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열의 노자이야기 27

기사입력 2009.02.03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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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시지(視之)’, ‘청지(聽之)’, ‘박지(搏之)’의 ‘지(之)’는 도(道)를 가리킨다. 도는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으므로 이것을 ‘이(夷)’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이(夷)’는 역자에 따라 그 해석이 구구하다. 『열자(列子)』에서는 형기(形氣) 따위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최초의 것을 ‘이(易)’라 하였는데 이 ‘이(易)’가 ‘이(夷)’와 같다 하였고, 『노자익(老子翼)』에서는 ‘이(夷)’를 너무 평이해서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어 말하기가 막막한 상태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또 도는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니 이를 ‘희(希)’라 하고,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으니 이를 ‘미(微)’라 하였다. 여기서 ‘희(希)’는 매우 작거나 ‘없음(無)’에 가까운 상태를 일컬으며, ‘미(微)’는 개념적으로 포착이 안 되는 미세하고 오묘한 신비의 경지를 나타낸다고 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로도 도의 본질을 분명하게 밝혀낼 수는 없다. 이것이 차삼자불가치힐(此三者不可致詰)이다. ‘불가치힐(不可致詰)’은 의식과 지성으로 따지거나 분별하기 불가능한 차원을 말한다.

    김형효는 이를 불교적 개념을 도입해 ‘사량(思量)할 수 없다’고 해석했고, 무위당은 ‘힐(詰)’을 ‘다스릴 힐’로 보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라 했다. 따라서 도는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다 포함한 것 또는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혼이위일(混而爲一)’이다.

    도의 근본적 차원은 일상적인 감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양도 없고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는 것. 결국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자나 다른 도가들뿐만 아니라 세계 많은 종교에서는 궁극 실재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이 ‘무엇이다’하는 궁극적 표현보다는 ‘무엇일 수 없다’는 부정적인 표현을 더 많이 썼다.

    예를 들면 힌두교에서 궁극 실재인 브라만(Brahman)을 ‘이것일수도 저것일수도 없는 것(neti-neti)’이 라고 표현했다든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신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우리가 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뿐”이라고 한 것 따위이다. 이렇게 궁극적 실재를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부정의 길(Via negative)’이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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