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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약 세계화와 글로벌 통합의학오현민 국제/기획이사 (대한한의사협회) Ⅰ. 한의약 국제 교류, 이제는 ‘실행을 전제로’ 논의할 단계 한의약의 세계화는 오랜 시간 한의계 내부에서 반복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해외 의료봉사, 학술 교류, 단기 연수 프로그램 등 다양한 시도가 이어졌지만, 그 이후 무엇이 남았는지에 대한 질문은 늘 따라왔다. 교류가 교류로 끝나지 않고, 제도·교육·현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이번 우즈베키스탄 방문은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추진되었다. 이번 일정은 단순한 가능성 탐색이나 관계 확인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제도 정비와 프로그램 실행을 전제로 한 논의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특히 “지금 당장 가능한 것부터 진행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되며, 실행 단계로의 전환이 분명히 논의되었다. 필자는 대한한의사협회 국제/기획 이사로서 협회장과 함께 이번 일정에 참여했으며, 이번 방문은 우즈벡 보건부와 대한한의사협회의 공식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개인의 활동이 아닌, 협회를 중심으로 한의약 전반의 국제 교류 기반을 점검하고 실행 구조를 논의한 자리였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Ⅱ. 협회를 중심으로 한 ‘대표성 있는 실행 구조’ 이번 우즈베키스탄 방문의 또 하나의 특징은, 한의약 분야의 다양한 현장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해 협의가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한 동행이 아니라, 현실적인 실천을 전제로 한 역할 분담 구조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교육 분야 전문가로는 대전대학교 한의과대학 류호룡 학장이 참여하여 교육 체계와 학문적 기준의 관점에서 국제 교류와 협력 방안에 대한 논의를 자문하였다. 임상 분야에서는 한국바이오헬스학회 양유찬 회장이 동행하여 실제적인 일상 진료 현장에서 경험한 한의의료기관의 개업부터 경영까지의 모든 과정에 대한 부분을 임상의로서의 관점을 바탕으로 현실적으로 조언하고 점검하였다. 한의약산업 분야로는 한의약산업발전협의회 총회 최형일 의장이 참여해서 전통의학 및 현대 첨단 기술 기반의 보건·복지·바이오·제약 산업의 관점에서 우즈벡 산업 환경과 제도적 여건을 한국의 현황과 비교 분석하고 향후 한의약 세계화를 위한 기반 조성에 대한 논의를 함께 진행했다. 필자는 대한한의사협회 국제/기획 이사로서, 협회를 중심으로 교육·임상·산업 각 영역의 논의가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조율하는 역할을 맡아 이번 일정을 함께 했다. 이는 개인의 성과를 부각하기 위한 구성이 아니라, 협회가 주축이 되어 각 직역 간의 필수적인 실행 구조를 책임성 있게 만들어 가기 위한 과정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다. Ⅲ. 우즈베키스탄 전통의학, 역사적 기반과 제도화의 흐름 1. 중앙아시아 전통의학의 출발지 우즈베키스탄의 전통의학은 중앙아시아 지역의 민간 치료 경험과 함께, 중세 이슬람 의학 전통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어 왔다. 이 지역은 그리스·로마 자연철학이 이슬람 문명권으로 흡수·재해석되는 과정의 중요한 무대였으며, 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의학적 사유 역시 발전해 왔다. 특히 중세 이슬람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의사이자 철학자인 이븐 시나(Avicenna)는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인 부하라 인근에서 태어나 활동했으며, 그의 의학적 사유는 이후 오랜 기간 중앙아시아 전통의학 및 유럽의 서양의학 형성 과정에서 이론적인 구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권 의약에 이븐 시나가 위대하게 언급되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철학적 업적과 맥락 때문이다. 다만 현대적 의미에서 우즈베키스탄 전통의학을 하나의 고정된 체계로 단정하기보다는, 여러 역사적 요소와 다양한 문명의 의학적 경험이 교류하고 융합되어 형성된 독특한 전통의학 문화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고 하겠다. 2. 한의약 기반의 전통의학센터와 국가 보건의료 관리 체계 이번 방문에서 확인한 중요한 변화는,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전통의학을 국가 차원의 관리와 제도 안으로 편입시키려는 방향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보건부 산하 전통의학센터는 이러한 정책 방향의 핵심 기관으로, 전통의학 교육과 활동을 일정한 기준 아래 관리하기 위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교육 이수 시간, 수료 체계, 활동 범위 등에 대한 논의는 이미 실행 단계에 들어가 있으며, 완성된 제도라기보다는 실행과 보완을 병행하여 발전시키는 구조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 한의약 분야와의 협력이 단순한 선언에만 그치지 않고, 향후 실제적인 보건 제도의 정비를 위한 핵심적 가치로서의 논의로 이어질 수 있다는 현실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 Ⅳ. ‘배우고 싶다’에서 ‘함께 정비하자’로 전통의학센터 및 현지 관계자들과의 미팅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 점은, 한국의 전통의학을 단순히 참고 사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배우고, 제도적으로 정비해 나가기 위한 보건의료체계 모델이라는 인식이었다. 이는 특정 치료 기술에 대한 관심을 넘어, 상호적인 교육·연수·제도 전반을 함께 논의하자는 적극적인 태도로 나타났다. 이러한 인식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오랜 기간 이어져 온 한국 한의사들의 의료봉사와 교류를 통해 축적된 신뢰 위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번 논의에서는 장기 과제와 별도로, 현행 제도 범위 내에서 지금 당장, 오늘부터 바로 실행가능한 내용들을 확인해서 실천해 나가자는 데 의견이 모였다. 우즈베키스탄 측은 실행 가능한 사안에 대해서는 속도감 있게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하며, 한국의 실무 추진 방식에 대한 이해를 표현했다. -
