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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호치민에서 ‘K-메디컬’의 미래를 그려”[한의신문] 베트남 상류층과 타국의 외국인 거주자들이 모여 드는 곳, 호치민의 ‘강남’이라 불리는 타오디엔(Thao Dien)에서 자연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최성주 원장이 한의 진료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대한민국의 우수 과학기술 인재들이 모이는 KAIST에서 항공우주공학을 전공한 최성주 원장은 복잡한 시스템을 분석하는 공학적 사고방식을 한의학에 접목 중이다. 최성주 원장은 “항공우주공학이 정밀한 계산을 통해 우주로 길을 낸다면, 한의학은 우리 몸의 균형을 정밀하게 분석해 건강으로 가는 길을 찾아낸다”고 밝혔다. 2023년 베트남에 첫 선을 보인 자연한의원(NATURE CLINIC)은 지난해 말 타오디엔의 현 위치로 이전 개원하면서 통증 재활, 내과 만성질환, 면역 체질 개선에 이르기까지 데이터와 원리에 기반한 진료를 선보이며 현지인과 외국인 사회에서 논리적이고 믿을 수 있는 한의원이라는 평을 얻고 있다. 최 원장은 “가족과 함께 해외살이를 계획하다가 베트남을 찾게 됐다”면서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의료 분야의 성장 가능성을 체감하게 됐으며, 특히 한의학의 장점을 잘 알린다면 베트남 시장에서도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개원까지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진료에 머물지 않고, 현지 내과 및 약국과의 협진 시스템을 구축을 통해 베트남 의료 시장의 중심부로 파고들었다. 까다로운 안목을 가진 유럽계 외국인과 베트남 신흥 부유층이 밀집해 있는 만큼 그들의 특성에 따른 개인 맞춤형 한의진료를 브랜드화했다. 현재 자연한의원은 최 원장을 비롯 현지 한의사 1명, 내과 전문의 1명, 약사 1명, 접수 3명, 간호 2명, 회계 1명, 마케팅 1명 등 모두 11명이 근무 중이다. 최 원장은 “베트남 현지인들이 많이 앓고 있는 근골격계 질환 및 스트레스성 내과 질환에 있어 한의 치료의 즉각적인 효과에 크게 놀라워한다”면서 “한국의 선진 의료서비스와 베트남 현지의 정서가 결합된 K-의료의 미래로 도약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 중”이라고 밝혔다. 최 원장은 또 “베트남은 기회의 땅이지만, 철저한 현지 법규 준수와 차별화된 브랜딩 없이는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실제 베트남에서 외국인이 진료를 하기 위해서는 베트남 의사면허를 별도로 취득해야 한다. 외국 의사면허를 기반으로 현지 면허를 발급받을 수 있지만, 이를 위해서는 언어시험과 각종 서류 제출 등 복잡한 과정을 밟아야 한다. 최 원장은 “개원하기까지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고, 제도 변화도 잦아 준비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다”고 말했다. 상당한 시간을 투자했고, 여러 시행착오도 겪었지만 다행히 현지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개원에 이르게 됐다. 최 원장은 현재 스레드, 틱톡, 블로그 등 SNS를 활용해 한의 의료의 우수성을 베트남의 현지 언어로 전파하는 등 디지털 마케팅에 적극 나서고 있다. 최 원장은 “베트남에도 전통의학이 있어 우리의 한의학과 유사한 개념에 대한 이해도가 좋은 편이고, 이러한 배경 덕분에 침, 뜸, 한약에 대한 거부감이 크지 않아 진료하는데 수월한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다만, 진료하는데 있어 어려운 점으로는 의사소통의 문제를 꼽았다. 통역 직원들의 도움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보다 더 정확한 진료를 위해 영어 및 베트남어 공부에도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최 원장은 “최근 K-컬처의 영향으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럽게 한국 의료 의 신뢰와 관심도 함께 증가하고 있다”면서 “발전된 한국의 의료 기술과 체계적인 진료 시스템을 바라보는 긍정적인 인식이 형성돼 있어 한의약을 향한 호기심도 지속해서 높아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베트남으로 진출하고 싶은 동료 한의사들을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인내심을 갖고 준비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한국과 베트남은 행정 시스템과 업무 처리 방식이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현지 환경과 문화를 충분히 이해하고, 시간을 여유 있게 잡고 준비하는 것을 추천드린다.” 최 원장은 “한국 한의학은 단순한 전통의학을 넘어 신뢰할 수 있는 의료 서비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며, “한의학은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이 충분한 만큼 호치민에서 일궈낸 작은 성과들이 한국 한의학의 세계화에 작은 밀알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베트남은 경제 성장과 함께 건강에 대한 관심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만큼 이 같은 흐름에 맞춰 보다 체계적인 한의 진료 시스템을 구축하고, 현지인들에게 한의학의 장점을 널리 알려 나가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는 특히 “점진적으로 진료 분야를 확대하고, 예방의학 및 건강관리 중심의 프로그램을 도입해 보다 전문적인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과 더불어 현지인들의 생활습관 및 체질에 맞춘 한의약 제품의 개발을 통해 일상 속 건강관리까지 확장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
“피카디 인턴십 통해 미래 의료인으로서의 AI 활용방향 고민”학교 수업에서 출발한 피카디 인턴십 본과 진입을 앞둔 지난 예과 2학년 겨울방학, 나는 조금 특별한 도전에 나섰다. 배효진 교수님의 한의임상생리학 과목의 외부 전문가 특강에서 소중한 기회를 얻게 되어, 1월5일부터 2월13일까지 6주간 ‘피카디(fika.d)’라는 회사의 인턴십에 참여하게 됐다. 피카디(fika.d)는 생성형 AI 기술을 기반으로 숏폼 영상 제작 솔루션인 ‘피카클립(ficaclip)’을 운영하는 유망한 테크 스타트업이다. 롱폼 영상을 단 몇 분 만에 퀄리티 높은 숏폼으로 자동 변환해 주는 기술력을 바탕으로, 중기부 팁스(TIPS) 선정과 구글 AI 퍼스트 프로그램 선발 등 여러 방면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회사를 이끄는 정원모 대표님이 경희대 한의대를 졸업한 ‘한의대 출신 창업가’라는 사실이다. 학부생 시절 스마트폰이 막 상용화되기 시작했을 때, 앱 개발에 흥미를 갖고 IT 기술의 가능성에 눈을 떴다는 대표님의 이력은 대단히 놀라웠다. 인턴십에 지원한 초기에는 “AI가 트렌드라고 하니 관심은 가고, 대표님께서 한의대 출신이신데 어떻게 AI스타트업을 창업하셨을까?”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인턴십은 단순히 AI를 사용해 경제가치를 창출하는 과정에 참여해 보았다는 단순 경험을 넘어, 미래의료인으로서 AI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 특별한 계기가 되었다. AI, 단순한 도구 넘어 실무의 파트너임을 체감 이번 인턴십은 오프라인 근무와 온라인 비정기 근무가 혼합된 형태로 운영됐다. 주된 업무는 숏폼(Short-form) 콘텐츠의 기획부터 대본 생성, 영상 편집에 활용될 자료들을 제작하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Google AI Studio, HeyGen, Veo 3, n8n 등 평소 이름만 들어봤던 최신 AI 툴들을 직접 구독하고 실무에 사용해보는 경험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EBS ‘지식채널 e’ 스타일의 교육용 콘텐츠 제작과 수원 영통 ‘윤빛한의원’의 홍보 숏폼을 제작한 일이다. 초기 기획 단계부터 AI는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했다. 수많은 레퍼런스 영상을 AI로 분석해 대중의 관심이 높은 영상의 포인트를 찾아내고, 주제에 맞는 대본을 생성한 뒤, 이를 다시 시각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디자인에 대한 감각과 지식이 전무한 내가, 이렇게 높은 퀄리티로 영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놀랍게 느껴졌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의 중요성이었다. AI가 생성한 결과물은 빠르고 정교하지만, 때로는 내가 요청한 사항과 다르게 결과물이 출력되거나,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지는 결과물이 생성될 때도 있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이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다. 