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醫官에서 立身揚名한 儒醫
고려시대는 醫師들의 천국이었다. 文官보다는 못했지만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업무를 한다는 입장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지위를 높이기에 힘썼다. 과거를 醫業(일반 醫業)과 呪禁業(鍼灸, 外科 중심)으로 나누어 실시한 것은 醫官의 전문성을 인정하여 전문화에 대한 배려를 한 것이고, 俸祿을 상대적으로 높게 책정한 것은 醫官에 입문하는 인재들의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醫官으로 활동한 인물의 학술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는 상대적으로 높아서 고관대작에 오른 자들도 나오게 되었다.
薛景成은 바로 고려시대에 醫官출신으로 출발하여 높은 관직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는 본래 신라의 薛聰의 후예로서 대대로 醫學을 業으로 한 집안에서 성장하였다. 처음에는 尙藥醫佐에 임명되었다가 점차 군부총량, 동지밀직사사를 거쳐 도첨의사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는 특히 忠烈王이 병이 생길 때마다 불려가 치료를 도맡아 할만큼 醫術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가 병이 나서 고려에 의원을 청하였을 때도 그가 천거되어 이를 치료해내니, 쿠빌라이가 크게 기뻐하여 궁중에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게 해주었고, 그가 바둑 두는 것을 친히 보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이 때의 공로로 쿠빌라이가 여러 차례 불러 대접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에도 원나라 成宗의 병으로 원나라에 머물기도 하였다. 이렇듯 그는 당시에 국제적으로 醫術로 이름을 떨쳤고, 이를 기회로 높은 관직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는 특히 신체가 장대하고 외모가 아름답고 천성이 근후하여 제왕에게도 은혜를 구하지 않았을만큼 강직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능력과 인품은 여러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 벼슬이 正二品 贊成事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아들인 薛文遇도 成均館 大司成이 되어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醫官으로 立身揚名하여 가문을 부흥시켰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