“현장에서 확인된 재택의료 수요, 한의 방문진료의 가치”홍석민 원장 (중랑구한의사회 이사/친절한홍한의원 대표원장) 기록이 말해주는 현장의 목소리: 환자가 기다리는 한의 주치의 초고령 사회의 파고 속에서 ‘방문진료’는 이제 우리 사회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보건의료의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최근 집계된 ‘2025년 중랑구 의료취약환자 방문진료 주치의제 활성화 지원사업’의 실적 현황은 우리에게 유의미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지난 한 해 중랑구에서 수행된 전체 방문진료 중 한의사들이 담당한 비중은 상당히 높게 나타났다. 주목해야 할 점은 단순한 건수가 아니라, 거동이 불편한 환자와 그 가족들이 한의 방문진료를 꾸준히 선택하고 의지하고 있다는 실질적인 ‘수요’의 흐름이다. 진료실 밖 현장에서 만난 환자들은 한의 치료의 효과뿐만 아니라, 환자의 전반적인 생활을 살피는 한의사 특유의 통합적 접근에 깊은 신뢰를 보내주었다. 이러한 기록은 우리 곁에 한의사 주치의가 꼭 필요하다는 현장의 절실한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환자가 원해도 높기만 한 ‘재택의료센터’의 문턱 이처럼 현장에서의 높은 선호도와 필요성이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보건복지부의 ‘장기요양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에서 중랑구를 비롯한 서울 대다수 지역에서 한의계가 비 선정된 현실은 진한 아쉬움을 남긴다. 정부는 재정 지출의 효율성을 중시하겠으나, 진정으로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장기적인 요양 비용을 절감하는 길은 환자가 체감하는 의료 서비스를 적기에 제공하는 것이다. 현장에서 확인된 환자들의 선택권을 존중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통합 돌봄이다. 보건복지부는 양의계 중심 행정에서 벗어나, 실제 현장에서 환자들이 누구를 필요로 하며 어떤 치료에 만족하고 있는지 그 실무적 수요를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할 시점이다. 결론: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공정한 정책 설계를 기대하며 한의사는 지역사회 돌봄의 핵심적인 한 축을 담당하고 있으며 환자 한명 한명을 통합적으로 돌볼줄 아는, 앞으로 이루어질 돌봄통합 사업에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최고의 의료인력 자원이다. 보건복지부는 한의계가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국민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도록 선정 및 제도 개편을 전면 재고해야 한다. 공급자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환자 중심, 현장 중심의 공정한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재택의료 시스템을 구축하는 진정한 해법이 될 것이다. 맺음말 : 한의 방문진료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한의재택의료 학회와 협회 등 수많은 원장님들께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묵묵히 환자들을 돌보며 한의사의 가치를 몸소 증명해 주고 계신다. 우리 한의계가 재택의료의 중심에서 더 확고히 자리 잡는 과정에, 현재의 헌신과 더불어 앞으로 이런 방향들이 조금씩 더해질 수 있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선, 우리가 현장에서 이미 수행하고 있는 포괄적인 진료를 차팅과 통계에 온전히 담아내는 일이다. 우리 한의사들은 현장에서 근골격계 통증뿐만 아니라 불면, 소화기 장애, 정신 건강, 내과 및 부인과 질환 등 환자의 전신을 세심하게 돌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적극적인 상병 입력과 차팅으로 남지 않아 국가 통계에서 과소평가되는 현실이 늘 아쉽다. 우리가 행하는 다각도의 케어를 꼼꼼히 기록하여 한의약의 실제적인 기여도를 수치로 증명해 나갔으면 한다. 나아가, 혈액검사와 포터블 초음파 등 현대적 진단기기를 통한 보여주는 신뢰 강화에 힘을 싣는다면 방문진료 현장에서 더욱 탄탄한 데이터를 쌓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AI 기술의 도입으로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고, 정부가 지향하는 다약제 관리 및 타 직역과의 유기적인 연계에 앞장선다면, 한의계는 방문진료 분야에서 명실상부한 우위를 확고히 하며 통합 돌봄의 더 큰 주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교실 밖에서 만난 방제학, 1박2일간의 치열했던 처방 로드맵[한의신문] 17, 18일 이틀간 대한동의방약학회(회장 이원행)가 주관한 ‘동계 학생특강’이 개최됐다. 본과 2학년을 마치고 방제학 이론을 1년간 수강한 시점에서 맞이한 이번 강의는, 교실 안의 지식을 복습함과 동시에 임상의 언어로 재구성하는 소중한 기회였다. 석고제부터 대황·어혈제까지, 6명의 임상가들이 각자의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약물군별 처방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주셨고, 그 안에서 방제학이 실제 진료 현장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한의대생들의 뜨거운 열기 속에, 방학의 나태함은 사라지고 어느덧 배움의 열정만이 현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복습과 재구성: 석고·부자·감수제 강의 특강의 서막을 연 석고제 강의는 나에게 ‘시동 걸기’와 같았다. 원광대학교에서 운 좋게 이원행·김휘열 교수님께 방제학을 배우며 다져온 기초를 복습할 수 있어 반가움이 컸다. 하지만 강의는 단순한 복습에 그치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진조조 교재의 체계에 따라 작약감초탕을 간담삼초 계통 안에서 배웠으나, 이번 강의에서는 감수제 범주 내에서 감수반하탕과 함께 다루는 식의 새로운 목차 구성을 접할 수 있었다. 같은 처방이라도 분류 체계에 따라 그 의미가 얼마나 입체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깨달으며, 방제학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사고의 체계임을 실감했다. 강렬한 이미지화: 황련·치자제 강의 “황련증 환자의 눈빛과 성격을 아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있는 이번 강의는 처방을 ‘사람’으로 치환하는 과정이었다. 우울과 분노 사이에서 황련과 치자를 어떻게 짝지을지, 환자의 눈빛과 설진, 성격까지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강의를 들으며 머릿속에는 환자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특히 현대 임상에서 심리·정신적 영역의 황련증 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통찰은, 방제학이 과거의 텍스트가 아니라 지금 진료실에서 마주하는 현실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광활한 내용의 내비게이션: 복령·시호제 강의 복령·시호제 강의는 방대한 지식을 한 줄기로 꿰어내는 시간이었다. 복령제가 적합한 환자군(HSP, 민감한 사람)의 큰 그림을 그린 뒤, 오령산을 중심으로 각 본초의 약리와 작용을 세밀하게 짚어주신 점이 좋았다. 특히 시호의 약리부터 외증, 체질, 약대, 그리고 처방으로 이어지는 일목요연한 구성은 학교에서 배운 방대한 양을 단시간에 효율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항염증과 항스트레스를 아우르는 시호제의 광활한 초원을 탐험하고 싶은 학생이라면 학회만의 이 독특한 해석을 꼭 접해보길 권하고 싶다. 집중력을 높이는 입체적 설명: 계지제 강의 둘째 날의 포문을 연 계지제 강의는 ‘입체적’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렸다. 강약 조절이 확실한 강의 스타일과 PPT 너머의 상세한 부연 설명 덕분에 집중도가 최고조에 달했다. 특히 상한론 64조문의 ‘기인차수자모심(其人叉手自冒心)’을 “가슴 밑에 베개를 대고 주무세요?” 혹은 “엎드려 주무세요?”라는 실제 문진 질문으로 치환해 설명해주신 대목에서 시야가 트였다. 학생 눈높이에 맞춘 팁들은 상한론의 높은 장벽을 허물어 주었고, 마치 선배가 곁에서 귀띔해주는 듯한 친근함을 느꼈다. 질환 간의 연결고리: 마황제 강의 마황제 강의는 단순히 ‘발한’이라는 키워드에 머물러 있던 나의 시야를 임상의 현장으로 확장해주었다. 슬관절통 환자가 내원했을 때 무엇을 먼저 확인해야 하는지 등 실전적인 질문들이 쏟아졌다.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체중과 슬관절통의 상관관계였다. 