사용자가 AI에 입력하는 명령을 ‘프롬프트’라고 하는데, AI가 사용자가 원하는 의도에 적합하게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도록 명령을 구성하고 다듬는 작업을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라고 한다. 같이 프로젝트를 진행한 상사분께 직접 피드백을 듣고, 몸소 이 작업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AI시대, 한의사는 어떻게 경쟁력을 가져야 하는가? 이번 활동은 한의원 경영과 임상 현장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을 주었다. 인턴십을 통해 만난 수원영통 윤빛한의원 이재현 대표원장님과의 협업은 한의사가 단순히 환자를 돌보는 의료인을 넘어, 하나의 사업체를 이끄는 경영자(CEO)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전국 한의원의 대부분이 원장 1인이 운영하는 구조라는 현실 속에서, 대표원장인 한의사의 시간은 가장 귀한 자원이다. 나는 여기서 AI의 진정한 가치를 볼 수 있었다. 한의사가 직접 해야 할 핵심 역량(인소싱)과 AI나 외부 시스템에 맡길 수 있는 부분(아웃소싱)을 명확히 구분하고, 이 전략을 바탕으로 남들과 차별화되는 자신만의 강점을 강화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기게 된다. AI를 경쟁자로 생각하고, 배우지 않는다면 대체되겠지만 AI에 대해 공부하고, 그 특성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활용만 할 수 있다면 나의 업무를 굉장히 전문적인 수준에서 보조해 줄 수 있는 아주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미래를 향한 네 가지 다짐 6주간의 여정을 마치며, 나는 앞으로의 학창 시절 동안 집중해야 할 네 가지 우선순위를 세웠다. 첫째, 흔들리지 않는 의학적 기초다. 기술과 언변이 아무리 화려하더라도 본질은 환자를 고치는 실력에 있다. 편향되지 않은 탄탄한 이론과 술기 공부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둘째, 사람을 향한 공감 능력이다. AI가 흉내낼 수 없는 환자와의 정서적 교감은 의료의 시작이자 끝이다. 이것이야 말로 AI시대에 의료인이 가져야 할 필수덕목일 것이다. 셋째, 기술의 능동적 활용이다. AI를 경계의 대상이 아닌, 내 진료와 외주 영역의 업무를 보조해 줄 직원으로 길들이는 방안을 끊임없이 모색할 것이다. Chat gpt, Gemini와 같은 접근성 좋은 AI뿐 아니라, 다양한 AI 툴들을 사용해보며, 경험의 폭을 넓힐 것이다. 넷째, 거시적 안목의 경영학적 학습이다. 홍보 전략과 보건의료체계를 이해하여, 더 많은 환자에게 한의학의 가치를 전달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울 것이다. 이번 경험을 통해, 앞으로 시대적 변화에 의료인으로서 어떠한 태도로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을 심도있게 해볼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이 글을 빌려, 이런 기회를 제공해주신 동국대 한의대 생리학교실 배효진 교수님, 피카디 CEO 정원모 대표님, 흔쾌히 한의원 참관 및 고견을 나누어주신 수원영통 윤빛한의원 이재현 대표원장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이 글을 마친다. -
침도요법 도입 22년, 세계화를 향한 도약과 정규 교과과정 편입을 위한 제언전 대한침도학회 창립회장 양현모 [한의신문] 2008년 민족의학신문 제654호에 “침도요법을 아시나요?(3)”라는 기고문을 통해 한국에 침도요법을 본격적으로 알린 지 어느덧 1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침도의학과 임상(2011년)’과 ‘침도의학 실용편(총론)(2019년)’ 출간을 거쳐, 2026년 5월 ‘Codex Acupuncture: 침도/호침/약침의 통합적 임상 매뉴얼’의 출간을 앞두고, 지난 22년 동안의 임상 및 침도 전파 여정을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초기 한국 한의학계에 ‘침도요법’이라는 낯선 치료법을 전파하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마음으로 ‘대한소침도학회(준)’와 ‘대한침도학회(준)’를 창립하였고, 이영우 원장님과 중국의 중서의(中西醫) 결합 의사인 강철수 원장님과 연계하여 수 많은 한의사 선후배님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약 10여년 임상강의 및 해부실습을 진행했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새로운 학술적 시도와 진료가 의료법 체계 내에서 안전한 범위에서 이어질 수 있도록 동분서주했습니다. 침구제작회사 우전침구와 협력하여 중국과는 다른 크기와 모양을 갖춘 한국형 침도를 개발해 마침내 우리나라의 정식 의료기기로 편입시켰습니다. 또한 침도요법 관련한 책 출판, 임상강의 및 임상사례를 통한 임상검증을 통해 진료 현장에서 널리 사용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현재 ‘대한침도학회(준)’, ‘대한침도의학회’, ‘원리침학회’ 등 여러 학회가 활동하고 있으며, 전국 수 많은 한의원에서는 합법적인 의료기구인 침도(도침)를 사용해 다양한 질환이 치료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성과의 배경에는 초기 침도요법의 전파과정에서 쏟았던 많은 분들의 땀방울과 열정이 깊게 베어 있습니다. 영문판 ‘Acupuncture with Acupotomy’ 출간의 의미 한국의 임상 현실에 맞추어 독자적으로 진화하고 발전한 침도(도침) 요법은 이제 세계 무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2026년 5월 한국판 ‘Codex Acupuncture’ 출간에 앞서, 동일한 내용을 2권의 분량으로 나눈 영문판 ‘Acupuncture with Acupotomy’를 2026년 4월 9일, 21일에 각각 아마존을 통해 출간했습니다. 이 책의 출간은 단순히 개인적인 임상경험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한국의 고도화된 침도(도침) 임상 및 약침의 응용방법과 그 학문적 토대(병리 및 해부)를 영어권 국가에 직접 전파한다는 데 깊은 의의가 있습니다. 해부학적 지식, 연부조직의 병리 및 움직임에 기반하여 “어떻게 하면 더욱 신속하고 정확하게 진단하고 효율적으로 치료할 수 있을까?”를 치열하게 고민해 온 한의사의 노하우를 세계화하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침술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주변국들 사이에서, 우리 한의학이 탁월한 임상기술을 바탕으로 세계 전통의학을 선도할 수 있는 확고한 학술적 근거이자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라 희망합니다. 세계의 변화, 의료급여의 도입 및 한국 정규 교과과정 편입의 시급성 연부조직의 질환에 대한 침도요법의 발전과 임상의 응용에 있어서 지금까지 이룩한 성과에 안주하기에는 외부 세계의 변화가 빠릅니다. 침도요법의 발원지인 중국은 이미 이를 단순한 치료법이 아닌 ‘침도의학’으로 승격시켰으며, 과거 일부 학교에서 시범적으로 운영하던 교과목(소침도요법)을 넘어, 2026년부터는 중의대 정규 교과과정에 ‘침도의학’ 교재를 정식으로 채택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하나의 의학으로 승격하고 국가의 집중적인 연구와 지원을 하고 있으며 여러 나라에 침도의학을 공격적으로 전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제 우리의 현실을 냉정하게 되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침도(도침)을 응용한 치료방법, 응용범위 및 학술적 연구가 훌륭하게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우리는 여전히 개인 간의 임상경험 전수와 학회 중심의 교육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또한 의료보험 체계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한의대를 졸업한 이후 22년간 침도(도침) 위주로 진료를 시행하며 수많은 난치성 통증 환자분들을 효율적으로 치료해 온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토록 효과적인 치료법이 아직까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문제나 한의대 정규 교과과정에 체계적으로 편입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학계의 크나큰 손실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고도의 치료법에 필수적인 ‘침도를 위한 전문 해부과정’조차 부족하다는 사실은 우리 임상의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진료를 시작하고 있는지를 방증합니다. 