其上不교, 其下不昧. 繩繩兮, 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象之象. 是謂惚恍.
일반적으로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둡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여기서 위[上]니 아래[下]니 한 것은 하나의 대귀(對句)로 표현한 것이지, 분별지(分別智)로서의 높고 낮음이 아니다.
왜냐하면 도는 모양[狀;외면의 모양]도 형상[象;내면의 모양]도 없기 때문이다. 도는 위로는 밝지 않지만 아래로는 어둡지 않다(其上不교, 其下不昧)고 한 것은 바꾸어 말하면 위는 어둡고 아래는 밝다는 뜻이다.
그렇다. 도의 본질은 외면적 형태만으로는 알 수가 없고 내면적 원리로만이 밝힐 수 있다. 그러니 여기서 위[上]는 외면, 아래[下]는 내면을 뜻한다. 그러나 도는 어둠을 통해서 밝음을 보고 밝음을 통해서 어둠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밝다고 할 수도 없고 어둡다고 할 수도 없다.
결국 도에는 아래니 위니 하는 것도 없고 밝으니 어두우니 하는 것이 따로 없다. 승승혜(繩繩兮)여 불가명(不可名)이라. 끊임없이 이어져서 그 이름을 무어라고 붙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것을 분리하는 것이다. ‘승(繩)’은 ‘노 승’자이다. 노란 노끈을 말하는데 이것은 칡의 섬유질 즉 ‘총울치’를 서로 비벼 엮어 꼰 끈을 말한다. 따라서 ‘승승(繩繩)’이라고 하면 연속하여 끊이지 아니하는 모양을 나타낸 형용사적 명사이다. ‘면면(綿綿)’과 같은 뜻이다. 이때 ‘면(綿)’은 목화솜을 말한다. 끊임없이 이어지니 그것을 나눌 수가 없다(不可分). 나누어야 무엇이라고 이름을 지어줄 터인데 그럴 수가 없다. 그러니 불가명(不可名)이다.
결국 도는 형태가 없는[無物] 것으로 되돌아간다. ‘무장지장(無狀之狀), 무상지상(無象之象)’. 어떤 본(本)에서는 ‘무상(無象)’을 ‘무물(無物)’로 한 곳도 있다. 여기서 ‘장(狀)’이니 ‘상(象)’이니 한 것은 다같이 ‘모양’이란 뜻인데, 구태여 구별하자면 ‘장(狀)’을 외면의 모양이라고 하면 ‘상(象)’은 내면의 모양이라 하겠다.
형상 없는 형상이란 말이다. 이것을 ‘홀황(惚恍)’이라 했다. 무위당은 이를 ‘어리벙벙함’이라 번역했다. 또한 김형오는 여길보의 ‘홀즉불교(惚則不교), 황즉불매(恍則不昧)’에 따라 ‘홀(惚)’은 ‘밝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고 지적하고 이어서 그는 밝지 않기에 어떤 물건도 없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나, 물(物)이 없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황(恍)’은 ‘어둡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고 지적하고 이어서 그는 어둡지 않기에 어떤 물건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지만, 물(物)이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홀황은 유무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는 모호한 이중의 본질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일반적으로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둡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여기서 위[上]니 아래[下]니 한 것은 하나의 대귀(對句)로 표현한 것이지, 분별지(分別智)로서의 높고 낮음이 아니다.
왜냐하면 도는 모양[狀;외면의 모양]도 형상[象;내면의 모양]도 없기 때문이다. 도는 위로는 밝지 않지만 아래로는 어둡지 않다(其上不교, 其下不昧)고 한 것은 바꾸어 말하면 위는 어둡고 아래는 밝다는 뜻이다.
그렇다. 도의 본질은 외면적 형태만으로는 알 수가 없고 내면적 원리로만이 밝힐 수 있다. 그러니 여기서 위[上]는 외면, 아래[下]는 내면을 뜻한다. 그러나 도는 어둠을 통해서 밝음을 보고 밝음을 통해서 어둠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밝다고 할 수도 없고 어둡다고 할 수도 없다.
결국 도에는 아래니 위니 하는 것도 없고 밝으니 어두우니 하는 것이 따로 없다. 승승혜(繩繩兮)여 불가명(不可名)이라. 끊임없이 이어져서 그 이름을 무어라고 붙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것을 분리하는 것이다. ‘승(繩)’은 ‘노 승’자이다. 노란 노끈을 말하는데 이것은 칡의 섬유질 즉 ‘총울치’를 서로 비벼 엮어 꼰 끈을 말한다. 따라서 ‘승승(繩繩)’이라고 하면 연속하여 끊이지 아니하는 모양을 나타낸 형용사적 명사이다. ‘면면(綿綿)’과 같은 뜻이다. 이때 ‘면(綿)’은 목화솜을 말한다. 끊임없이 이어지니 그것을 나눌 수가 없다(不可分). 나누어야 무엇이라고 이름을 지어줄 터인데 그럴 수가 없다. 그러니 불가명(不可名)이다.
결국 도는 형태가 없는[無物] 것으로 되돌아간다. ‘무장지장(無狀之狀), 무상지상(無象之象)’. 어떤 본(本)에서는 ‘무상(無象)’을 ‘무물(無物)’로 한 곳도 있다. 여기서 ‘장(狀)’이니 ‘상(象)’이니 한 것은 다같이 ‘모양’이란 뜻인데, 구태여 구별하자면 ‘장(狀)’을 외면의 모양이라고 하면 ‘상(象)’은 내면의 모양이라 하겠다.
형상 없는 형상이란 말이다. 이것을 ‘홀황(惚恍)’이라 했다. 무위당은 이를 ‘어리벙벙함’이라 번역했다. 또한 김형오는 여길보의 ‘홀즉불교(惚則不교), 황즉불매(恍則不昧)’에 따라 ‘홀(惚)’은 ‘밝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고 지적하고 이어서 그는 밝지 않기에 어떤 물건도 없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나, 물(物)이 없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황(恍)’은 ‘어둡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고 지적하고 이어서 그는 어둡지 않기에 어떤 물건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지만, 물(物)이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홀황은 유무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는 모호한 이중의 본질을 암시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