막연히 다이어트나 부종 치료제로만 생각했던 마황제가, 순환 부전으로 체중이 늘고 그 하중으로 무릎에 부담이 가는 환자를 치료하는 핵심 처방으로 연결되는 순간, 방제학이 단편적 증상 대응이 아닌 환자 전체를 보는 시스템임을 깨달았다. 마지막에 전수해주신 다이어트 처방의 Flow 정리본은 즉시 임상에 적용해도 손색없을 만큼 실용적이었다. 명확한 임상 적용: 대황·어혈제 강의 마지막 대황·어혈제 강의는 여성 질환과 생리통을 중심으로 명확한 감별 포인트를 제시했다. 대황의 포함 여부를 기준으로 환자의 상황을 구분하는 방식은, 임상 현장에서 마주할 수 있는 구체적인 선택지들을 머릿 속에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본초의 세밀한 정리부터 어혈제 사용의 실전 팁까지 아우르며 1박 2일의 대장정을 멋지게 마무리해주었다. 극대화된 밀도, 치열했던 1박 2일의 자극 방학의 휴식 속에 머물던 나에게 이번 특강은 거대한 지적 자극이었다. 이틀간 6개 테마를 압축적으로 소화하며 가장 크게 느낀 점은, 방제학은 결코 시험을 위한 암기 과목이 아니라 살아있는 ‘임상의 언어’라는 점이다. 6명의 원장님이 풀어낸 방식은 제각기 달랐지만, 그 중심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하나였다. 처방의 구성을 아는 것을 넘어 ‘어떤 환자에게,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꿰뚫어 보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특강에서 배운 임상의 디테일과 사고의 흐름은 앞으로 본과 3, 4학년의 실습과 훗날 한의사로서 마주할 수많은 환자 앞에서 소중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밀도 높은 배움을 선사해준 학회와 원장님들에게 감사를 전하며, 이 귀중한 경험을 끝없는 복습을 통해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 것을 다짐해본다. -
‘화양연화’, 우리는 그들과 달랐을까최순화 원장 (대구시 남구 보광한의원) 1. 봉인된 도시, 방콕의 골목에서 길을 잃다 영화 <화양연화>의 오프닝은 신경질적인 소란으로 가득하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는 인부들과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이삿짐들. 1962년 홍콩, 상하이에서 이주해 온 이방인들이 부딪히는 그 비좁은 복도는 사생활이 소멸된 ‘밀밀(密密)한 감시의 사회’를 상징한다. 왕가위 감독은 60년대 홍콩의 원형을 찾기 위해 태국 방콕의 차로엔 크룽 골목을 배회했지만, 그가 실제로 렌즈에 담고 싶었던 것은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질식할 것 같은 압박감’이었다. 수리진(장만옥)의 목을 단단히 옥죄는 높은 옷깃의 치파오는 그녀의 정조를 지키는 심리적 갑옷인 동시에, 밖으로 새어 나가려는 홍콩의 자유를 결박하는 정치적 결계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그녀의 20여 벌의 치파오는 억압된 리비도(Libido)의 전치이자,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라고 되뇌는 초자아(Superego)의 처절한 비명이다. 이 억압은 1962년의 홍콩이 본토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서 느꼈던 정체성의 위기와 완벽한 평행이론을 이룬다. 2. 맥락 없는 역사, 멜로의 가면을 벗기다 영화 중반, 두 주인공의 감정선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삽입된 드골 장군의 캄보디아 입국과 환영 인파의 뉴스 화면은 이 영화가 지독하게 정치적인 미장센임을 폭로하는 균열의 지점이다. 1966년, 중국 본토의 문화대혁명 광풍이 홍콩의 좌파 폭동으로 이어지기 직전의 그 소란은, 개인의 사랑 따위는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짓눌려도 무방하다는 세계의 냉소적인 선언이다. 이 장면은 결코 맥락 없는 삽입이 아니다. 차우(양조위)와 수리진이 서로에게 끝내 다가가지 못하는 ‘용기의 부재’는 단순한 우유부단함이 아니라, 거대한 시대적 흐름 앞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직감한 자들의 집단적 무기력이다. <아비정전>의 아비가 ‘발 없는 새’로 떠돌다 비극적으로 추락했듯, 차우는 행동하는 대신 기록(무협 소설)하는 쪽을 택한다. 이는 검열의 눈을 피해 정치적 탄식을 사랑의 언어로 번역해야만 했던 예술가로서의 고육지책이자, 돌이킬 수 없는 홍콩의 운명에 대한 은유다. 3. 2001년의 파격: 붕괴된 신화와 잔인한 가정법 그러나 2025년 특별판에서 감독은 본편의 고결한 침묵을 깨뜨리는 파격적인 장면들을 배치한다. 지적인 신문사 기자였던 차우는 생계를 꾸리는 슈퍼마켓 주인으로 전락해 있고, 목 끝까지 단추를 채웠던 수리진은 머리칼이 흐트러진 채 목선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1962년에는 절대 허용되지 않았던 두 사람의 2001년의 키스 장면은 관객에게 형용할 수 없는 당혹감과 슬픔을 동시에 안긴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라는 수리진의 명분은 여기서 무너진다. 이는 감독이 던지는 잔인한 ‘가정법’이다. 2001년의 자유로운 문법으로 그들을 재배치함으로써, 1962년의 그들이 보여준 절제가 얼마나 처절한 ‘자기 처벌’이었는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이제 그들은 목을 풀어헤치고 자유롭게 키스할 수 있는 시대에 도달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시절의 숭고했던 ‘화양연화’는 영영 잃어버렸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신화가 현실로 내려앉는 순간, 홍콩의 우아했던 슬픔은 세속적인 회한으로 바뀐다. 4. 앙코르와트, 역사의 무덤에 묻은 “잘 가, 나의 홍콩”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앙코르와트 제2회랑. 수천 년의 시간을 견딘 석조 벽면에 차우가 비밀을 속삭이는 장면은 이 영화가 바치는 가장 숭고한 장례식이다. 그가 구멍에 대고 말한 것은 연인에 대한 뒤늦은 고백이 아니다. 그것은 “잘 가, 나의 홍콩”이라는 비통한 작별 인사다. 감독은 정치적 서사를 멜로라는 탐미적인 외피 속에 숨겼다. 검열당하지 않기 위해 사랑을 빌려왔지만, 그 속에는 1966년의 혼란과 1997년의 불안, 그리고 2046년의 종말이 켜켜이 쌓여 있다. 앙코르와트의 진흙으로 봉인된 구멍은 언젠가 역사가 그 비밀을 파헤쳐 줄 것을 기다리는 고고학적 유적이다. 결론: 부초 같은 무기력이 남긴 마지막 품격 결국 왕가위의 주인공들은 부초처럼 떠돌다 스러진다. 그들에게 행동할 용기가 부재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그만큼 홍콩의 가치를 훼손하고 싶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손대면 부서질 것 같은 그 시절의 공기, 그 시절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그들은 차라리 무기력한 관찰자(동자승)가 되기를 자처했다. <화양연화>는 한 남녀의 불륜담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사랑했던 공간과 시간이 어떻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지를 기록한 가장 탐미적인 보고서다. 2001년의 우리는 특별판의 키스신을 지금(2025~ 2026)보며 잠시나마 위안을 얻지만, 이내 앙코르와트의 구멍 앞에 선 차우의 뒷모습을 보며 비로소 깨닫는다. 우리의 화양연화는 이미 돌벽 속에 영원히 박제되었으며,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찬란했던 무기력을 애도하는 것뿐임을. -2000년 홍콩의 밀레니엄을 함께 했던 왕학감 원장을 기억하며- -