따라서 침도를 위한 해부학 정규과정 도입과, 정규 교과과정 내 침도요법 교육이 매우 시급함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최근 10년여간 한적한 시골에서 임상을 이어가고 있지만, 현 시점에서 한의학의 미래에 대한 또 다른 발전 방향을 생각해봅니다. 척박했던 초기 전파의 시기를 지나 한의학의 세계화를 향해가고 있는 지금, 침도에 대한 내용은 마땅히 한의과대학 정규과정에 임상적인 내용을 토대로 학술적이고 실용적인 방향으로 수록되어야 합니다. 후학들에게 제도권 내에서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교육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한의학은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춘 미래의학으로 힘차게 도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벽이 아닌 문! 문이 아닌 길!신미숙 국회사무처 부속한의원 원장 (前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편집자주] 『신미숙의 여의도 책방』은 각 회마다 1개의 키워드에 5권의 도서를 추천하는 형식으로 이어갑니다. “장애인들이 체육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 보니 처음에는 벽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 벽을 넘는 게 어렵지 않다. 한 번 넘으면 다른 벽을 넘는 건 더 쉬워진다. 스포츠가 자신의 세상을 깨부수고 나올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지난 3월26일 밀라노 동계 패럴림픽에서 5개의 메달을 목에 건 장애인 노르딕스키 국가대표 김윤지 선수(2006년생)의 웃는 얼굴도 인상적이었는데 인터뷰도 똑소리가 난다. 비장애인 선수들의 성공 서사와는 결이 다른 김 선수의 당당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진다. 시각장애를 가진 의원님 한 분이 가끔 내원하신다. 원래 가지고 있던 우측 무릎 통증이 12·3 계엄 때 월담하는 과정에서 더 악화되었다고 하셨다. 누워서 치료받는 그 짧은 시간에도 귀에는 이어폰, 손에는 노트북을 지참하시고 시각장애인용 음성 프로그램으로 발표 자료를 확인하는 열정을 이어가신다. 어디서도 들어볼 수 없는 찰진 유머와 구수한 입담을 보유하신 의원님께 그 비결을 여쭈었더니 친정 아버지께서 성대모사를 기가 막히게 잘 하시는 밝은 성격의 분이었다고 하시며 그게 재능이라면 아마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 같다고 하신다. 중2 때 발병한 망막색소변성증으로 1급 시각장애인 판정을 받으셨지만 그 벽을 넘고 넘어 오늘이라는 당신 자리에 우뚝 도달하신 분! 본인이 가진 장애를 벽이 아닌 문으로, 문이 아닌 길로 만들어낸 분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불편이 불편이 아니었다. 이날까지 살아보니 이 불편이 내 삶에는 축복이었다!” 『찬란한 불편』(하오밍이, 섬드레, 2025년 6월) - 나는 목발을 짚고 다니며 세계를 탐험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 탐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도 배웠다. 그 덕분에 나는 지금도 호기심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 어머니는 나를 위해 따뜻한 보온병 같은 세계를 만들어주었다. 밖에서 다칠까 봐 걱정했던 어머니는 내가 집에 머무는 걸 더 좋아하게 만들었다. - 인생이란 한 사람이 성장 과정에서 다양한 사물에 대한 조합 능력을 개발하는 과정이다. - 자신을 인식하고 정리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핵심은 자신의 한계를 찾아내고 그것을 돌파하는 것이며, 자신의 파편을 직면하고 그 속에서 완전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장애, 이해하고 있다는 오해』 (에밀리 라다우,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 2025년 6월) - 장애인으로서 자신을 설명하고 정의하는 방식에는 개인적인 선택지들이 있다.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핸디캡(handicapped)이란 용어는 이제 정말 그만 써야 한다는 것이다. - 장애인 커뮤니티의 역사는 고통스러운 억압부터 힘겹게 쟁취한 시민권의 승리까지 꽤 파란만장하다. - 신경다양성은 치료가 필요한 무언가가 아니다. 없어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들을 그들이게끔 하는 정체성의 일부분이다. - 모든 장애인은 자신의 삶에 관한 전문가이다. 그러니 장애인을 대신에 장애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말라. 『재활의 밤』(구마가야 신이치로, 동녘, 2025년 10월) - 애초에 몸의 긴장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의 운동에 불필요한 요소일까? 몸의 긴장이 없을 때만 사람은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일까? - 뇌성마비를 지닌 몸에서는 어떤 목표를 갖고 운동하려 할 때 목표에 반하는 긴장이 필연적으로 온몸에 넘쳐난다. 그러므로 운동을 할 때 그런 긴장, 즉 과도한 신체 내 협응 구조를 풀기 위해 자신의 몸에 어떤 암시를 준다. - ‘회복접근’의 재활에서 드러나는 한계 그리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클라이언트의 불만을 ‘장애수용’이라는 말로 억압하려는 현장의 독단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 - 나의 삶은 쇠퇴를 향해 서서히 형태를 바꾸어 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줄어들고, 주변의 지원이 점점 더 필요할 것이다. 『발달장애 당사자연구』 (아야야 사츠키, EM실천, 2025년 10월) - 대량으로 자극을 너무 많이 받아들여 많은 감각에 머리가 파묻혀있는 상태를 나는 감각포화라고 부르고 있다. - 누른 부분에서 누르지 않은 부분을 제어할 수 있다는 이러한 감각은 나 또한 기분 탓인가 하고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침을 맞으러 가게 되었을 때도 ‘동양의학이라니, 정말로 효과가 있는 걸까? 비싸기만 한 거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 “거기를 누르니 위가 움직이기 시작하네요” “역시 그곳은 목이랑 이어져 있었군요” “온열요법은 피 순환을 좋게 하거나 림프액의 흐름을 촉진시키는 거로군요” ‘이렇게 동양의학에 익숙해져 가는 나는 또 뭘까?’ 『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권용덕, 김영사, 2026년 4월) - 장애는 그저 하나의 특징이고, 서로 다른 수많은 사람에게서 하나의 다름일 뿐이다. 이 다름은 옳고 그름의 기준에서 틀린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차이일 뿐이다. - 많은 사람이 장애는 태어날 때부터 발생한다고 생각하는데, 국내 전체 장애인의 88.1%는 후천적으로 발생한다. -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에서 장애인의 이동권은 권리로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장애인의 권리로만 보여졌던 것이다. - 통합교육을 통해 같은 공간에서 함께 공부하고 고민하고 시간을 보내며 서로에게 익숙해져야 한다. 그래서 통합교육이 필요하고 존재하는 것이다. 4월 말 모교 학술위 초청으로 특강을 앞두고 있다. 2026년에 한의대생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더 이상 핫하지 않은 한의대에 진학하여 5∼6년차에 접어든 본3∼4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복지부보다 문체부랑 더 가깝고 『EBS명의』보다는 『동치미』에 주로 초대되는 게 한의사랍니다. 의사, 약사와 상의하라는 TV광고의 글귀는 있어도 한의사와 상의하라는 권고를 공중파에서 접한 적은 없죠?” 이런 대사로 강의를 시작했다간 괜히 분위기만 싸해지는 건 아닐까? 간만에 학부생 대상 강의를 하러 간다고 하니 딸냄이 당부하며 건넨 말 “어머니, 강의하시다가 상처받지 마세요. 아무도 안 들을 거예요. 딴짓하고 질문 없고 모두 폰만 들여다보고 있어도 저희 세대 특징이니 그러려니 하세요. 광주까지 먼 걸음 하시는데 기왕 가시는 길, 맛집 탐방 많이 하고 오셔요!” 