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침구학 전통의 중심 儒醫
한국에는 鍼灸學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왔다. 鍼灸學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그 중요성이 인식되어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조선에는 『纂圖脈』, 『和劑指南』, 『銅人經』, 『鍼經指南』, 『子午流注』, 『玉龍歌』, 『針灸資生經』, 『十四經發揮』, 『外科精要』 등의 의서들을 읽고 鍼灸學專門醫가 되기 위해 공부하였다.
李馨益도 조선 침구술의 전통을 잇는 鍼灸專門醫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충청도 대흥 출신으로 인조 10년(1632년)에 內醫院의 추천으로 서울에 초청되어, 인조의 질병을 침구술로 치료하였다. 그는 번침술(燔鍼術)을 사용하였는데, 이 기술은 그 당시의 鍼灸醫들이 많이 사용한 방법은 아니었기에 당시의 朝士들 중에 이 기술은 邪術이라 하여 수차례에 걸쳐 그 죄를 묻고자 하였으나, 인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계속 그 요법으로 인조의 질병을 다스렸다. 燔鍼은 침을 불에 달구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를 쉬침 혹은 火鍼이라고도 부른다.
『靈樞·經筋』에서 말한 “침을 달구어 겁탈하듯이 찌른다(燔針劫刺)”라는 방법이 이를 말하니, 곧 침을 불로 빨갛게 달군 후 잽싸게 시술할 부위에 꽂았다가 빨리 뽑아 주는 치료 방법을 말한다. 明代 吳鶴皐는 『黃帝內經·素問』에 대한 註釋에서 “燔鍼은 침을 꽂은 후 불로 달구어 따뜻해지게 해주는 것으로써 침을 빨갛게까지는 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치료방법이 당시의 의료계에서 생소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당시에 인조에게 그 효과를 인정받아 보호 속에 계속 시술된 것은 한국의 침구임상의학 발전과정에서 큰 의의가 있는 것이라 하겠다. 다만 그의 치료술이 당시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이형익이 인조 사후에 중신들의 탄핵으로 유배되어, 그 鍼灸術이 후대에 계속 이어져 의학유파의 형성에까지 이어지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