“스키 슬로프는 또 하나의 교실입니다”[한의신문] 겨울 스포츠 현장에서 한의학도의 새로운 도전이 주목받고 있다. 대전대 한의과대학 재학생 서윤석 학생(본과 2년)은 2024년 스키강사(초급 지도자) 자격증 취득에 이어 2025년 9월 스키심판 자격증을 취득하고, 올 1월 25일에 열린 유소년 스키대회에서 공식 심판으로 활동했다. 학업과 전문 스포츠 자격을 병행하며 스포츠 한의학이라는 진로를 현장에서 구체화하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스키강사 자격증에 이어 스키심판 자격증까지 취득하게 된 계기는? 스키는 오래전부터 즐겨온 스포츠였지만, 한의대에 진학한 이후에는 단순한 취미를 넘어 ‘몸을 이해하는 대상’으로 바라보게 됐습니다. 특히 대전대학교 한의대 스키동아리인 TOMS(Teajeon Oriental Medicine Skiteam)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스포츠 손상과 회복에 관심이 커지면서 현장을 더 깊이 이해해야겠다고 느꼈습니다. 스키강사는 수강생의 기술을 지도하는 역할이라면 스키심판은 경기 전체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선수들의 안전까지 책임지는 자리라고 생각해 도전하게 됐습니다. Q. 이번 대회에서 맡은 역할은? 알파인 스키 경기에서 스키 심판에는 출발 심판(Start Referee), 기문 심판(Gate Judge) 골인 지점 심판(Finish Referee) 등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이 대회에서 제가 맡은 역할은 기문 심판으로 배정된 기문 구역에서 선수가 기문을 정확히 통과했는지 판단하는 것이었습니다. Q. 실제 유소년 스키대회에서 심판으로 활동한 경험은 어땠는지? 생각보다 훨씬 책임감이 큰 경험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온 힘을 다해 경기에 임하는 모습을 보며, 심판의 작은 실수 하나가 경기 결과뿐 아니라 선수의 심리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실감했습니다. 동시에 경기 중 발생할 수 있는 부상 상황에 늘 주의를 기울이게 됐는데, 한의학에서 배우는 근골격계와 움직임에 대한 이해가 현장에서 큰 도움이 됐습니다. Q. 스키 현장에서 한의대생으로서 특별히 느낀 점이 있다면? 스키 슬로프는 마치 ‘살아 있는 해부학 교실’처럼 느껴졌습니다. 선수들의 자세, 체중 이동, 근육 사용 패턴을 관찰하다 보면 해부학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균형과 조화, 기혈의 흐름 같은 개념도 추상적으로 느껴지기보다 실제 움직임 속에서 이해하게 됐습니다. Q. 이러한 경험이 스포츠 한의학과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스키는 무릎·허리·발목에 부담이 큰 종목입니다. 반복 훈련으로 누적되는 피로와 미세 손상이 경기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심판 활동을 하며 침 치료, 추나요법, 한약 등 근골격계 중심의 한의학적 접근이 충분히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단순히 통증을 없애는 치료가 아니라, 회복과 예방, 컨디션 관리까지 포괄하는 것이 스포츠 한의학의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Q. 성장기 선수들을 보며 느낀 점도 있었을 것 같다. 유소년 선수들의 경우 작은 부상도 방치되면 성장 과정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경기 중 잠깐의 통증으로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며, 조기 관리와 회복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스포츠 현장에서 한의학이 더 적극적으로 활용된다면 선수들의 부상 예방과 장기적인 건강관리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Q. 대전대학교 한의과대학에서의 배움은 어떤 의미인가? 학교에서는 늘 진료 기술뿐 아니라 ‘사람을 이해하는 의사’가 되는 것을 강조합니다. 강의실에서의 공부와 스포츠 현장에서의 경험이 서로 연결되면서 제가 어떤 한의사가 되고 싶은지 점점 분명해졌습니다. 이론과 현장이 함께 할 때 진짜 공부가 된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Q. 졸업 후 진로 계획이 궁금하다. 졸업 후에는 선수와 생활체육인을 대상으로 한 스포츠 한의 진료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경기 후 회복 관리, 부상 예방, 재활까지 책임질 수 있는 현장형 한의사가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장기적으로는 국내외 스키 선수단을 대상으로 한 의료 봉사에도 참여해 스포츠를 통해 얻은 경험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습니다. Q.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은? 스키심판을 하면서 배운 집중력과 책임감은 앞으로 환자를 대할 때도 큰 자산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스포츠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한의학과 연결해 더 많은 사람들이 몸과 삶의 균형을 회복하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스키 슬로프 위에서 공정한 판정을 내리던 한의학도의 시선은 이제 진료실을 향하고 있다. 스포츠와 한의학을 잇는 그의 도전은 스포츠 한의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사례로 평가된다. -
“치매 치료하면 한의를 떠올리는 기류 만들고파”<편집자주>거제시가 오는 3월부터 ‘한의치매예방관리사업’ 시행한다. 이 사업이 윤곽을 갖추기까지 거제시한의사회(회장 조은태)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 특히 기초 지방자치단체가 추진 중인 사업이어서 성공 여부에 따라 지역 한의계가 향후 각종 정책 사업을 추진하는데 모범 사례가 될 전망이다. 사업 추진을 위해 발 벗고 나선 거제분회 조은태 회장으로부터 그간의 과정과 비전을 들어봤다. Q. 한의 치매진료를 추진해야겠다는 결심이 선 계기는? 지난 2024년 제정된 ‘거제시 치매관리 및 지원에 관한 조례’에는 경도인지장애 관리를 위해 의료서비스를 지원할 수 있도록 했고, 지난해 7월 제정된 ‘경상남도의 한의약 육성 조례’에는 한의약 활성화를 위한 여러 사업을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용기를 얻었고, 특히 거제지역 한의계의 발전과 한의약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긍정적인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또 부산시한의사회가 지난 10년간 축적한 좋은 사례가 있었고, 서울시한의사회의 한의치매진료사업를 참고해 거제분회만의 사업을 추진했다. Q. 사업 추진 과정을 설명한다면? 보건소, 치매안심센터를 방문하고 최종적으로 거제시장, 거제시의회 박명옥 시의원 등 관계자들을 만나 사업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조회장은 한의치매예방사업과 관련해 박성철원장과 이운주원장과 함께 실무진을 구성하고, 이 과정에서 시장님과 알고 지내신 원로 한의사분들 덕에 거제시장과 수월하게 만날 수 있었고 직접 브리핑 자료를 준비해 시장님을 설득했다. Q. 왜 치매인가? 경도인지장애 환자의 경우, 약 10% 이상에서 치매로 진행할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가 있다. 지금은 경도인지장애 진료사업이지만 향후 한의가 경증 치매까지 진료 영역을 확장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굉장히 힘든 과정이지만, 경도인지장애 한의 진료의 성공적인 연착륙을 통해 경증 치매 진료를 할 수 있다는 설득력을 갖는 계기를 마련하고 싶었다. 또 경도인지장애에서 더 나아가 침, 첩약, 자하거(태반) 약침치료 등의 한의약적 방법으로 치매로 진행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는 인식을 대중에 확대하고 흐름을 만들고 싶다 Q. 구체적인 사업 계획은? 진료에 거제분회 회원 16명이 참여할 예정이고 거리를 감안해 환자와 매칭할 계획이다. 예산은 거제분회와 거제시가 각각 일정 부분을 부담하는 형식이다. 