이 팩폭은 위로인가? 응원인가? 조롱인가? 사랑인가? 2006년 산티아고 순례길 800km 도보여행을 다녀온 후 고향 제주에 올레길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셨던 서명숙 이사장께서 지난 4월7일 별세(향년 68세)하셨다. 2007년 사단법인 제주올레가 발족된 이래 올레길은 현재 27개 코스(437km)가 완성된 상태다. “걷는 길은 우리 국토 곳곳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다만 우리가 걷지 않았고 잊어버렸고 상실한 것일 뿐이다”라고 생전에 말씀하신 바 있다. 지금은 높은 벽으로 느껴지지만 개발된다면 올레길이 될 수도 있는 한의학에도 아직 발견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2025년 12월19일 이형훈 제2차관 주재로 ‘제5차 한의약 육성발전 종합계획(2026∼2030)’을 확정했다. 2026년부터 어르신의 건강을 지속적으로 살피는 ‘한의 주치의 제도’를 도입하고 한의약을 돌봄 중심 의료로 확장하겠다는 구상이다.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의 건강주치의 시범사업도 동시에 검토된다. 2018년 5월부터 시행되어온 장애인 건강주치의 시범사업이 홍보 부족으로 장애인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임에도 의협은 위 발표 닷새만에 한방 난임사업도, 한의사 주치의 돌봄 확대도 즉각 중단하라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한의계의 모든 사업에 절대반대를 외치는 의협이라는 철벽이 무너질 날이 오기는 할까? 이번에 강의를 마칠 무렵 학생들 중 그 벽을 한 번 넘어볼 학생이 있는지 한 번 물어봐야 겠다. 물론 아무도 손 들지 않겠지만…. -
습관의 힘배용원 대표변호사 •법률사무소 동촌(東村) •前 청주지검장 •대한한의사협회 자문변호사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William James가 『The Principles of Psychology』에서 남긴 이 말은, 습관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에 의하면 습관은 삶의 구조를 형성하는 힘이 됩니다. 요즘 저는 달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루 10분 남짓,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도는 소박한 운동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주섬주섬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아파트 단지를 1.7킬로미터쯤 달리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운동이라고 말하는 것이 쑥스럽습니다만, 주말에는 3∼5킬로미터 가량 장거리(?)를 뛰기도 합니다. 뒤늦게 시작한 것이 아쉬운 달리기 습관 이 작은 달리기는 ‘부담 없이 지속할 수 있는 운동’을 찾다가 자연스럽게 시작되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2년 정도 달리기를 이어오다 보니, 언젠가부터 내가 그만두면 상대방까지 멈추게 할 수 있다는 심리적 책임감(Koöller effect)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힘든 날에도 꼬박꼬박 나가게 됩니다.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지하 주차장이나 아파트 단지의 캐노피 아래를 빙빙 돌며 그 날의 몫을 채우기도 합니다. 아침 시간을 놓치면 저녁에라도 달립니다. 어느 날은 잠들기 직전에 생각이 나 ‘아차!’ 하며 자정 직전에 급히 달리러 나간 적도 있습니다. 지구의 둘레는 약 4만 킬로미터라고 합니다. 하루에 2킬로미터씩 달리면 한 바퀴를 도는 데 50년 정도 걸립니다. 20대 젊은 시기에 시작했다면 앞으로 20여년만 더 달리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것인데, 뒤늦게 시작한 것이 아쉽습니다. 하루 10여분에 불과하지만, 그게 쌓이고 쌓여 태평양을 건너고 대륙을 가로질러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거리라면 대단한 일이 아닌가요? 달리기는 운동을 넘어 계절을 읽는 시간 달리기를 하면서 계절도 두 바퀴를 돌았습니다. 매일 아파트 단지를 돌다보면 자연의 변화를 체감하게 됩니다. 따뜻한 아침 햇볕에 땅속의 살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건 봄이 오는 신호입니다. 달리는 걸음을 멈추고 연둣빛 잎눈이나 꽃눈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여름에는 아침부터 달궈진 열기를 피해 저녁 시간을 택하는 날이 많습니다. 가을로 들어서면 바람이 시원해지고 정신이 맑아집니다. 옷장 깊숙이 넣어둔 방한 러닝복을 꺼내는 것은 겨울을 맞는 준비입니다. 어느덧 달리기는 운동을 넘어 계절을 읽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침 식단도 조금 바꾸니 몸이 가벼워지고 하루의 리듬도 안정되었습니다. 이제는 아침 달리기가 중요한 일상이 되었습니다. ‘하지 않으면 불편한 일’이 되어갑니다. 무릎이 허락하는 날까지 매일 매일 이어가려고 합니다. 언젠가 멈추게 되면, 중요한 것을 놓는 느낌일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 습관이 우리를 이끌게 돼”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는 우리가 반복적으로 하는 것의 결과다. 탁월함은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또 『The Power of Habit』의 저자 찰스 두히그는 ‘반복되는 행동이 극적인 변화를 만든다. 나와 세상을 바꾸는 힘은 습관’이라고 강조합니다. 되돌아보면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듭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이 지나면 습관이 우리를 이끌게 됩니다. 의지로 시작한 작은 반복이 나중에는 삶의 방향에 영향을 주는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자신에게 맞는 작은 습관 하나를 조용히 시작해 보시면 어떨까요? 그 사소한 시작이 훗날 생각보다 멀리 우리를 데려다 줄 거라 믿습니다. -
WHO 전통의학 협력센터, ‘협력’의 방식이 바뀌고 있다한국한의약진흥원 정책본부 세계화센터 최서란 선임연구원 [한의신문] 필자는 지난 4월 7일부터 9일까지 프랑스 리옹 국제회의센터에서 열린 ‘제1회 세계보건기구 글로벌 협력센터 포럼(Global Forum of WHO Collaborating Centres)’에 참석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처음으로 전 세계 협력센터를 한자리에 모은 이번 포럼은 ‘협력의 방식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 자리였다. 이 글에서는 리옹 현장에서 논의된 핵심 메시지와, 그 속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새로운 협력의 방향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One Health Summit : ‘인간·동물·환경의 건강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One Health 개념을 글로벌 차원에서 공유 세계 보건의 날(4월 7일)에 맞춰 프랑시 리옹에서 열린 ‘고위급 원헬스 정상회의(High-Level One Health Summit)’에는 WHO의 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비롯한 20여 개국 정상 및 장관급 인사가 참석했다. 원헬스(One Health)는 보건, 농업, 환경 등 그동안 서로 다른 영역에서 다뤄지던 문제들을 통합적으로 바라보고 효과적으로 관리하자는 접근 방식이다. 