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醫術로 堂上官까지 오른 儒醫
1487년 7월 12일자 『成宗實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金興守는 醫術로 지위가 堂上이 된 것이 이미 그 분수를 넘었는데, 이제는 同知가 되기도 하고 僉知가 되기도 하여 장상 줄에 끼었으므로 名器가 지극히 외람되니, 改正하여 朝廷을 높이소서.”
이것은 성종 20년 司諫院正言인 趙球가 당시 醫官出身인 金興守가 堂上官에까지 올라가 高官의 부류와 같이 된 것에 대해 지나침을 간언하는 것이었다. 醫官出身으로 堂上官에 올라간 것은 당시의 조정 분위기에서는 파격인사였기 때문이다.
金興守에 대한 기록은 성종년간에서부터 중종 때까지 나온다. 그리고 철종년간에 작성된 『太醫院先生案』에도 그에 대해 “昌原金興壽資憲知樞”라고 기록되어 있은 것으로 보아 그는 昌原金氏이며 관직이 資憲大夫 僉知中樞府事까지 올라간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의술이 뛰어나 1488년(성종 19)에 堂上醫官에 올라가게 되었고, 1489년에는 세자의 瘡疹을 치료하여 이 공적으로 말 한필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僉知中樞府事에 오르게 된 것은 1491년이다. 1494년에는 우의정이었던 許琮의 치료를 전담하였고, 그 해에 嘉善大夫로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렇듯 그는 단순히 醫官으로서만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라 높은 견문과 학식으로 당시 조정에서 실력자로 인정받은 것이었다.
1498년(연산군 4) 가을에는 尹弼商, 洪貴達, 鄭眉壽 등과 함께 『救急易解方』을 편집하고, 다음해에 언해까지 하여 출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