그렇다. 그러니 시시비비(是是非非)가 다 부질없는 짓거리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냐? 모두가 꿈속의 일인데.

    북망산 아래에서 너는 누구고 나는 누구냐? 제자리로 돌아가서는 말이 없는 법이다. 그래서 고요함[靜]이라 했다. 이 고요함이 곧 성명(性命)으로 본래의 근원이다. 이 자리는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는 그런 자리가 아니라 언제나 늘 있는 실존(實存)적 자리다. 이 실존적 자리를 확인하고 인식했을 때 그를 깨달았다 하며 깨달으면 온 세상이 훤히 밝다. 그러나 이 실존적 자리를 모르면 어두워 넘어지고 자빠져 재앙을 입게 된다.

    부처니, 중생이니, 군자니, 소인이니 하는 경계가 모두 이 깨달음의 유·무에 있다. 깨달으면 부처요 깨닫지 못하면 중생이다. 실존적 자리인 실재(實在)를 알면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다. ‘지상(知常)이면 용(容)’이라 한 것이 이를 말함이다. 하느님 아버지는 모든 것을 포용하지 않는가?

    거기에는 가난한 사람, 못난 사람, 부자, 잘난 사람 따위의 구별이 없다. 그래서 ‘용(容)’을 ‘공(公)’이라 했다. 사(私)가 없다는 말이다. 사(私)가 없으니 일체에 충만할 수밖에 없다. 공(公)이 바로 왕(王)이란 뜻이다. 자기가 따로 없는 이것이 바로 일체에 충만한 것이다. 왕(王)은 모든 것을 거느리는 사람이다. 그의 힘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다. 자기가 따로 없으니까 왕한테는 없는 게 없고 동시에 모든 것에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모든 것에 충만한 것은 모든 것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천(天)’을 ‘벗어남’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야 문맥이 통한다. 하늘은 모든 것을 초월해있으니까. 모든 것을 벗어나면 그것이 곧 도(道)요, 도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몸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현상의 변화다. 그러니 우리는 죽음을 통해 도의 실재, 불생불명(不生不滅)하는 실상을 보아야 한다.

    노자는 도(道)의 실상을 볼 수 있는 방법으로 ‘치허극(致虛極)’, ‘수정독(守靜篤)’을 제시해 주셨다. 그러면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도바울로는 부활을 말하면서, 썩을 육신의 옷을 벗고 영원히 썩지 않는 옷을 갈아입는 것이 곧 부활이라고 했다.

    그렇다! 어서, 우리 모두 썩지 않는 옷으로 갈아입고 함께 얼싸안고 노래 부르며 춤추자! 그리고 부활! 부활! 부활의 노래를 부르자!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