이는 감염병의 상당수가 동물에서 기원되고, 환경 변화가 인간의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식품과 항생제 문제 역시 보건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이 자리에서 테드로스 WHO 사무총장은 “감염병, 기후 변화, 생물다양성 손실과 같은 위협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보건 분야만으로는 대응에 한계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다음 위기가 시작되기 전에 이를 막기 위해 One Health 접근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또한 국가 수준에서 실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WHO의 조정 역할을 강화하겠다는 점도 함께 언급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역시 “과학이 행동을 이끌어야 하고 협력이 힘이 되어야 한다”라고 언급하며, 과학에 기반한 예방과 국가 간·분야 간 협력의 재정비 필요성을 강조했다. ‘활동’에서 ‘프로그램 참여’로: 협력의 구조가 바뀌다 8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WHO 협력센터 포럼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협력센터의 역할을 다시 정의하려는 흐름이었다. WHO는 협력센터가 단순히 개별 과제를 수행하는 기관이 아니라, WHO 프로그램의 설계와 이행 과정에 함께 참여하는 ‘프로그램의 일부(part of the programme)’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활동(activity)’ 중심에서 ‘프로그램 참여(programmatic engagement)’ 중심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메시지가 반복적으로 제시되었는데, 이는 그동안 연구 수행, 교육 제공, 기술 지원 등 개별 활동 단위에 머물렀던 WHO 협력센터의 역할이 앞으로는 WHO의 중장기 전략과 직접 연결된 프로그램 단위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와 함께, 각 협력센터가 모든 것을 다 하려 하기 보다는 우선순위를 명확히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도 강조됐다. “무엇을 할 것인가”뿐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를 함께 결정하는 것이 전략적 협력의 핵심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지역 불균형과 협력센터 네트워크의 확장 두 번째 세션에서는 협력센터의 지역적 불균형 문제가 주요하게 다뤄졌다. 현재 많은 협력센터가 고소득 국가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질병 부담이 높은 중·저소득 국가에서는 협력 기반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 문제로 제기됐다. 이에 대해 WHO는 협력센터 간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다국가 협력 모델을 확대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단일 기관이 개별 국가 단위에서 활동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여러 협력센터가 함께 참여해 지역 단위의 역량을 구축하는 구조다. 예를 들어, 병원 기반 협력센터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해 WHO 가이드라인을 현장에 적용하고 이를 통해 지역 역량을 강화하는 모델이 소개됐다. 이러한 방식은 단순한 기술 이전을 넘어, 지속 가능한 보건 시스템 구축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WHO 우선순위(2025-2028)와 협력센터 업무의 정렬(alignment) WHO의 최상위 전략인 GPW14(2025년~2028년)는 모든 사람의 건강과 웰빙을 증진·보호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번 포럼에서는 이 전략과 협력센터의 활동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가 주요하게 논의됐다. WHO는 감염병 대응, 비감염성 질환 관리, 보건 시스템 강화, 허위정보 대응 등 다양한 우선순위를 제시하며, 협력센터가 이러한 흐름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특히 ‘country impact pathway’라는 개념이 강조됐다. 이는 글로벌 논의가 실제 국가 정책과 건강 개선으로 이어지는 실행 경로를 의미한다. 협력센터는 이 과정에서 연구를 정책으로 연결하고, 정책을 다시 현장에 적용하는 ‘중간 매개자’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또한 허위정보(misinformation) 대응 역시 중요한 과제로 제시됐다.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정보 전달과 소통은 앞으로 협력센터가 수행해야 할 중요한 역할 중 하나로 강조됐다. One Health와 전통의학: 통합적 접근의 가능성 포럼과 함께 진행된 논의에서는 One Health와 전통의학의 연계 가능성도 언급됐다. 전통의학은 예방 중심의 접근과 생활 기반 관리, 그리고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One Health와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 실제로 논의 과정에서는 기후변화 대응 행동에 대한 인식과 실천을 국가 간 비교하는 연구 아이디어가 제시됐고, 이는 문화적·환경적 요인이 건강행태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는 데 의미 있는 접근으로 공감을 얻었다. ‘협력’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시점 리옹 포럼은 협력센터의 역할이 단순히 WHO가 필요로 하는 프로젝트 수행을 넘어, 공동의 목표를 함께 설계하고 실행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포럼을 마무리하며 테드로스 사무총장은 WHO와 협력센터의 관계가 더 이상 보고와 행정 중심의 관계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공동 기획과 공동 책임을 기반으로 한 실질적이고 동등한 파트너십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또한 협력센터 간 네트워크 확대와 지역 간 불균형 해소, 그리고 WHO와의 양방향 소통을 통해 실제 국가 수준의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점도 핵심 메시지로 제시됐다. 전통의학에 대한 인식 역시 변화하고 있다. 전통의학은 더 이상 경험에 의존하는 영역이 아니라, 과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글로벌 보건에 기여하는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 특히 이번 세계 보건의 날을 맞이해 제시된 메시지,‘Stand with Science’는 전통의학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전통의학 역시 검증 가능하고, 설명 가능하며, 재현 가능한 지식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의미다. WHO 전통의학 협력센터로서 한국한의약진흥원의 역할 한국한의약진흥원은 WHO 전통의학 협력센터로서 크게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첫째는 실사용 데이터(real-world data, RWD)를 기반으로 전통의학의 근거를 축적하는 것이다. 실제 임상과 국민 건강 데이터를 바탕으로 효과와 활용 양상을 분석하고, 이를 WHO와 공유함으로써 정책과 가이드라인 수립에 기여하고 있다. 둘째는 한약을 포함한 전통의약품의 품질관리와 표준화 체계를 강화하는 것이다. 시험·분석, 기준 설정, 품질관리 시스템 구축 등을 통해 신뢰할 수 있는 전통의학 기반을 만들어가는 작업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Stand with Science’라는 방향성과 맞닿아 있다. 데이터로 효과를 설명하고, 표준으로 품질을 확보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며 결국 전통의학 협력센터의 역할은 전통과 과학을 연결하는 데 있다. 경험을 근거로 전환하고, 지역의 지식을 글로벌 기준으로 확장하며, 이를 통해 각국 보건 시스템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번 리옹 포럼은 한국한의약진흥원을 비롯한 WHO 협력센터들이 WHO와의 관계를 ‘지식과 기준을 함께 만들어가는 파트너십’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전통의학 품질관리, 연구, 정책 지원 등 기존의 협력 경험을 바탕으로, 진흥원은 WHO의 글로벌 전통의학 프로그램 안에서 실질적인 기여를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전통의학이 글로벌 보건의 미래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보다 설득력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이자 자산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
