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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9월 29일 (화)

[시선나누기-39] 보이지 않는 경계

[시선나누기-39] 보이지 않는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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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저온 보리한의원장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공연 현장에서 느낀 바를 에세이 형태로 쓴 ‘시선나누기’ 연재를 싣습니다. 문저온 보리한의원장은 자신의 시집 ‘치병소요록’ (治病逍遙錄)을 연극으로 표현한 ‘생존신고요’, ‘모든 사람은 아프다’ 등의 공연에서 한의사가 자침하는 역할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당신의 눈에 어느날 이런 글귀가 들어온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칠 안내문이다. 

<내가 바로 국민배우 시즌8>

시민연극배우 교육생 모집

―연극 관람을 너무 좋아하나요?

―한 번쯤 배우가 되기를 꿈꿨나요?

―연기, 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나요?

―언젠가 무대에 서는 꿈을 꾸셨나요?

―연극에 관심과 열정이 있는 성인 누구나!

시민. 배우. 연기. 그리고 ‘관심’이라는 말과 ‘누구나’라는 말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선다. 이 너그러운 단어들은 흐릿하고 열린 경계로 당신을 맞이한다. 당신은 당신을 짚어본다. 나의 관심은 무엇인가... 내가 눈 둘 데를 찾는 그것. 거기 마음이 함께 가닿는 그것. 


나는 이쪽인가, 저쪽인가?


그리고 당신은 ‘시민연극배우 교육생’이 되기로 한다. 1월부터 11월까지, 매주 월요일 저녁 두 시간을 바치며, 11월에는 발표회를 겸한 공연을 올린다는 거대한 계획에 발을 담근다. 그것까지를 다 헤아리기에는 당신의 상상력이 부족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구체적인 두려움과 부담감이  엄습하지 않으므로. 안내문에는 신청서 작성을 위한 큐알 코드가 첨부되어 있고, ‘면접 후 개별 통보’라는 문구도 있다. 면접...을 신청한다. 이 모든 과정이  단 몇 분 안에 일어날 수 있다. 혹은 몇 주. 그 시간 동안 당신의 심장은 빠르게 뛴다. 가슴이 설렌다. 무모하다...고 느끼며 피식 웃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육박하는 열차처럼 열 달이 흘러간다.


극장 바닥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라는 글귀가 비춰지고 있다. 연극의 제목이다.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무대. 글자의 한가운데를 칼로 베듯 지나는 흰 선이 있다. 저 한 줄로 인해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게 된다. 문자로만 된 ‘보이지 않는 경계’와 ‘보이지 않는 경계’는 다르다. 그 뜻을 생각하게 만드는 문자와는 다르게, 그 위에 그어진 선명한 저 줄은 그 자체로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경계선이 되며,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경계’를 부정하는  의미로까지 나아간다. 나는 이쪽인가, 저쪽인가. 혹은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경계심 그 자체인가. 색색의 조명과 더불어 문자이미지가 주는 맛을 천천히 음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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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은 80분 동안 가열차게 전개된다. 무대에 동시에 등장한 배우들은 한순간도 무대를 벗어나지 않고 극 전체를 지탱한다. ‘열두 명의 성난 사람들’이라는 원작을 각색한 연극은 여덟 명의 배심원을 무대에 세우고 단출한 육면체 나무 의자로 배우들의 동선을 바꾸어 가면서 80분 내내 탁구공처럼 대사를 쏟아내게 한다. 살인사건을 심판하는 배심원들은 어린 소년부터 귀부인, 가난한 노파, 소심한 중년남자와 지식인 여성 등 다양한 캐릭터로 자기주장을 펼친다.


문제는 이 심판이 만장일치여야 한다는 것. 재판 과정에서 충분히 증명되었다고 여겨지는 사건을 두고, 그러나 오직 한 사람의 배심원이 그 ‘충분한 증명’에 대해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그것은 말 그대로 충분한가? 증거라는 것은 말 그대로 믿을 만한 것인가? 혹여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한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인데 일말의 의혹이라도 남기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의 믿음은 얼마나 근거 있나?


만장일치를 위해 배심원들은 의견을 피력하고 유죄 찬성과 반대를 투표한다. 처음의 7대1은 점점 흔들리기 시작한다. 어린 소년만이 반대하던 초반의 분위기는 배심원 각자가 살아온 인생을 토로하고 세계관을 피력하면서 분노와 악다구니로 범벅된다. 우리가 본 것은 얼마나 정확한가. 우리가 들은 것은 얼마나 확실한가. 우리의 믿음은 얼마나 근거 있나. 우리는 이미 누군가를 적대시하고 있고, 이미 피로하며, 이제까지 믿어온 것을 이제 와서 바꿀 여력이 없다. 세상은 뻔하며,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그러하며, 다들 그렇다고 하는 것에 손드는 것이 다수에게 좋다. 나에게도 손쉽다.


칼부림으로까지 치달은 무대는 소년 배심원의 차분한 논리에 말미암아 차근차근 정리된다. 배심원들은 각자 고집하던 주장을 꺾을 수밖에 없는 어떤 지점을 맞닥뜨리며 절대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경계를 넘는다. 7대1은 1대7로 바뀌고, 만장일치여야 한다는 대전제 하의 인간들은 자신의 치부까지 쏟아낸 허탈과 스스로를 설득한 평화로 새 국면을 맞이한다. 자신을 주장하는 논리와 자신이 정한 경계를 뒤집을 수 있는 인간의 훌륭함이 거기 함께 있다.


‘관심’과 ‘꿈’을 떠올렸던 한순간


“다들 초보예요. 열 달 연습했죠. 네, 완전 초보들이 연습해서 여기까지 온 거죠. 일주일에 하루 하다가 막바지에는 이틀도 하고 사흘도 하고.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특히 소년 배심원 저 친구요. 아뇨, 여자예요. 성별을 지정한 건 아니고요. 원작에 소년이라고 나와서 저 친구가 남자아이처럼 차려입은 거예요. 목청이요? 연습할 때 제가 말해요. 에너지를 크게 가지라고. 제일 뒷줄에 앉은 할아버지도 들을 수 있을 만큼 대사를 말하라고. 기분 좋죠. 다들 너무 잘해줬어요. 잠시라도 무대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요. 80분을 쉬지 않고 같이해야 해요. 주고받는 리듬도 좋아야 하고요. 칭찬을 많이 해줄 거예요. 저요? 저는 1기예요. 2기부터 연출을 맡았죠. 아뇨, 그전엔 해 본 적 없어요. 저희를 가르치신 극단 연출께서 ‘너희들 힘으로 서야 한다’ 하시면서 연출을 맡기셨어요.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됐죠. 네, 기쁩니다. 우리 배우들 너무 잘했어요.”


 

벅차게 무대를 바라보는 연출가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도 처음 멈춰서서 안내문을 읽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관심’과 ‘꿈’을 떠올린 한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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