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과 첨단 디지털 기술이 문명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꾸고 있는 오늘날,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수백년 전 역사 속 지식인이었던 ‘儒醫’들의 발자취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된다.
필자는 일찍이 『한의학에 미친 조선의 지식인들 - 儒醫列傳』(2011년, 들녘출판사)을 통해 조선 지식인들이 왜 醫學에 침잠하였으며, 그들이 추구했던 학문적 지향점이 무엇이었는가를 탐색한 바 있다.
유의란 유학적 理性과 修己治人의 도덕성을 바탕으로 의학의 이치를 궁구했던 지식인 醫家들이었다. 이들은 단순히 기술로서의 醫業에 머물지 않고, 格物致知의 학문적 엄밀함과 活人救民의 실천적 박애주의를 결합하여 한의학을 체계적이고 이성적인 학문으로 정립해 냈다. 우리가 중인 계층이라고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보았던 허준, 이제마 뿐만 아니라 유학자이면서 의학 연구에 매진한 정약용, 류성용 같은 인물들이 바로 ‘유의’의 범주에서 논의해야 할 한의사집단이다.
한의학에 미친 조선의 지식인들(부제: 유의열전).
기계가 인간의 지적 노동을 대신하고 빅데이터가 질병을 예측하는 AI 시대에, 유의의 정신은 현대 한의학이 나아갈 가장 본질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인 이정표를 제시한다.
첫째, AI 데이터 분석을 통한 ‘新儒醫的 한의학체계’의 정립이다. 조선의 유의들은 『東醫寶鑑』, 『醫方類聚』, 『鄕藥集成方』 등 방대한 문헌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당대의 경험지식을 집대성하여 독창적인 의학 체계를 구축했다. 현대의 한의학은 수천 년간 축적된 고전 의서와 임상 醫案을 AI 알고리즘과 데이터 마이닝으로 구조화해야 한다. 이는 옛 유의들이 수많은 의방을 절충하고 요점을 간추려 새로운 표준을 만들었던 지적 작업의 디지털적 계승이다. 이를 통해 한의학 고유의 辨證論治를 정밀의료(Precision Medicine) 데이터 모델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기계적 추산을 경계하고 ‘인간 중심의 진료 가치’를 회복하는 일이다. 『草窓訣』을 지은 儒醫 尹東里는 運氣學說을 임상에 적용하면서 기계적인 추산을 경계하고 반드시 환자의 개별 증상을 살피는 辨證을 중시했다. AI가 아무리 정교한 처방 알고리즘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환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心醫’의 윤리와 인간에 대한 전인적 통찰은 오직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다. AI는 진단의 도구로 삼되, 치료의 주체로서 환자와 교감하고 생명을 보살피는 유의의 도덕적 책무를 한의사가 온전히 견지해야 한다.
셋째, 利用厚生과 K-컬처를 융합한 한의학의 글로벌화 및 지역 문화 활성화이다. 홍만선의 『山林經濟』나 서유구의 『林園經濟志』가 보여주듯, 유의의 의학은 일상생활 속에서 생명을 기르는 養生과 食治 중심의 실용주의였다.
이러한 유의의 생활의학 전통을 현대 K-웰니스(Wellness) 및 푸드, 문화 콘텐츠와 결합해야 한다. 나아가 상주 ‘存愛院’과 같은 유의들의 공동체적 애민 의료 유산을 지역 축제 및 치유 관광 자원과 연계함으로써, 지역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살리고 한의학의 가치를 세계인과 나누는 K-컬처의 새로운 축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으로 귀결된다. AI라는 거대한 문명사적 전환기 속에서 전통 유의들이 품었던 냉철한 지성과 따뜻한 활인의 마음을 되살려낼 때, 한국 한의학은 미래 의료와 세계 문화를 선도하는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