이론 교육은 동의대 한방병원 신경정신과 권찬영 교수로부터 2차례에 걸쳐 완료했고, 1월28일 거제시청과 업무협약을 체결한다. 또 오는 2월4일 참여 분회원을 대상으로 실무교육을 진행하고, 시뮬레이션을 실시해 회원들이 인지기능평가 과정을 숙지하고 임상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며, 3월4일에는 대상 환자들에게 대상자 교육도 실시한다. 한의치매예방관리사업 대상자 교육 당일에는 보험 적용 한약 투여에 대비해 보건소에서 방문해 혈액을 채취할 예정이다. 이는 간기능검사, 신기능 검사를 먼저 실시해 장기간의 보험한약 투여에 대한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이다. Q. 어떤 한의진료를 제공하는지? 보험 적용이 되는 한약 56종 중 치매와 관련된 유효한 처방이 11가지가 있으며, 그 중 2가지가 알츠하이머성 치매에 도움이 된다. 그 외 일반적으로 치매에 도움이 된다는 약제가 있는 데 그중 선택해 보험 적용 한약재, 자하거(태반) 약침치료, 일반 침 치료 등을 주 2회 6개월 간 진행할 계획이다. Q. 진료기간을 6개월로 정한 이유는? 인지기능을 선별하기 위한 중요한 검사도구인 CIST(인지기능 선별 검사 도구·Cognitive Impairment Screening Test)와 MoCA(경도인지장애/치매 선별 검사·Montreal Cognitive Assessment) 검사를 하면 인지기능이 굉장히 올라가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최소 4개월~6개월은 진료해야 원활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부산시한의사회의 사례를 참고해 6개월 정도의 진료를 모델로 했다. Q. 향후 목표는? 이번 사업의 결과보고서 작성해 거제시청, 보건소, 치매안심센터, 경상남도한의사회에 제출하고, 긍정적인 평가를 이끌어내 내년에는 사업을 더 확대해 보려 한다. 현재 거제시에 등록된 경도인지장애 진단자가 300여명인데, 사업 결과가 좋다면, 올해 대상자수 30명 기준으로 단순히 계산해 매년 30여명씩 향후 10년까지 이 사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지자체가 치매 예방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고, 노인주치의제, 만성질환관리제, 방문 진료에 인지기능에 대한 평가항목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이 같은 큰 사업들 속에 필요에 따라 치매진료사업을 모듈 형식으로 조합하고 확장해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경도치매 진료까지 확대할 수 있도록 설득력을 얻기 위해 노력하겠다. Q. 끝으로 남기고 싶은 말은? 최중기 경남도지부 회장님, 이경석 부산시회 부회장님, 박명옥 거제시의원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타 지부가 만든 길을 따라 갔다. 여러 시·군분회장들에게 대관업무, 사업계획서 작성, 매뉴얼, 프로토콜 등을 공유했다. 어느 지자체든 이를 적용할 수 있기 때문에 각종 정보와 어떻게 돌파구를 마련할 지 알려드린다고 했다. 사업추진 노하우 등 방법 등을 공유했기 때문에 경남도 전체 한의사회가 함께 추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심각한 고령화 상황에서 인지기능 문제의 경우, 침과 보험한약을 활용한 한의진료가 당연시되는 문화가 자리매김했으면 한다. -
한의 방문진료, 재택의료 시대의 필수의료이자 ‘게이트키퍼’진료실의 벽을 넘어, 환자의 삶으로 뛰어들다 의료 기술의 눈부신 발전 이면에는 여전히 거동이 불편해 병원 문턱조차 넘지 못하는 의료 사각지대의 환자들이 존재한다. 필자는 이들을 직접 찾아가는 '일차의료 한의 방문진료'를 통해 진료실 안에서는 미처 보지 못했던 환자들의 진짜 삶을 마주하고 있다. 방문진료는 단순히 아픈 곳에 침을 놓는 행위를 넘어, 환자가 평생 살던 곳에서 존엄하게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돕는 ‘Aging in Place’의 실현이자, 한의사가 걸어가야 할 시대적 소명이라 확신한다. 현장에서 증명한 한의 방문진료의 독보적 경쟁력 친절한홍한의원은 지난해 중랑구 내 기초생활수급자를 대상으로 729건, 기타 지역 포함 총 1,385건의 방문진료를 수행했다. 이는 중랑구 내 한·양방 의료기관을 통틀어 가장 높은 실적이다. 특히 기존 재택의료센터로 지정된 타 의료기관들의 실적(A의원 66건, B의원 545건)을 크게 상회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장에서 경험한 한의학은 재택의료에 최적화된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첫째, 도구의 유연성과 공간의 확장성이다. 침, 약침, 부항 등 전통적 수단은 물론 포터블 초음파까지 도입하여 장소의 제약 없이 의료 현장을 재현하고 있다. 둘째, 포괄적 주치의 역량이다. 한의사는 한·양방 의료 전반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환자의 통증뿐만 주거 환경, 영양 상태 등을 통합적으로 살피는 ‘게이트키퍼(Gatekeeper)’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혈액검사기를 활용하여 내과 질환 및 다약제 관리까지 관리가 가능하기에 포괄적 주치의와 연계에서 한의 방문진료의 진정한 가치는 증명된다. 디지털 전환을 통한 근거 구축: ‘기록의 힘’ 최근 WHO 글로벌 서밋에서 강조된 전통의학의 핵심 과제는 ‘과학화와 데이터 기반의 근거 구축’이었다. 필자 역시 한의 방문진료가 제도권 내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철저한 기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를 위해 본원에서는 녹음 기반 AI 차팅 시스템을 도입하여 진료 중 발생하는 대화와 판단을 실시간으로 데이터화하고 있다. 또한, 자체 방문진료 앱을 개발하여 모바일에서 환자 접수부터 상병 입력, EMR 연동까지 원스톱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러한 디지털 전환은 개별 한의사의 헌신을 넘어, 향후 재택의료 정책 설계와 연구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학술적·제도적 근거가 될 것이다. 제도적 장벽을 넘어 시스템의 중심으로 가장 높은 실적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장기요양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에서 서울 지역 한의원이 대거 배제된 현실은 뼈아픈 대목이다. 인력 채용과 팀 기반 사업 준비를 마쳤음에도 불투명한 심사 기준으로 현장의 노력이 온전히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멈출 수 없다. 한의 방문진료는 이제 주변적인 대안이 아니라, 만성질환 증가와 의료비 부담이라는 현대 보건 체계의 문제를 해결할 구조적 해법으로 재구성돼야 한다. 정부는 양방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성과를 내고 있는 한의사들이 재택의료 시스템의 주역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적극 활용해야 정부-환자가 윈윈하는 환경이 마련될 것이다. 환자가 기다리는 그곳에 한의사가 있다 방문진료 현장에서 “차라리 빨리 죽고 싶다”던 어르신이 치료 후 밝은 표정으로 “언제 또 오느냐”고 물으실 때, 필자는 한의사로서의 존재 이유를 찾는다. 한의 방문진료는 환자의 정서와 생활을 어루만지는 가장 따뜻하고도 강력한 의료 모델이다. 거동이 불편한 이웃들에게 한의 방문진료가 최고의 선택지가 될 수 있도록, 동료 한의사들과 함께 묵묵히 현장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정책적 관심과 사회적 지지가 더해진다면, 한의학은 초고령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든든한 의료 시스템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 확신한다. -
