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신문] 참의료실현 청년한의사회(이하 청년한의사회)와 십대여성일시지원센터 ‘나무’(이하 나무센터)가 함께해온 위기 여성 청소년 대상 진료 사업이 서울시의 예산 삭감에 따라 마무리됐다. 청년한의사회는 최근 나무센터에서 ‘나무진료소·아웃리치 마무리 보고회’를 열고 2018년부터 시작된 7년간의 연대 활동을 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무진료소’에서 발견한 청소년들의 사투,
건강 상담을 넘어 ‘위기 감지’와 ‘연대’로
나무진료소(나무한의원)는 그동안 가정폭력 피해와 탈가정으로 성폭력, 마약 강제 투약 등 중복 위기에 노출된 여성 청소년(24세까지 지원)들을 진료해왔으며, 의료진은 청년한의사회 여성주의 소모임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여성 한의사·한의대생으로만 구성, 운영했다.
한의진료소 운영은 월1회 평일 저녁 시간을 이용해 이뤄졌으며, 근골격계·정신과·소화기계·호흡기계·미용·부인과 등 다양한 분야에서 모두 242회에 이르는 한의진료가 펼쳐졌다.
초창기부터 현장을 지킨 A한의사는 “정신과 약을 기저질환처럼 복용하고, 어른의 영역(술·담배·성·노동)에 너무 일찍 진입해 살아남으려 애쓰는 아이들을 보며 처절한 생존의 기록을 마주했다”면서 “무해한 어른으로서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자 했던 한의진료가 아이들에게 작게나마 안전한 지지망이 되었길 바란다”고 소회를 밝혔다.
나무진료소의 예진 시스템은 이용자의 특성을 고려해 실명 대신 닉네임(활동명)을 사용해 심리적 문턱을 낮췄고, 사회력 문항을 통해 노동 환경, 가족 관계, 거주 환경 등을 면밀히 파악함으로써 탈가정 위기 청소년들의 건강 위험 요소를 효과적으로 식별해냈다.
또한 안전하지 않은 노동 환경에 대한 질문은 성노동에 노출 빈도가 높은 청소년들의 위험 상황을 감지하는 도구가 됐으며, ‘성소수자와 함께하는 한의사·한의대생 모임, 홍진단’의 결과물을 한의계 최초로 적용한 ‘퀴어 프렌들리’ 문항들은 실제 내원객의 상당수를 차지했던 성소수자 청소년들의 존재를 긍정하고 구체적인 지원으로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이와 관련 정예원 한의사는 “진료소는 단순한 치료를 넘어 위기 징후를 감지하는 핵심 창구 역할을 했다”며, “활동가에게도 말하지 못한 성매매나 마약 노출 경험이 생리 주기나 산부인과 검진력을 확인하는 진료 과정에서 드러나곤 했다”고 밝혔다.
실제 사례로는 트랜지션(MTF)을 인정하지 않는 부모의 학대로 자살을 시도했던 청소년, 성인 남성에 의해 강제로 마약이 투약돼 운반책으로 내몰렸던 청소년, 조건만남 중 피임 부재로 고통받던 청소년 등이 한의진료를 통해 심도 깊은 상담을 받고 더욱 구체적인 긴급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나무아웃리치, ‘개방성’의 가치로
거리 위 안전한 지지 공간 확장
경의선숲길 공원 등지로 직접 찾아가는 ‘나무아웃리치’는 거리를 전전하는 청소년들에게 안전한 지지 공간을 확장해줬고, 2025년 상반기부터는 청년한의사회 회원들이 아웃리치 부스에 결합해 한의 진료를 병행하며 현장 대응력을 높였다. 이용 자격이나 조건을 따지지 않고 청소년의 취약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환대하는 나무센터의 ‘개방성’이라는 핵심 가치는 나무아웃리치 한의진료소에서도 잘 드러났다.
청소년 쉼터 입소 시 학대를 가한 가해자 부모에게 거소가 파악되는 ‘보호자 연락 원칙’ 때문에 입소를 거부하고 위험한 관계에 의존하거나 노숙을 택하는 아이들이 많은 상황에서 아웃리치 현장은 제도의 허점을 온몸으로 겪는 청소년들의 사투 현장이기도 했다.