한의재택의료학회, 예비회원학회 등록…“주치의 도입 관건”방호열 한의재택의료학회장 [한의신문] 한의재택의료가 통합돌봄 체계의 핵심 축으로 부상하고 있는 가운데 한의재택의료학회가 최근 개최된 대한한의학회 정기총회에서 예비회원학회로 등록되며, 한의계 학문단체로서의 첫 발을 내딛었다. 이는 그동안 한의방문진료 현장에서 축적돼 온 임상 경험이 학술적 기반과 조직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본란에서는 방호열 회장으로부터 한의재택의료의 현주소와 제도적 과제, 향후 발전 방향에 대해 들어봤다. [편집자주] Q. 대한한의학회 예비회원학회로 등록됐다. 학회는 이사진과 회원들의 개인적인 시간과 헌신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이에 대해 감사함과 동시에 미안한 마음도 크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학회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2024년에도 준비했으나 시기를 놓쳤고, 2025년 초부터 다시 기획을 시작해 이번에 예비회원학회로 등록됐다. 현재 학회에는 210여 명의 한의사를 비롯해 사회복지학 교수, 간호학 교수 등이 특별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전국 111개 한의재택의료센터 가운데 76개 기관이 회원으로 가입돼 있으며, 대학 및 연구기관, 공공기관, 개원의, 봉직의 등 다양한 영역의 전문가들이 고르게 참여하고 있다. 학회는 총무위원회, 학술편집위원회, 교육위원회, 정책위원회, 대외협력위원회 등으로 구성·운영되고 있다. 특히 교육위원회는 회원 대상 세미나뿐 아니라 전체 한의사를 대상으로 한 온라인 무료 세미나를 지속적으로 진행해 왔다. 2024년에는 14회에 걸쳐 26개 주제 발표를, 2025년에는 30회에 걸쳐 36개 주제 발표를 진행했다. 이번 등록의 성과는 이사진들의 헌신 덕분으로,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Q. 재택의료 전문 학회를 발족하게 된 계기는? 지난 2024년 4월 서울에서 열린 방문진료 관련 모임을 계기로 연구회가 시작됐다. 여러 한의사들에게 연락해 32명을 모아 ‘한의재택의료연구회’를 구성한 것이 출발점이다. 초기에는 한의재택의료 관련 자료가 거의 없어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자료를 직접 구축해야 했고, 초기 운영을 위한 분담금도 마련했다. 이러한 기반이 점차 확장되면서 현재는 안정적인 학회 운영 체계를 갖추게 됐다. 개인적으로는 거제 지역에 거주하고 있어 대부분의 회의와 대외활동이 서울에 집중된 상황에서 이동 부담이 컸다. 아울러 교육 측면에서는 지난해 대전에서 약 60명 규모의 임상술기교육(BCS)을 준비해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오랜 기간 준비한 만큼 의미가 컸다. Q. 한의사가 참여하는 재택의료 제도 현황은? 방문진료는 5년차, 재택의료는 4년차에 접어들며 많은 변화가 있었다. 긍정적인 부분도 있으나 전반적으로 의과와의 격차는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의과는 방문진료 기반의 일차의료 사업이 확장되고 있는 반면 한의과는 제도적 정체를 겪고 있다. 이로 인해 현장에서는 사업 확장성이 제한되고, 인력 고용에도 어려움이 발생하고 있다. 특히 간호 동행수가가 아직 마련되지 않았고, 방문횟수 제한도 의과(140회)에 비해 한의과(100회)가 불리하다. 장애인 주치의 제도에는 아직 진입하지 못했으며, 노인 주치의 제도 역시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Q. 현행 제도에서 시급히 보완돼야 할 점은? 앞에서도 서술했듯이 간호 동행수가 신설, 방문진료 횟수 상향, 장애인 주치의 제도 도입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더불어 의과의 지역사회 혁신시범사업과 유사한 형태의 한의 주치의 제도 도입도 요구된다. Q. 재택임종도 소개됐는데, 현재 한의재택의료는 어디까지 왔나? 한의방문진료가 약 5년간 지속되면서 진료 범위가 크게 확대됐고 다양한 임상 사례가 축적되고 있다. 초기에는 침, 뜸, 부항 중심의 단순 치료가 주를 이뤘지만 현재는 보다 전문적인 영역으로 발전했다. 대표적으로 재택임종 사례가 증가하고 있으며, 이는 고도의 경험과 숙련이 필요한 분야임에도 전국적으로 점차 확대되고 있다. 또한 욕창 관리 및 치료, 도뇨관·비위관 관리 등도 안정적으로 수행하는 한의원이 증가하는 추세다. Q. 한의계가 함께 추진해야 할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여러 기관과 협력을 시도해왔으나 이해관계와 다양한 시각 차이로 인해 쉽지 않은 측면이 있었다. 논쟁과 충돌로 인해 정책 추진이 지연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현재는 정부 정책상 일차의료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시기인 만큼 한의계가 협력해 주치의 제도와 일차의료 정책을 중심으로 공동 대응해야 한다. 이를 통해 어려운 국면을 함께 극복할 필요가 있다. Q. 향후 추진 계획은? 내년에는 회원학회 인준을 목표로 올해 학술대회와 학술지 발간을 준비하고 있다. 교육 프로그램도 더욱 다양화하고 고도화할 계획이다. 방문진료를 막 시작한 한의원부터 오랜 경험을 축적한 기관까지 수준별 맞춤 교육이 필요하며, 의료취약지역 한의원에 대한 지원도 강화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이달 26일 첫 학술대회, 5월17일 부산·경남 임상술기 실습교육이 예정돼 있다. 또한 재택의료 운영 교육과 컨설팅을 추진하고 있으며, 정보통신위원회를 중심으로 전산 자동화 시스템도 준비 중이다. Q. 이외 강조하고 싶은 말은? 최근 통합돌봄이 본격 시행된 가운데 의료 영역의 핵심은 재택의료라고 생각한다. 특히 의료취약지역에서는 더 많은 한의사의 참여가 필요하다. 다만 방문진료는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어려운 분야로, 지속적인 교육과 경험 축적이 필수적이다. 앞으로 모두가 함께 노력해 지역사회 내에서 환자들이 지속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환경, 즉 ‘Aging in Place’를 실현해 나가길 기대한다. -
교육에도 망설임이 필요하다한상윤 원광대 한의과대학 교수 (한의학교육학회 회장)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원광대 한의과대학 한상윤 교수(한의학교육학회 회장)로부터 한의학 교육의 질적 향상과 함께 우수한 인재 양성을 위해 ‘한의학 교육의 현재와 미래Ⅱ’ 코너를 통해 한의학 교육의 발전 방향을 소개하고자 한다. 매년 4월에는 중간고사가 있어서 캠퍼스의 활기찬 봄기운도 잠시 숨을 죽인다. 도서관은 늦은 시간까지 불이 꺼지지 않고, 강의실과 열람실에는 책과 노트를 펼쳐둔 학생들이 자리를 지킨다.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 곁에는 이제 두꺼운 교재만이 아니라 노트북과 패드, 스마트폰이 함께 놓여 있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더 이상 혼자서만 공부하지 않는다. 궁금한 개념이 생기면 곧바로 AI에 질문을 던지고, 복잡한 내용을 정리해 달라고 요청하며, 시험 대비 예상 문제까지 만들어 본다. 어떤 학생은 긴 강의 내용을 요약해달라고 하고, 또 다른 학생은 자신의 답안을 첨삭 받는다. 시험 준비의 풍경 속에 인공지능은 이미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AI와 인간과의 차이점은 ‘망설임’의 유무 이러한 변화는 학습의 방식 자체가 달라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 앞에서 오랜 시간 머물며 고민해야 했다면, 이제는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정리된 답’을 얻을 수 있다. 그 결과 학습의 속도는 분명 빨라졌고, 효율성 또한 높아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더 나은 학습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최근 한 TV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한 김애란 소설가는 전전긍긍과 자문자답의 과정 속에 작가로서 글쓰기 근육이 늘었다고 자평하면서, AI와 인간과의 차이점을 ‘망설임’의 유무라 하였다. 망설임 없이 유려하고 빠른 AI의 대답보다 무언가를 위해 주저하거나 말을 삼키는 투박한 인간의 침묵이 더 위로를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속도와 효율이 능사가 아니라는 얘기였다. 이 대목에서 우리 교육에도 망설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활자보다 영상이, 긴 글보다 짧은 콘텐츠가 더 익숙한 시대에 있다. 특히 ‘쇼츠’와 같은 짧은 영상은 정보를 빠르게 전달하고, 짧은 시간 안에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빠르게 이해하고, 빠르게 반응하는 데 익숙해지고 있다. 하지만 단편적인 정보에만 길들여진 사람은 전체 맥락을 파악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점점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좁아지게 될 것이란 우려가 든다. 학습 역시 예외가 아니다. 