論으로 풀어보는 한국 한의학(312)김남일 교수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지난 2025년 12월19일 경희대학교 청강한의학역사문화연구소(소장 차웅석)에서 제6회 근현대한의학연구사 콜로키움 및 근대한의교육문화특별전으로서 ‘영소회통으로 침구종주 바로 세운 한의지사, 전광옥(田光玉, 1871〜1945)’이라는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다. 이날 주인공 田光玉(1871∼1945) 선생은 諸醫書에 博通한 한의학 교육자이다. 그는 황해도 태생으로 京城에서 醫生으로 활동하면서 한의학을 살리기 위한 활동을 전개한 인물이었다. 1904년 洪哲普의 노력과 고종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한의과대학 同濟醫學校의 敎授로 金永勳과 함께 선발되어 한의학 교육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15년 전국적인 학술단체인 全鮮醫會가 만들어진 이후 東西醫學硏究會 등 단체에서도 講師로 활동하면서 한의학 교육에 힘썼다. 1936년에 간행된 『忠南醫藥』 제5호에는 전광옥의 ‘治病要領論’이라는 제목의 글이 나온다. 『忠南醫藥』은 忠南醫藥組合이라는 충청남도에 조직된 한의계를 망라하는 단체에서 간행한 기관지다. 『忠南醫藥』은 1937년에 『漢方醫藥』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가면서 1942년까지 50호까지 간행되었다. 『忠南醫藥』 제5호에 게재된 전광옥의 ‘治病要領論’은 한의사가 병을 치료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기본 원칙을 정리한 것이다. 아래에 그 내용을 요약한다. 첫째, “治病必求其本” 즉 병의 근본을 치료하라는 것이다. 병은 標本의 구별이 있으니, 겉으로 드러난 증상(表)에만 집착하지 말고, 그 원인이 되는 기혈의 허실과 장부의 상태(本)를 찾아야 하며, 눈에 보이는 증상뿐만 아니라 은연 중에 숨어 있는 無形의 원인을 살펴야 훌륭한 의사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대소변 불통이나 인후 폐색처럼 위급한 상황에서는 먼저 증상(表)을 치료하여 급한 불을 끄고, 나중에 근본(本)을 치료하는 유연하다는 것이다. 둘째, 정기를 보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邪氣를 小人에, 正氣를 君子에 비유하여 설명했고, 사기를 몰아낼 때 도적의 괴수를 잡듯 핵심을 타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셋째, 陰陽氣血의 상호 의존 원리를 설명했다. ‘陽生陰’, ‘氣生血’이라는 키워드를 들어서 음과 양, 기와 혈은 서로 뿌리가 된다고 주장했다. 양이 부족하면 음이 생기지 않으므로 양을 보충해서 음을 키우는 것과 기를 보해서 혈을 안정시키는 원리를 설명했다. 痰의 치료에 있어서도 痰은 火와 氣의 움직임에 따라 발생하므로 단순히 痰을 제거하려 하기보다 火를 내리고 氣를 다스리는 것이 기본이라고 했다. 넷째, 겉모습과 반대로 치료하는 反治法의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것으로서 ‘塞因塞用’, ‘通因通用’의 두가지를 예를 들어서 설명했다. 속이 막힌 듯해도 허해서 생긴 것이면 보하는 약을 쓰고(塞因塞用), 설사를 해도 열이 심한 것이면 오히려 내려주는 약을 쓰는(通因通用) 등 병의 실질에 맞는 처방을 강조했다. 다섯째, 한의사의 소명으로서 三世之書에 정통해야 함을 강조했다. ‘三世’의 의미에 대해서 그는 鍼灸(黃帝), 本草(神農), 脈訣(岐伯)의 세 가지 학문에 대한 능력이 갖춰져야 함을 뜻한다는 해석을 가하고 있다. 그는 맥으로 병을 살피고 약으로 다스리며 침으로 질병을 쫓아야 한다고 하였다. -
신미숙 여의도 책방-72신미숙 국회사무처 부속한의원 원장 (前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편집자주] 『신미숙의 여의도 책방』은 각 회마다 1개의 키워드에 5권의 도서를 추천하는 형식으로 이어갑니다. “저속노화, 고속으로 정책화해 시민들 건강해지게 도울 것.” 이는 저속노화 창시자가 서울특별시 초대 ‘건강총괄관’이라는 비상근직 3급 국장직위의 시청 공무원으로(한달에 2회 이상 출근, 급여는 336만원) 2025년 8월1일 출근하며 언론사에 밝힌 당찬 포부였다. 모든 분야가 속도 경쟁이기는 해도 노화라는 단어 앞에 저속이니 고속이니 단어가 붙어서 하나의 현상 혹은 열풍이 될 줄은 몰랐다. 물론 나 또한 그 유행어의 물결을 외면하지 못하고 2023년 3월 의사 정모씨의 책을 인용하며 “한의학은 고령친화적인가?”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저속노화’라는 생소했던 네 글자는 왠지 오래갈 것 같았다. “어르신들 약 복용 중복해서 하지 마시라”는 대학병원 노년내과 의사다운 건전한 메시지와 함께 탄생한 단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그가 햇반 껍질에, 편의점 도시락 커버에, 렌틸콩 포장지에 그리고 두유 박스에 저속노화 광고모델로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했을 때 호사가들의 입방아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부적절한 관계 어쩌고 저쩌고가 중요한게 아니다. 일이 터지고 나니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숨겨왔던 의심의 눈초리를 맘껏 드러냈다. “렌틸콩만 넣으면 라면도 저속노화 메뉴인가요?”, “잡곡식만 하면 만병이 다 낫나요?”, “저속노화, 알고보니 저속한 노화였다”, “저속노화의 고속나락” 등의 언어유희적 댓글 수만개를 생성시킨 후 저속노화 창시자는 2026년 1월11일, 일단은 활동을 멈춘 상태다. 시대착오적 단어로까지 추락한 상태는 아니지만 당분간 ‘저속노화’ 타령은 들리지 않을 것 같다. 대신 유사한 개념의 또 다른 힙한 신조어가 나타나 새로운 건강 유행을 선도할 것이고, 그 유행 또한 잠시동안은 영원할 것 같은 생명력을 발휘하다가 다양한 혹은 치명적인 결함을 드러낸 후 초고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수십년 전 도올 선생님께서 “띄우느라고 한 번 써 먹고, 밟아 없애느라 또 한 번 써 먹는다”를 언론의 악질적 취미로 정의하신 바 있다. 대유행의 협곡 사이에서 눈치 빠른 자들은 늘 크게 챙기고 빨리 빠진다. 이것 또한 업계의 정해진 수순이다. AI기술의 발전…항노화 아닌 탈노화 시대로 접어드나? ‘저속노화냐? 고속노화냐?’로 1월의 글제를 정하고 보니 비슷한 내용을 자주 다룬 느낌이다. 아니나 다를까 노인의 돌봄 문제로 “힘이거나 짐이거나”를 썼고, 아버지 기일에 맞추어 “2년 전 그 날을 떠올리며”라는 제목으로 죽음에 대한 책들을 리뷰했었다. 이번에는 돌봄이나 죽음이 아닌 노화가 주제이니 최소한 자기복제는 되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글솜씨가 애매한 자의 부끄러운 몸부림이다. 올해 초 친정 엄니께서 팔순을 맞이하셨다. 정기적으로 의사를 만나야 하는 중증 질환도 없으시고 따라서 복용하는 약도 없으시다. 98세를 사신 외할머니의 DNA를 물려 받으셨고 그 누구보다도 긍정적인 마인드와 부지런한 생활습관으로 자기관리를 잘 해 오신 증거이기도 하다. 당신이 건강한 팔순이시면서도 TV에 등장하는 더 건강한 100세 노인들을 다룬 뉴스나 다큐를 유독 좋아하신다. 며칠 전에는 현재 5선 국회의원이신 83세 박모 의원님이 향후 국회의장을 꿈꾸고 계신다는 뉴스를 공유해주시며 엄니께서 덧붙이신다. “노인들 다루는 뉴스 그 어디에 좋은 거 있더냐? 오래 살아있는 것 자체를 문제인 것처럼 다루는 게 대부분이고 뉴스 화면에 나오는 노인들은 늘 병원 대기실에 앉아있거나 요양병원에 누워있더라. 그래서 우리 나이에 저렇게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 보면 그저 부럽고 무조건 반갑더라.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 노인네도 있으니 평범한 나도 더 힘을 내서 바쁜 척이라고 해야지 싶다.” 다짐을 내보이시던 엄니의 결론은 그 분이 후기 국회의장 되시는 데에 찬성 한 표라고 하셨다. 일론머스크와 피터딜이 내놓은 AI의 전망에 의하면 올해부터 2028년 사이에 인간 한 명의 지능을 완전히 넘어서는 AGI(범용인공지능)가 등장하고 화폐의 가치나 저축의 개념이 흔들리며 화이트칼라 상당수가 AI로 대체되는 등 교육과 고용 시장을 포함한 근본적인 경제 구조가 폭발적으로 바뀔 거라고 한다. 