특히 의료진은 현장에서 청소년들의 자해 상처를 치료하고, 서브컬쳐 그룹 청소년들이 즐겨 신는 통굽 신발로 인한 통증을 돌보며, ‘피임 사전’ 등을 배포해 올바른 성 지식을 청소년들의 눈높이에 맞춰 전달하고자 했다.
하지만 현장의 어려움도 컸는데, 옥소윤 한의사는 추나 치료를 받던 가출 청소년이 현장에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강제로 인계되던 순간의 안타까움을 전하며, “단속과 처벌 중심의 행정 속에서 아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던 인프라가 사라지는 것이 가장 우려된다”고 밝혔다.
한의대생으로서 아웃리치 현장에 참여한 황아현 학생보조는 “활동 전에는 소위 ‘지뢰계’라 불리는 청소년들의 외양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는데, 스스로 그들을 타자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또 “화려한 레이스와 높은 힐 뒤에 숨겨진 아이들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니, 그들은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그저 그 나이대의 평범한 중학생들이었으며, 어찌 되었든 오늘을 살아내고 있는 실존 인물이라는 점이 강하게 와 닿았다”고 전했다.

질병 치료를 넘어 위기 포착으로···
‘돌봄적 진료’가 수호한 청소년 건강권
보고회에서는 나무진료소 및 아웃리치를 직접 이용했던 청소년들의 생생한 목소리도 공유됐다. 이용자 B는 후기를 통해 “나무진료소는 단순히 침을 맞는 곳이 아니라, 거리 생활을 하며 뒷전으로 밀려났던 나의 건강을 처음으로 소중하게 대접받는 공간이었다”며, “의료진들의 따뜻한 상담 덕분에 내 몸 상태를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 그것이 다시 삶을 살아갈 힘이 되었다”고 전했다.
청년한의사회는 이번 활동을 통해 위기 여성 청소년의 건강이 삶의 환경과 직결돼 있음을 재확인했다. 이도연 한의사는 “일상적인 돌봄의 공백이 건강의 악화로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질병 치료를 넘어 올바른 건강지식 함양, 생활습관 교정, 진료 도중 상담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위험 상황 포착, 활동가-기관과의 연계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며, 나무진료소·아웃리치의 돌봄적 운영 방식이 위기 청소년의 건강권을 수호하는 핵심이었음을 강조했다.
“위기는 감지 전까지 지긋지긋한 일상일 뿐”
의료와 현장의 유기적 연대
보고회의 전체 토론에서는 의료진과 활동가들이 현장에서 겪은 고찰과 연대의 중요성이 가감 없이 공유됐다. 무영 활동가는 “많은 위기 청소년들에게 매일은 그저 지긋지긋한 일상일 뿐이라, 스스로 위기를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한의 진료는 건강 이야기를 매개로 성착취나 마약 노출 같은 내밀한 위기 상황을 포착해내는 매우 중요한 소통 창구였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보라 활동가는 한의 진료를 통해 성 착취 정황을 파악하고 비로소 대화의 물꼬를 터 관련 지원으로 연결했던 협력 사례를 공유하며, 의료진이 현장의 ‘코디네이터’이자 ‘감지기’ 역할을 수행했음을 강조했다.
김지민 한의사는 “나무 활동가들이 의료 지원이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도록 사회 환경적 결핍을 메워주었기에 지속적인 진료가 가능했다”며 현장 기관과의 밀접한 연계가 의료인의 권위를 내려놓고 청소년에게 다가가는 핵심 동력이었음을 짚었다.
기록으로 남긴 7년, 새로운 연대를 향한 약속
한편 이번 보고회는 단순히 사업의 종료를 알리는 자리가 아니라, 지난 7년간 나무센터와 청년한의사회가 일궈온 ‘돌봄과 연대’의 가치를 기록하고 확산하기 위한 약속의 자리였다.
참석자들은 “위기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속과 훈계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안전한 공간”이라는 점에 깊이 공감했다.
또한 서울시의 결정으로 나무센터라는 물리적 공간은 문을 닫게 됐지만, 현장에서 청소년들의 위기를 가장 먼저 감지하고 그들의 곁을 지켰던 한의사들과 활동가들의 실천은 보고서 발간과 새로운 연대 현장 모색을 통해 지속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