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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17일 (수)

[시선나누기-23] 인도 방랑

[시선나누기-23] 인도 방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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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저온 보리한의원장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공연 현장에서 느낀 바를 에세이 형태로 쓴 ‘시선나누기’ 연재를 싣습니다. 문저온 보리한의원장은 자신의 시집 ‘치병소요록’ (治病逍遙錄)을 연극으로 표현한 ‘생존신고요’, ‘모든 사람은 아프다’ 등의 공연에서 한의사가 자침하는 역할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선생이 휘적휘적 걸어 들어왔다. 선생의 등 뒤로 봄날의 환한 햇살이 보인다. 건네는 검은 비닐봉지 안에는 세상에나, 주황빛 꽃이 한가득 들어있다. 지금 막 조리개로 물을 뿌린 듯 꽃잎 사이사이 물방울들이 고여 빛난다. 

“오는 길에 요 앞 시장에서 샀어. 꽃이 이쁘더라구.” 선생이 무심한 듯이 말했다. 비닐봉지에서 화분을 꺼내니 이름이 적혀 있다. 베고니아. 검은 사인펜으로 이름을 휘갈겨 써준 꽃집 주인의 덤덤한 친절에 웃음이 났다.

선생은 가는 곳마다 시장을 둘러보는 것을 즐긴다고 했다. 좋은 구경이라고, 물건 구경, 사람 구경이 재미난다고 했다.

자리에 앉는 선생의 얼굴이 달라졌다. 공연 때는 쓰지 않는 안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얼굴은 얼핏 다른 사람 같은 기운을 풍겼다. 콧수염과 턱수염이 무성하고 희다. 


마임은 무엇이고, 인간은 무엇인가?


“인도를 좀 다녀왔어요.” 십 년도 더 전에 한 번 다녀오고 이번이 두 번째 인도여행이라고 했다. 혼자서 그저 이리 걷고 저리 걸어 돌아다녔다고. 백팩 하나를 달랑 메고 사람에 쓸리면서 길거리를 정처 없이 다녔다고 했다. 

그렇게 다니다 보면 길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그예 시간도 잊어버리게 된다고. 목적도 없이 걷고 또 걷다 보면 나중에는 모든 게 그러려니 싶어진다고. 먹거리가 부실하고 잠자리가 불편하고 하도 걸어 다녀서인지 다녀와서는 발바닥이 저리고 감각이 둔하다고 했다. 춘천에서 한의원을 다니며 침을 맞고 있다고.

얼굴은 거칠고 낯설었는데 무언가 잔잔한 기운이 선생의 몸을 채우고 있는 듯했다. 그다음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그저 지내다 보니 기분이 좀 이상해. 모든 게 물 흘러가듯이 흐르니까 뭔가 부닥치는 일이 없는 거야. 아, 이래서 공연을 어떻게 하지? 내 공연은 부딪치고 저항하는 데서 나오는 건데.”

그 말을 듣고 나는 머릿속으로 선생의 무대를 떠올렸다. 얼굴 근육 하나하나까지, 온몸을 다 써서 뒤틀고 웅크리고 뻗치고 구르고 웃고 울고, 고통과 희노애락이 파도처럼 다녀가던 불같고 물 같던 무대를. 

스스로에게 내어 준 휴가 같은 인도여행에서 선생은 다시 한 고비를 마주하고 돌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예술은 무엇인지, 무대는 무엇인지, 마임은 무엇이고, 인간은 무엇인지. 그는 내가 알지 못하는 깊이로 사유하고 있을 것이었다. 선생에게서 다시 연락이 온 것은 두 달이 조금 지나서였다. 

 

문저온원장님2.jpg

 


“너도 같이 가서 막걸리 한 잔 해야지?” 


“초대합니다.” ‘춘천현안라이브퍼포먼스’라는 부제가 붙은 공연 포스터였다. 포스터를 보는 순간 역시 선생답다는 생각과 함께 내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현안, 라이브, 퍼포먼스라니. 선생은 지금 여기를 고민하는 무대를 만들고 계신 거였다.

“지난 5년 동안 허허벌판 중도를 걸었던 그리고 땅 위에 엎드려 예술 행위를 했던 모든 것을 모아 한 편의 공연을 만들었습니다.”

이 문장에는 고향 춘천 중도를 생각하는 선생의 걱정과 사랑이 스며있다. 5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고 있다. 그 땅을 걷고, 엎드렸던 선생의 행위가 들어 있다. 시간과 공간을 몸으로 겪어낸 사람이 이제 씨줄과 날줄로 얽어 만드는 공연이 들어있다. 그리고 그의 단단한 자부심이 녹아 있다. 나는 선생에게 답장을 보낸다.

“멋집니다! 포스터 속 저 아이의 눈빛이 한몫을 하네요.”

포스터 속 아이는 선생의 외손자라는 답장이 온다. 눈매가 다부진 아이는 ‘모든 사람은 아프다’ 공연장을 찾아와서 맨 앞줄에 앉아 무대를 지켜보던 그 아이다. 배우와 스태프들이 공연을 마치고 이동할 때 할아버지를 따라 뒤풀이 자리에 가고 싶다고 매달리던 그 아이다.  

“너도 같이 가서 막걸리 한 잔 해야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선생이 농담을 건네던 그 아이다. 아이는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의 마임 무대를 지켜보며 자랐다. 할아버지의 몸과 정신이 회오리치는 무대를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밝으면 밝은 대로 보고 느꼈을 것이다. 예술이 그의 인생을 함께 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일생을 든든히 받치는 땅이 될 것이다.


“나 스스로 그것들을 ‘해’ 보았다” 


나는 검정 비닐봉지 들고 걸어오시던 선생을 떠올린다. 주황빛 분홍빛으로 빛나던 베고니아를 떠올린다. “이제 공연을 어떻게 하지?”라던 선생의 낮은 탄식을 떠올린다. 고민과 속마음을 스스럼없이 꺼내 보이던 한 어른의 모습을, 함께 작품을 했던 사람에게 동료애와 존중을 보여주시던 한 예술가를 떠올린다. 

고민이 무색하게 그는 여전히 혹은 다시, 부딪치고 저항하고 길을 찾는 무대를 벼리고 계셨구나. 중도의 흙바닥에서 펼쳐질 선생의 마임을 그려보는 내 눈앞에 햇볕이 따갑고 마른 흙먼지가 인다. 그러나 한 무리의 예술가들은 그들의 기운과 오월의 생명력으로 찬란할 것이다.

 

후지와라 신야가 쓴 ‘인도방랑’을 펼친다. 첫 페이지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되고 끝난다. ‘걸을 때마다 내가 보였다. 내가 배워 온 세상의 허위가 보였다.’ ‘나는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 스스로 그것들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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