고용에 있어서도 AI를 활용하여 성과만 낸다면 20대든 50대든 무관하게 채용이 가능하므로 나이도 무의미해질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최근 20대들의 신입채용을 줄이고 있다. AI 덕분에 항노화가 아닌 탈노화의 시대로 접어든 기분이다. 저속노화냐 고속노화냐의 건강유지 방법의 탄력적 선택 대신 탈노화가 가능한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의 비가역적 분리가 이미 시작되고 있다. AI로 풀장착한 노인은 영에이티로 조롱받는 대신 노인 아닌 노인, 영원히 사는 갓파더로 추앙받을 날이 멀지 않았다. 『노인은 없다』(마크 아그로닌, 한스미디어, 2019년 1월) - 늙음이 문제라면 나이듦은 해결책이다. - 최고의 의료 서비스와 보살핌을 받더라도 기본적인 활동에 제한을 받으면 삶의 기쁨도 줄어든다. - 노인이라는 허상을 지워 내고 보면, 그 안에는 깊이 있고 다양하며 생명력 넘치는 노년의 문화가 존재한다. - 나이듦에 관한 긍정적인 자기 인식이 자리 잡힌 사람들은 부정적인 인식이 있는 사람들보다 생존율 중위값이 7.5년 더 길었다. - 노화가 진행되는 과정 중에도 높은 목적의식, 성취의식이 존재한다. - 나이가 들면 우리는 모두 육체적, 심미적으로 퇴화한다. 우리 대부분은 나이가 50대 이상이 되면 뇌의 능력이 바뀐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나이듦에 관하여』(루이즈 애런슨, 비잉, 2020년 2월) - 서양의학은 오늘날을 만성질환 전성시대 혹은 고령화 질환 유행시대라 정의한다. 그러면서도 노년층과 노인의학에 대한 실질적 지원은 만년 2순위다. - 안티에이징은 노인 집단과 노화의 특징을 거부하고 부정한다는 면에서 상당히 시대착오적인 표현이다. - 생물학 외의 다른 눈은 모두 감아 버린 현대 서양 의학은 큰 그림의 일부만 보고 있다. - 20세기 들어 노화와 임종이 마치 반드시 의학적 조치를 취해야 하는 사건인 것처럼 인식되면서, 의학은 스스로를 죽음이라는 절대악에 대항하는 무기라 자처해 왔다. - 의학은 인간이 자연스러운 생의 단계를 보다 편안하게 넘기도록 돕는 사회적 수단이어야 마땅하다. - 현재 최고령 세대는 어떤 의료 행위를 제안받든 최우선 관심사는 통증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 노년기는 길고 개인차가 있으며 상대적이다. 현대인 대부분이 심신이 현저히 쇠하기 전에는 노인 호칭을 극구 거부한다. - 오늘날의 의료 체계와 그 바탕 패러다임에는 무언가가 빠져 있는 게 틀림없다. 중대하고 결정적인 그 무언가가. 『노화의 정복』(로즈 앤 케니, 까치, 2023년 7월) - 사실 생물학적 노화는 아주 일찍 시작된다. 30대에 접어들면 노화 과정이 세포 안에서 이미 확실하게 자리를 잡는다. - 몇몇 연구들을 통해서 질병 상태와는 상관없이 ‘젊다고 느끼는 만큼 젊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인식 자체가 다른 요인들보다 더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 노화 과정의 속도를 7년만 늦추어도 각각의 나이에서 발생하는 질병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 - 사회적 참여와 인간관계는 혈관질환을 감소시키고 이것이 다시 치매를 발생시키는 혈관적 원인을 줄여준다. 사회적 접촉이 뇌를 보호해주는 이유를 이것으로 추가 설명할 수 있다. - 스트레스에 예민한 사람은 코르티솔 수치가 만성적으로 높아져 치매의 위험을 2배로 증가시킨다. - 50세부터는 매년 근육량이 줄어든다. 우리 몸은 신체활동을 위해서 디자인된 수렵채집인의 몸이다. 『왜 늙을까, 왜 병들까, 왜 죽을까』 (이현숙, 21세기북스, 2024년 9월) - 65세 이상 남성에서는 전립선암의 발병률이 80% 정도 된다. 이런 암의 특징은 나이가 들수록 매우 느리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 한의학 서적에서 암을 기록한 것은 <황제내경>이다. 이 기록이 기원전 3세기에 나타났으니 서양의 기록보다 100년 이상 빠른 것이다. 동양에서는 수술을 하지 않았고 서양에서는 17세기에도 수술을 했다. - 죽는 것이 아니라 대사를 더 하지 않고 에너지도 아주 조금만 만들어내면서 세포 분열을 안 하는 현상이 노화의 가장 기본적인 세포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 텔로미어의 길이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구조가 중요하다. 이 구조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 생체 시계를 늦추는 방법일 수도 있겠다. - 텔로미어가 짧아진 세포에서는 염증 반응이 나타나고 면역 세포가 노화한다. - 데이터를 바탕으로 타깃을 할 수 있는 정보를 얻어내는 것, 이게 바로 개인 맞춤형 의학으로 가는 기반이 될 것이다. - 과학에서는 진리가 승리한다는 사실. 어떤 비밀도 그 메커니즘을 규명하면 인류에 이바지할 수 있다. 『과속 노화의 종말』(박민수, 허들링북스, 2025년 4월) - 노화는 시간이 흐르면서 유전자 변화가 쌓여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인슐린, 코르티솔, 성장호르몬 이 세 가지 호르몬은 노화 속도를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존재이다. - 통계적으로 암을 빼면 만성 질환으로 사망하는 원인 중에서 혈관 질환이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 백세 건강의 초석은 단맛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정제당의 끝판왕인 밀가루는 담배의 니코틴, 술의 알코올과 비견될 정도이다. - 과일을 주스 형태로 섭취하는 것은 최악의 선택이다. 과일 속 섬유질은 파괴되고 당은 액체 형태로 농축되어 우리 몸에 빠르게 흡수된다. - 최근 오래 앉아있는 생활이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한 연구가 쏟아지고 있다. 우리 몸은 원래 서서 움직이도록 설계되었다. - 커피와 같이 카페인이 함유된 음료 외에도 만성 탈수를 유발하는 음료들이 있다. 탄산음료와 과일주스, 술이 그것이다. - 노화와 장수를 결정짓는 다섯 가지 핵심축은 5M이다. 마이크로바이옴(Microbiome), 멜라토닌(Melatonin), 마이오카인(Myokine), 마인드(Mind),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 5가지가 제대로 기능하고 균형을 이룰 때, 우리는 나이 먹는 속도를 늦추고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 여러 이유로『흑백요리사 2』를 외면하고 있다가 최종 우승자가 최강록님이라는 뉴스를 보고서야 최종편을 시청했다. 두 아이들이 중고생이었을 때, 간식이나 야식을 먹을 때 자주 보던 유투브 채널 중 하나가 『마스터 쉐프 코리아』 시리즈였다. 그 중에서도 시즌2 우승자인 요리사 최강록에 대한 아이들의 팬심이 신기했다. 그를 열렬하게 추앙한다기보다는 ‘그냥 요리하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묘한 아저씨’라고 표현했다. 그 매력이 궁금하여 나도 같이 따라 보다가 자연스럽게 그의 팬이 되었다. 어메이징한 달변가들이 장악한 예능판에서 초단위, 분단위, 월단위로 유행어와 유행식당의 트렌드가 바뀌는 초스피드 대한민국에서 13년만에 나간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서 다시 1등을 차지할 꿈을 꾸기 아니 그것을 현실로 이뤄내기의 난도는 상상불가이다. 그는 『마쉐코2』에서 우승을 하고도 바로 속도 전쟁에 뛰어들지 않고 물 들어오려는 순간 노를 버렸다. 그만의 파격과 역설로 오늘날 더 큰 성과를 냈을 수도 있다. 고문에 비유되는 끈질긴 재료 손질과 징그러울 정도의 성실이라는 근성의 초심을 유지했다는 점이 기본값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었던, 요리가 아닌 사람에게 감동을 받은 대중들은 13년 전보다도 더 진지한 축하를 보내고 있다. 노화 완화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현명한 태도는? 세계 최고령 현역 스프린터로 활약 중인 이탈리아의 엠마 마젠가(Emma Mazzenga, 1933년생)님의 기사를 읽었다. 고령임에도 체력과 근력을 유지하며 다수의 세계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마젠가님의 신체적 특성을 노화 연구자들이 장기적으로 추적 중이라고 한다. 