길게 읽고, 깊이 생각하는 시간보다, 핵심만 빠르게 파악하고 결과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성장을 하기 위한 고민의 시간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편리함과 속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교육에서 더 중요한 어떤 것들이 점점 밀려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이 필요하다. “빠르게 얻은 이해는 쉽게 무너질 수 있어” 실제로 한의과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이러한 흐름은 확인된다. 작년 12월 동의생리병리학회지에 게재된 ‘한의과대학 학생의 생성형 인공지능 활용 현황과 교육적 요구에 대한 탐색적 연구: 학년별 인식 차이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보면, 학생들은 생성형 인공지능을 학습을 위한 주요 도구로 인식하고 있으며, 과제 수행이나 정보 탐색 등 다양한 학습 과정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학년 학생들은 AI를 보고서 작성과 같은 기본적인 학습 보조에 많이 활용하는 반면, 임상실습을 경험한 고학년 학생들은 임상 사례 분석이나 진단 연습과 같은 보다 실제적인 상황에서 활용하는 비율이 높았다. 이는 인공지능이 단순한 편의 도구를 넘어, 점차 임상적 판단을 보조하는 도구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AI에 대한 학생들의 기대 또한 매우 높았다. 많은 학생들이 인공지능이 최신 의학 정보를 탐색하고, 임상 문헌을 해석하며, 근거 기반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이는 학생들이 이미 인공지능을 단순한 ‘답을 주는 기계’가 아니라, 자신의 사고를 확장시키는 도구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려도 존재한다. 인공지능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자기주도적 학습 능력과 비판적 사고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편리함이 커질수록, 스스로 고민하고 판단하는 과정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매끄럽게 정리된 문장을 옮기는 것과, 스스로 생각해 도달한 문장은 분명 다르다. 겉으로 보기에 완성도가 높은 결과물일수록, 그 이면의 사고 과정은 간과하기 쉽다. 특히 우리가 경계해야 할 지점은 ‘이해했다’는 감각이 너무 쉽게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잘 정리된 설명을 읽고 나면 마치 스스로 충분히 이해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막상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설명하거나 새로운 상황에 적용하려고 하면 쉽게 막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는 사고의 과정이 생략된 채 결과만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빠르게 얻은 이해는 종종 얕고, 쉽게 무너진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교육” 임상 현장에서는 결과만이 아니라,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 역시 중요하다. 특히 한의학에서는 더욱 그렇다. 같은 증상을 보이는 환자라도 그 사람의 상태와 맥락에 따라 접근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때 요구되는 것은 빠른 정답이 아니라, 상황을 해석하고 의미를 구성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실제 임상에서는 정답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여러 가능성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어떤 판단이 환자에게 더 적절한지 고민해야 하는 순간들이 반복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견디며 판단을 유보할 수 있는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은 빠르게 답을 찾는 훈련이 아니라, 망설여본 경험 속에서 길러진다. 쉽게 답을 내리지 않고, 여러 가능성을 열어둔 채 머무르는 망설임의 시간,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판단을 만들어가는 과정. 그 안에는 단순한 지식의 암기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진심이 담긴 깊은 이해가 만들어진다. AI 시대의 학생들에게 AI를 얼마나 잘 활용할 것인가를 교육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AI 시대에도 여전히 인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교육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은 더 빠르게 답을 찾는 방법이 아니라, 그 답에 자신의 생각과 진심을 담을 수 있는 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학생들이 제출한 중간고사 답안을 채점해야 하는 일은 생각보다 부담스럽고 꽤 많은 시간이 걸리는 귀찮은 일이다. 하지만 채점이 더 힘들고 귀찮아 진다할지라도 서술형의 문항으로 학생들의 생각과 이해 정도를 점검해 보고 싶다. 그래야 AI에 의존하지 않고 정말 보조 도구로 잘 활용하는, 실력 있는 의료인이 배출되지 않을까. -
“전 세계 보건 협력의 새 지평을 열다”[한의신문] 세계보건기구(WHO)는 7일부터 9일까지 프랑스 리옹 마트무트 스타디움에서 ‘제1회 WHO 협력센터 글로벌 포럼(1st Global Forum of WHO Collaborating Centres)’을 개최했다. 이번 포럼은 ‘더 건강한 미래를 위한 협업(Collaborating for a Healthier Future)’이라는 슬로건 아래 전 세계 보건 전문가들이 모여 전략적 파트너십을 논의하는 자리가 되었다. 글로벌 보건 파트너십의 중추, WHO 협력센터 WHO 협력센터(WHO CC)는 각국 정부가 지정한 대학이나 연구기관으로, WHO의 기술적 과업을 수행하는 핵심 파트너다. 이번 포럼은 단순한 정보 공유를 넘어 정보와 아이디어, 자원을 하나로 모으는 전략적 플랫폼 역할을 수행했다. WHO는 2025년 12월 기준 전 세계 80개국에 분포된 약 800개의 협력센터 역량을 결집해 기후 변화와 만성 질환 등 복합적인 글로벌 보건 위기를 타개한다는 방침이다. 서태평양의 성공 모델, 세계로 뻗어나가다 이번 글로벌 포럼은 신영수 전 WHO 서태평양지역 총장의 제안으로 2014년 시작된 ‘서태평양지역 협력센터 포럼’의 성공적인 모델을 글로벌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014년 마닐라에서의 제1회 포럼부터 2025년 제5회 포럼까지 이어온 지역적 성과가 이번 제1회 글로벌 포럼의 밑거름이 되었다. WHO 아카데미 방문 및 교육 협력 방안 토의 포럼 본 행사에 앞서 7일 오전에는 행사장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한 WHO 아카데미(WHO Academy)를 공식 방문했다. 2024년 12월 설립된 WHO 아카데미는 최첨단 시뮬레이션 시설과 하이브리드 학습 시스템을 갖춘 혁신적 교육 기관이다. 참가자들은 시설 탐방과 함께 보건 인력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한 양질의 교육 콘텐츠 개발 및 협업 방안에 대해 심도 있게 토의했다. 지역별 보건 현안 해결 위한 협업방안 등 논의 △ 고위급 개막 세션(7일): WHO 사무총장,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 등 정상급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원 헬스 서밋(One Health Summit)’과 연계된 개막식이 병렬로 거행됐다. △ 전략적 로드맵 토의(8∼9일): WHO의 전략적 로드맵인 제14차 일반작업프로그램(GPW14) 목표 달성을 위한 협력센터의 역할을 구체화하고, 미래 과학을 위한 ‘포사이트(Foresight) 세션’을 통해 보건 정책의 지향점을 점검했다. △ 지역별 네트워킹(9일): 오후에는 각 지역별 그룹 토의 및 네트워킹 회의를 통해 지역별 보건 현안 해결을 위한 협업과 실천 방안을 논의했다. 내년엔 스위스 WHO 본부에서 개최 예정 WHO는 이번 제1회 글로벌 포럼의 성과를 바탕으로 협력을 한층 강화할 예정이다. 내년에는 스위스 제네바 WHO 본부에서 ‘제2회 글로벌 포럼’을 개최해 전 세계 보건 안보와 보편적 건강보장(UHC)을 위한 지속적인 논의를 이어갈 계획이다. -
