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은혜 가천대 한의과대학 조교수
<선생님, 이제 그만 저 좀 포기해 주세요> 저자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한의사로서의 직분 수행과 더불어 한의약의 선한 영향력을 넓히고자 꾸준히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김은혜 교수의 글을 소개한다.
얼마 전, 한의사의 응급 상황 대처 역량에 대한 조사를 위해 각 대학의 교육과정을 살피고 있었다.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복수 면허 교수님이나 의과와의 협업을 통해 ‘응급의학’이라는 과목으로 학생들에게 응급 상황에 대한 판단과 대처 방법을 강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 한 대학의 교육과정에서는 관련 수업을 할 만한 교과목이 눈에 띄지 않았다. 평소 해당 학교의 교육열을 익히 들은 바, 현대 한의학의 ‘온고지신’이라는 방향성에 걸맞게 한의학은 한의학대로 깊이 있게 가르치고, 현대 한의사로서 갖춰야 할 기본 술기와 최신 의과 지견까지 소위 ‘제대로 된 현대 한의사’를 배출하기 위해 힘쓰는 학교라는 이미지가 강했기에 관련 교과목의 부재는 의외였다.
아쉬운 마음에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도 찝찝함이 남아 해당 학교의 교육 담당 교수님과 연락이 닿았다. 현재 응급의학 관련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지 여쭙자, 돌아온 대답은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 교수님의 사명감과 책임감 덕분에…
“아 네, 교수님. 저희는 모든 학생에게 대한심폐소생협회 기본소생술(BLS) 자격증을 취득하게 하고, 그것을 취득해야만 다음 학년으로 진급할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습니다.”
약 2년 전, 나 또한 우연한 기회로 해당 자격증을 취득했었다. 습득하고 나면 간단한 술기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의료인으로서 자격증의 유무가 주는 무게는 분명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나 역시 교육 제공자로 활동하기 위해 ‘강사 과정’ 자격증을 알아보았으나,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포기했던 기억이 있다. 그 기억과 함께, 이 과정을 학교 교육과정 안에 정착시켰다는 사실은 누군가의 지극한 헌신과 노력이 들어간 결과물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교수님 대단하시네요. 교육비는 학교에서 지원하되 학생들이 외부 기관에 가서 배우는 구조인가요?”라고 다시 여쭈니, 돌아온 대답은 한층 더 놀라웠다.
“허허, 아무래도 그게 현실적이긴 하죠? 그런데 아닙니다. 제가 직접 강사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실제 수업할 때는 간호학과와 응급구조학과 교수님들께서 함께해주시는데, 그분들 또한 모두 자격증(또는 그에 준하는 자격)을 보유하신 분들입니다.”
글로만 읽으면 어찌 보면 당연하거나 심드렁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중 현장에 나와 단 한 번이라도 응급 환자를 마주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때 본능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공부했던 기억을 되살려 정신없이 환자를 처치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또는 절대 걸어서 올 수 없는 컨디션의 환자가 내원했기에 실시한 검사에서 말도 안 되는 수치를 확인하고 급히 응급실로 전원을 보내며 발을 동동 굴러본 사람이라면, 혹은 졸업 후 홀로 공부할 거리를 찾아 헤매며 ‘이런 건 학교에서 기본적으로 알려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마지막으로 현대 한의계에 꼭 필요한 교육과정 하나를 새롭게 도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력과 노력, 그리고 운이 따라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이 교수님이(또는 이 과정을 위해 힘쓰신 모든 교수님이) 어떤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학생들의 손에 자격증을 쥐어주려 노력하고 있는지 알 것이다.

그것이 결국 한의계를 위한 길이라는 확신
같은 교수직으로서 참 대단하면서도 짠했고, 한 때 학생이었던 입장으로는 정말 부러웠으며, 선배 한의사로서는 미안한 마음이 컸다.
약 2년 전, 내가 같은 자격증을 따려 마음먹었던 동기도 비슷했을 것이다. 수련의 시절, 점점 악화되는 수많은 암 환자를 보며 응급 상황에 대한 의과적 처치를 그 어떤 한의사보다 달달 외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갓 1년 차가 된 내과 수련의에게 전화를 걸어 “보통 이런 처방들을 내시더라고요”라고 먼저 제안할 때도 많았다. 그러나 막상 임상 필드에 나오니, ‘학교에서는 왜 한의사가 의료인으로서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응급 처치에 대한 제도적 준비를 해주지 않았던 걸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고, 그 마음으로 자격증 과정을 수강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 나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강사 자격증은 포기했었다. 당연히 내가 가르쳐줄 수 있는 부분임에도, 학생들에게 그저 자격을 따놓으라는 말만 선뜻 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고민과 합리화를 반복하던 중 접한 이 교수님의 행보는 깊은 울림을 줄 수밖에 없었다.
타 학과의 도움까지 요청하며 이 과정을 도입하신 교수님의 마음을 감히 다 헤아릴 수는 없으나, 그것이 결국 한의계를 위한 길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믿는다.
우리는 종종 한의원이라는 이유로, 한의사라는 이유로 응급 상황 감별과 대처가 미흡할 것이라는 오해를 받곤 한다. 그러나 대다수가 1차 의료기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우리 임상 환경의 특징을 고려했을 때, 이 특징이 오히려 미흡할 수가 없는 구조로 해석될 수 있다.
대부분이 1차 의료기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이미 응급 상황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알게 모르게 익숙해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한의사’라서, ‘한의원’이라서…
어느 의료계든 1차 의료로는 응급 환자를 온전히 대처해내는 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며, 그 대처 방법과 재료도 굉장히 제한적인 선택지에 있다. 그러니 ‘한의사’라서, ‘한의원’이라서, ‘한의치료’라서 우리는 그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재료인 한의치료의 효능과 약효성에 맞게 우리만의 red flag를 정의하고 대처를 하면 완벽히 대체할 수 있는 해결점이다.
갈등을 내려놓고 오롯이 환자 중심으로 생각하며, 위험 신호를 감지한 의료기관에서 납득 가능한 대처와 전원을 제공하는 네트워크가 견고하게 구축되기를 바란다.
후배들의 손에 쥐여진 그 작은 자격증 한 장이, 단순히 술기를 익혔다는 증명을 넘어 환자의 생명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의료인의 긍지와 신뢰의 시작점이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