연구진은 18개월 간격으로 그녀를 검진하며 노화 진행도를 관찰했는데, 최근 검사에서도 심폐 지구력과 근육의 미토콘드리아 기능이 50대 일반 성인 수준, 근육 세포 구조와 회복능력은 20대 건강한 단거리 선수와 유사하다는 평가가 나왔다. 장수와 건강 유지의 비법에 관한 질문에 남긴 한결같은 대답은 다음과 같다. “중요한 건 계속 움직이는 것이다. 절대 멈추지 않는 것이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다.” 항노화든 탈노화든 노화 완화를 원한다면, 저속노화의 추구보다는 고속노화의 회피 방법을 찾는 편이 더 빠를 것 같다. 굳이 속도로 표현하자면 저속으로 생존하자는 것이다. 저공 비행으로 유급만 면하고자 장학금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국시합격만이 목표였던 많은 한의대생의 소박한 소망과 유사하다. 단거리 도전을 시작했었던 53세 때부터 40년째 주 3회, 회당 1시간 정도의 운동루틴을 한 번도 중단한 적 없는 93세 마젠가 할머니의 끈기를 실천하다 보면 올 한 해도 어쩌면 해피엔딩이 가능할 것 같다. 사소해 보이는 일상이라도 그래서 커다란 성공은 못 이루고 끝나버릴 것만 같은 불안한 예감이 자주 엄습해 오더라도 멈추지 않고 저속으로라도 계속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특별하지 않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시도할 수 있는 현명한 삶의 태도이다. -
“한의학 교육, 필수의료 인재 양성의 요람으로”서형식 한평원 신임 원장(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한의신문] 한국한의학교육평가원(이하 한평원)은 최근 제5차 이사회를 통해 서형식 평가인증단장을 신임 원장으로 선출했다. 서 신임 원장은 한평원의 역할을 단순한 심사기관이 아닌 ‘조력자·가이드’로 재정립하고, 한의학 교육의 현대화와 질적 고도화를 핵심 축으로 12개 한의학 교육기관과의 협력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한의학 교육의 질 관리와 평가 체계 고도화를 책임지는 핵심 기관인 한평원은 향후 3년간 한의대 교육의 방향성과 경쟁력을 좌우할 중요한 전환기를 맞고 있다. 본란에서는 서형식 신임 원장을 만나 취임 소감과 함께 한의학 교육의 미래 비전, 평가제도 개선 방향, 대학과의 협력 방안 등에 대해 들어봤다. [편집자주] Q. 한평원 원장으로 취임하게 된 소감은? 급변하는 의료환경 속에서 양질의 한의사 인력을 양성하는 12개 한의과대학 및 한의학전문대학원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한평원 원장을 맡게 돼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한의계의 미래는 결국 ‘교육의 질’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한의사에게 요구되는 역할과 보건의료 현장의 기대치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교육 표준을 확립하고, 국민의 신뢰를 받는 의료인을 배출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향후 3년 임기에 임하고자 한다. Q. 교육 현장과 한평원 활동을 병행해 왔다. 부산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 외과학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과 환자 진료에 매진해 왔다. 특히 한의학 내에서 상대적으로 불모지에 해당하는 외과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한평원에서는 5년간 평가인증단 부단장과 단장을 맡아 평가 업무를 수행했다. 기존 2주기 평가 체계에서 역량 중심 평가 기준인 ‘KAS2022’로 전환되는 시기에 평가팀과 함께 인증 업무를 수행했다. 대학들이 직면한 자원 확보 문제와 교육 혁신 사이의 간극을 직접 경험하며, 한평원의 중재자적 역할에 대해 고민해 왔다. Q. 앞으로 한평원이 지향해야 할 비전과 방향성은? 가장 큰 비전은 한의학 교육이 일차의료를 포함한 필수의료 영역을 든든히 담당할 수 있는 인재를 길러내는 요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법적·학술적 근거는 이미 마련돼 있다. ‘한의약육성법’에 명시된 ‘과학적으로 응용·개발’이라는 한의학의 외연이 확장될 수 있도록 한의약의 정의를 교육 현장에서 구체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과거의 전통적인 수준을 넘어 과학적 근거와 결합해 현대 보건의료 체계 내에서 한의학의 실질적 위상을 강화하고자 한다. 우리 학생들이 졸업 후 의료 현장에서 일차의료와 필수의료를 담당할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교육과 평가의 토대를 공고히 다지는 것이 목표다. Q. 향후 3년간 중점 추진 계획은? KAS2022 기준 도입으로 역량 중심 평가의 기틀은 마련됐으나, 대학 현장의 체감도는 아직 높지 않다. 단순한 서류 중심 평가를 넘어 학생들의 실제 진료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교육 모델이 정착되도록 대학과 협력할 방침이다. 최근 학술홍보위원회와 교육연구위원회를 신설해 단순 평가기관을 넘어 교육정책기관으로 도약하고 있다. 위원회를 활성화해 교육 표준화 연구, 정책 개발, 평가 기준 개선이 유기적으로 연계되는 조직 체계를 구축할 계획이다. 연구 성과가 평가 기준에 반영되고, 다시 교육의 질 향상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겠다. 이를 통해 한평원이 대학과 함께 성장하는 파트너로 자리매김하도록 하겠다. Q. 교육 평가기준 적용 과정에서 현장의 어려움도 제기돼 왔다. 4대 보험 수령 조교 채용과 연구년 기준은 KAS2022에서 갑자기 도입된 것이 아니라 1주기부터 유지돼 온 기본 기준임을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 현재의 갈등은 기준 자체의 신설보다는 ‘조교 신분의 명확성’과 ‘실질적인 연구년 보장’이라는 평가기준 해석상의 이견에서 비롯된 것이라 본다. 시대 변화와 학교별 특수 상황에 따른 평가 기준 해석의 변화는 열어두고 있으나, 평가 기준의 기본 정신과 취지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인증기준위원회에서 대학 관계자들과 긴밀한 면담을 진행하고 있으며, 규정에 따라 6년마다 실시하는 평가기준 검토 과정을 통해 현장의 목소리를 충분히 담아낼 것이다. 한의학 교육 발전을 위한 합리적인 기준이 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Q. 전국 한의대 교수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평가라는 과정은 이를 수행하는 기관과 이를 받는 대학 모두에게 심리적·물리적 부담을 주는 힘든 과정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교육적 역량을 증명하고, 국민으로부터 사회적 신뢰를 얻을 수 있다. 현재 대다수의 학교가 4년 인증을 유지하며 교육 혁신을 위해 헌신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평가를 한의학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필수 과정으로 이해해 주시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함께 발맞춰 주시길 진심으로 부탁드린다. Q. 이외 하고 싶은 말은? 한평원의 업무는 결코 특정 원장이나 소수 실무자의 일이 아니다. 한의과대학을 구성하는 교수, 학생, 행정 인력 모두가 함께 책임지고 이끌어 가야 할 ‘우리의 일’이다. 비난과 반목보다는 서로를 보듬고, 격려하며 한의학 교육이라는 거대한 배를 함께 저어 가는 문화가 정착되길 바란다. 3년 뒤 임기를 마쳤을 때 ‘한의학 교육이 한 단계 도약했고, 그 변화가 한의계 전체의 발전으로 이어졌다’는 담백하고도 명예로운 평가를 받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한의계 구성원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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