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에 金正玉에 의해 개발된 鍼灸避妊
가족계획의 문화사
1960년대와 70년대는 가족계획의 시대였다. 가족계획이란 인구의 폭발적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국가에서 시행한 인구증가억제 정책이다. 1960년대의 가구당 평균 자녀수가 6명이었기에 국가에서는 이를 3인으로 낮추기 위해 ‘세 자녀 갖기 운동’을 시행한다.
이를 위해 국가적으로 시행된 것이 정관수술과 루우프 시술이었다. 1970년대가 되면 다시 구호가 ‘딸아들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고 바뀌면서 그 구호의 강도가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이 시기부터 시작된 새마을 운동에 ‘피임실천 촉진대회’가 포함되었다. 1974년 시작된 복강경 난관 수술은 인기를 끌면서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피임은 부작용보다도 성과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과업이었던 것이다.
1974년 12월호로 나온 『漢方春秋』라는 한의학 잡지에는 침술로 피임을 90% 성공한 한명의 한의사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鍼術避妊 90% 果 거둬”라는 제하에 나온 기사에는 당시 수년동안 鍼灸를 사용해서 100여명의 피임에 성공한 金正玉 한의사를 소개하고 있다.
金正玉은 당시 50세로 서울시 도봉구 쌍문동에서 13년간 대왕한의원을 개설하여 진료를 하여 왔다. 그동안 고혈압, 중풍, 소아마비 등을 다루어 오다가 수년 전부터 세계적으로 관심거리가 되었던 산아 제한에 따른 피임법에 관심을 가지고 鍼灸避妊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수년간 침술로 피임을 시술하여 90% 이상의 효험을 거두었고 이것을 그해 10월 제1회 전국한의학술대회에 보고하여 장려상을 받게 된 것이다.
金正玉이 시술한 침구피임법은 1975년 3월에 나온 『대한한의학회지』 제12권 제1호에 기고된 그 자신이 쓴 「家族計劃(避妊法)에 對한 鍼灸 治驗報告」라는 제목의 논문에 소개되어 있다. 이 논문을 통해 그는 자신이 사용하는 방법은 古醫書의 방안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醫學入門에 보면 石門(丹田) 臍下二寸 鍼五分 灸二七壯乃至百壯至라 하고 惟女人 灸之 絶産이라 하였고, 醫學大辭典에 보면 石門穴 屬任脈經 在臍二寸三焦募也라 하였고, 甲乙經에는 鍼八分 留三呼 得氣卽瀉라 하였고, 千金에는 鍼五分 灸七壯이라 하였고, 素問注에는 鍼六分 留七呼라 하고, 婦人에는 禁鍼 禁灸 犯之 絶子라 하고, 許任 鍼灸經驗方에는 欲斷産 足外 上 各一寸을 三壯이면 卽 斷産이오, 石門鍼刺니라. 陰都는 挾巨闕 一寸五分이니 直下二寸에 三壯하고 禁鍼이니 鍼之면 終身無子라 하였다.
鍼灸大成에 보면 欲斷産 灸右足內 上一寸 合谷. 又一法은 灸臍下二寸三分에 三灸하고 肩井이라 하였다.
陰都(一名 食宮) 通谷下一寸이니 去腹中行 各一寸五分이라 足少陰 衝脈之會니, 銅人에 鍼三分 灸三壯이라 하였다. 鄕藥集成方(婦人大全良方)에 보면 婦人斷産驗方에 古蠶紙 方圓一尺 燒爲末(納三錢 가량) 酒飮 調服하면 終身토록 孕胎하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이밖에 零陵香이나 水銀을 服用하는 방법도 있으나 여기서는 省略키로 하고 鍼灸에만 言及코저 한다.
避妊穴(石門, 左右 足外 右足內 陰都) 等 單穴에 單 一回 鍼灸로서 終身不姙이란 成功率이 低調했다. 數十名을 施療해 보았으나 再次 姙娠된 일이 많았다. 그래서 綜合的인 六穴에 五日間 標準삼아 每日 鍼 10〜30分 灸 3〜21壯 結果 좋은 成績을 얻었다.”
金正玉이 위에서 제시하고 있는 방법은 石門穴과 陰都穴에 침과 뜸을 시술하여 避妊하는 것이다. 그는 1회의 침구 시술로 1년간 불임이 될 수 있고 1년 후에는 임신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옛날 妓女들 가운데 평생동안 不姙하기 위하여 石門과 三陰交에 大豆 모양의 큰 灸痕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농촌에 사는 不姙女性들 대부분이 石門穴에 大豆 크기의 灸痕 자리가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몇가지 예를 들고 있다.
金正玉을 통해 산아 제한이라는 1970년의 시대적 과업의 완수에 동참하고자 연구에 매진한 한의계의 노력을 조망해볼 수 있다.
<- 대한한의학회지와 한방춘추에 나오는 김정옥의 논문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