“서글픔이란 예우(부제: 사랑에 대하여)”[편집자 주] 부산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 서은해 학생의 ‘서글픔이란 예우(부제: 사랑에 대하여)’는 제5회 동제신춘문예 수필 부문 우수작으로, 가족과의 일상 속에서 마주한 사랑과 상실의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특히 할머니와의 동거 경험을 통해 느낀 책임과 애정, 그리고 이별을 예감하는 순간의 내면을 진솔하게 풀어내며, 사랑이 지닌 유한성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서글픔의 의미를 성찰적으로 담아냈다. 서글픔이란 예우 (부제: 사랑에 대하여) 잠시 떨어져 지내면 편할 줄 알았는데, 당신이 남기고 간 그 흔적들은 도리어 내게 수없이 깊은 서글픔을 안겨주었고, 시간의 유한함 속 무한한 사랑을 깨닫게 해주었다. 할머니를 우리 집에 모신 지 두어 달. 할머니는 또 한 차례의 수술을 받으시러 2주간 병원에 입원하셨다. 아 드디어! 드디어 잠시 나도 쉴 수 있겠구나. 바쁜 엄마를 도와 할머니의 끼니를 챙기고 일상을 살피던 두 달. 누군가의 삶을 지탱해야 한다는 책임감은 내 생활의 반경을 좁은 안방 문턱 안으로 제한해 버리곤 했다. 학업을 병행하며 스스로를 챙기기에도 허덕이던 찰나, 잠시나마 오롯이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온전히 쉴 수 있는 시간이 잠시 주어졌다고 생각하여 도리어 마음이 편했다. 나는 할머니를 그토록 사랑하지만 왜 동시에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책임감처럼 느껴졌을까. 사랑은 때로 비겁한 무게추가 된다. 할머니를 향한 지극한 애정의 뒷면에는, 나 하나 건사하기 버거운 일상의 피로가 ‘책임감’이라는 무거운 이름을 달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안방을 정리하며 어느새 우리 집 곳곳에 스며든 할머니의 흔적들에 가만히 눈길이 갔다. 할머니의 의자 위에 마치 할머니를 닮은 것처럼 가지런하게 정리된 조그만 화투패. 화투패들은 화려한 꽃 그림을 모두 숨긴 채, 아무런 무늬 없는 매끄러운 뒷면만을 보이며 얌전하게 포개어져 있었다. 커다란 의자 한구석,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듯 아슬아슬하게 놓인 그 작은 플라스틱 통. 그 정갈하고도 위태로운 모양새가 꼭 우리 할머니를 닮아 있어서, 나는 목울대가 뜨거워지는 와중에도 기어코 서글픈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노인정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치던 화투패를, 할머니는 우리 집 안방에서 홀로 펼쳐 들고 계셨다. 같이 칠 사람 하나 없는 방에서 수줍게 '갑오떼기'를 하며 오늘의 운세를 점치던 당신의 둥글고 작은 뒷모습이 그 화투패 하나로 내 앞에 그려졌다. 할머니는 텅 빈 방에서 홀로 무엇을 치우고 계셨던 걸까. 무늬 없는 시간을 한 장 한 장 겹쳐 올리며, 당신은 어떤 이별들을 미리 연습하고 계셨던 걸까. 그 작고 귀여운 질서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사랑이라는 것이 때로는 누군가 떠난 자리에 남겨진 이토록 고요한 흔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방 문을 열면 희미하게 풍기던 알싸한 생강 내음의 정체도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원체 사탕을 먹는 사람이 없어, 사탕이라곤 구경도 할 수 없던 우리 집에, 할머니는 당신의 간식거리라며 투박한 생강 사탕 한 봉지를 챙겨오셨더랬다. 한 알 한 알 포장된 그 딱딱하고 노란 알맹이들을 드시기 편하게 길쭉한 사각 용기에 옮겨 담아 드렸을 때,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시던 그 할머니의 부드러운 표정이 떠올라 코끝이 맹맹해졌다. 언제 하나씩 꺼내어 적막을 달래셨는지, 이제는 바닥을 드러내며 굴러다니는 몇 알 남지 않은 사탕들이 그 방의 빈자리를 더 크게 증명하고 있었다. 그 작은 통이 비어가는 속도가 곧 할머니와 내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의 속도인 것만 같아, 나는 차마 그 뚜껑을 닫지 못하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불현듯 떠올랐다. 우리의 시간은 영원하지 않구나. 할머니가 남긴 그 무늬 없는 시간을 더듬다 보니, 문득 내 생의 가장 유한하고도 찬란했던 또 다른 풍경이 겹쳐 보였다. 그것은 이른 아침, 방 안까지 차오르던 하얀 눈의 기척이었다. 어릴 적, 이른 아침 하얀 눈이 내릴 때면 어쩌면 우리 부모님은 눈을 보며 우리가 느낄 설렘보다도 자식들에게 그 소식을 알려줄 수 있다는 더 큰 설렘을 가지고 우리를 깨우곤 하셨다. 평소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시간인데, ‘얘들아, 밖에 눈 와’라는 그 따뜻한 속삭임 한마디는 그 어떤 모닝콜보다도 확실했다. 두 눈 번쩍 뜨고 곧장 일어나 거실로 향해 하룻밤 사이 거짓말처럼 완전히 새로운 새하얀 세상이 펼쳐진 바깥을 보며 우리는 두근대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는데, 어쩌면 밤새 눈이 내릴지도 모르겠다는 그 작은 설렘이, 밤하늘에 내린 작은 눈송이 하나로 더 큰 설렘이 되어 아침에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그 부모님의 마음은 얼마나 순수한 사랑으로 가득했을까. 우리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그 사랑 어린 눈동자의 깊이는 가늠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던 그 시간도, 돌이켜 생각하면 벌써, 사무치게 그리워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가 되었다. 지금 이 순간도, 사랑하는 나의 부모님, 나의 형제, 그리고 이젠 한 분의 조부모님인 외할머니가 살아계신 이 순간도 수없이 과거가 되고 있구나. 이 모든 흔적마저도 언젠가는 먼지처럼 흩어질 것이다. 화투패를 쥐던 할머니의 손도, 눈 소식을 전하던 부모님의 목소리도, 결국은 시간 앞에서 모두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진실이 그제야 무섭도록 실감 났다. 그 순간 나는 마치 아무것도 없이, 세차게 지나가는 길 위에 그저 가만히 서서, 하염없이 쌩쌩 불며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시간이라는 바람을 맞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바람에 저항할 여력도 틈도 없이, 그저 손가락 사이사이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바람처럼 지나가는 찰나의 시간을 속절없이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서 있는 오늘이라는 시간도 먼 훗날 사무치게 그리워할,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이 되겠구나.’ 때가 되면 언젠간 모두가 떠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생경하게도 너무 두렵게 다가왔다. 언젠가는 내 세계를 지탱하던 기둥들이 사라지고 나 혼자 남겨질 것 같다는 막막함. 하지만 나를 더 주저앉게 만든 것은 이 굴레가 나에게서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었다. 언젠가 나 또한 누군가의 과거가 될 것이고, 나의 아이들 역시 내가 지금 할머니를 보며 느끼는 이 유한함을 제 삶의 무게로 짊어지게 될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이 이 가혹한 배움—사랑하기에 반드시 슬퍼해야 한다는 그 얄궂은 규칙—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안쓰러웠다. 찬란한 사랑을 가르치는 일은 곧, 그 뒤에 숨은 필연적인 상실을 가르치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이 무거운 유산을 물려주어야만 하는 생의 질서 앞에서, 나는 사랑이 지닌 숭고함보다 그 뒤에 가려진 서글픈 숙명을 마주했다. 나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뺨을 때리는 시간의 바람을 멈출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바람 속에 가만히 서서 맞기만 하는 것과, 그 바람을 타고 나아가는 것은 다르다. 내게 남은 시간을 계산하며 두려워하기보다, 내 손끝에 닿는 할머니의 온기, 부모님의 목소리를 더 선명하게 감각하기로 했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시간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라 생각했다. 사랑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유한함을 끌어안을 용기가, 그리고 유한함이 주는 그 찬란한 슬픔을 품고서 언젠간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오늘 더 열렬히 사랑하겠노라 결심할 용기가. 결국, 서글픔이란 유한한 사랑에 대해 내가 바칠 수 있는 가장 정중한 예우이다. 그러니, 이 서글픔이라는 것은, ‘당신은 내게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였습니다’라는 수줍고도 솔직한 메시지를 온몸으로 하는 경건한 의식과 같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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