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金南一
慶熙大 韓醫大 醫史學敎室
조선 최고 전염병치료전문 儒醫
조선시대의 학자들은 기본적으로 醫學에 조예가 깊었다. 당시 통치이념이었던 성리학은 조선 식자층들의 관념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특히 의학이 성리학적 이념상 아버지인 군주가 자식인 백성들을 건강한 삶으로 이끌어주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 도구라고 생각하였기에 널리 권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金安國은 본래 趙光祖, 奇遵 등과 함께 金宏弼의 문인이었으므로 사림파의 선도자였다. 그는 1501년에 생진과에 합격하고 2년 후에는 별시문과에 합격하여 승정원의 박사, 부수찬, 부교리 등을 역임하면서 관료로서의 길을 달렸다. 그가 일반 백성들의 경제생활과 교양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실천적인 성리학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하는 것은 1517년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면서부터이다.
그는 이 때에 각 향교에 ‘小學’을 권하고, ‘農書諺解’, ‘蠶書諺解’, ‘二倫行實圖諺解’, ‘呂氏鄕約諺解’, ‘正俗諺解’ 등 백성들의 경제생활과 교양을 위한 한글판 언해서를 출간하고, 백성들의 건강을 지키는 데에 도움을 줄 ‘벽온방’, ‘瘡疹方’ 등의 醫書들을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였다. 비록 그가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잠시 경기도 이천으로 가서 후진양성에 힘쓰기도 하였지만, 1532년에 다시 등용되어 중앙 요직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는 1542년에 함경도에서 瘟疫이 크게 유행하자 왕명을 받아 朴世擧, 文世璉, 柳之蕃, 李倜, 鄭樞, 洪世河 등과 함께 瘟疫에 대해 나온 여러 醫書 내용 가운데 이용하기 쉬운 처방들과 상비약들을 중심으로 ‘分門瘟疫易解方’을 편찬하였다. ‘分門瘟疫易解方’은 1525년에 편찬된 ‘簡易·瘟方’의 60여개의 처방에 40여개의 처방을 첨가하고 이를 鎭禳, 不相傳染, 服藥, 勞服 등 4門으로 나누고, 여기에 藥名과 採取法을 첨가하고 언해를 붙여 간행한 것이다.
이렇듯 金安國은 당시 사회문제였던 전염병을 퇴치하기 위해 醫書를 편찬하고 이를 보급하는 데에 힘썼다. ‘分門瘟疫易解方’은 조선중기 전염병을 퇴치하기 위해 조정에서 간행하여 전국으로 유포시킨 의서이다. 한글로 언해를 단 것은 일반인들이 쉽게 응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이것은 전염병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것이 매우 실제적일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醫師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만만치 않은 요즘 시기에 金安國과 같은 儒醫가 했던 전염병 퇴치를 위한 노력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