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일의 儒醫列傳 40

기사입력 2006.11.24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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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種痘法의 보급에 힘쓴 儒醫

    천연두는 조선 후기 백성들을 괴롭힌 질환이다. 儒醫들을 중심으로 이 질환의 퇴치를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이 마련되었는데, 人痘法의 시행이 그것이다. 人痘法은 18세기 말에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이 때 실시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실시된 종두법은 주로 痘痂를 細末하여 물과 함께 丸을 만들어 鼻腔內에 접종시키는 즉 種痘法 중의 水苗法이 중심이었다.

    실학자인 朴齊家는 1799년 ‘鄭氏種痘方’이라는 전문 서적을 입수하였고, 丁若鏞은 이듬해에 이를 참조하여 ‘麻科會通’에 실었다.

    1800년에 朴齊家가 경기도 포천에서 향리와 함께 향리의 아들, 관노의 아들, 그리고 박제가의 조카에게 정약용의 種痘法要旨에 따라서 人痘法을 실시해 보았다.

    이것이 기록에 남아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人痘法 실시이다(이꽃메의 ‘한국의 우두법 도입과 실시에 관한 연구’ 참조).
    서얼 출신인 朴齊家는 정조년간에 규장각에 검서관으로 들어가면서부터 신진학문에 대한 필요성을 깊이 인지하게 되었고, 朴趾源, 李德懋, 柳得恭 등 北學派들과 사귀면서 학문의 본령을 經濟之志에 두고 활동을 시작하여 상공업 장려, 신분차별 타파, 해외통상, 서양인 선교사의 초청, 과학기술교육의 진흥 등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국민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는 국가의 부강은 백성들의 건강에 달려 있다고 판단하고 의학 연구에 매진하게 되었고, 이러한 노력은 당시 사회적으로 큰 문제였던 天然痘의 치료라는 목표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가 구성해낸 種痘治療法은 포천의 의원 李鍾仁에게 전해져 수많은 사람들의 인명을 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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