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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28일 (일)

인류세의 한의학 <16>

인류세의 한의학 <16>

생명의 관계 III: 환경 없는 만물(萬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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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교수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한의원의 인류학 : 몸-마음-자연을 연결하는 사유와 치유> 저자


인류세라는 시대


시대(時代)는 “어떤 기준에 의하여 구분한 일정한 기간”의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시대를 구분하는 “어떤 기준”은 하나가 아니다. 고려시대, 조선시대와 같이 연속된 왕조체제를 기준으로 시대를 나눌 수도 있고, 또한 고대, 중세, 근대와 같이 현재와의 거리를 그 기준으로 삼아 시대를 나눌 수도 있다. 시대를 관통한 특징적 경향성을 통해 시대를 명명할 수도 있다. 봉건 시대, 자본주의 시대, 제국주의 시대 등이 이 시대 구분에 대한 예시들이다. 지질학에서는 지층에서 주로 발견되는 화석을 통해 시대를 구분하여 시대를 나눈다. 지구과학 시간에 들었던 고생대, 쥐라기, 백악기, 홀로세 등이 이 지질시대의 이름들이다. 


<인류세의 한의학>에서 사용하고 있는 시대명인 인류세는, 앞에 나열한 시대 구분 중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접점에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대기화학자인 파울 크루첸(Paul Crutzen)에 의해 2000년대 초에 제안되었을 때, 인류세는 지질시대라기 보다는 “시대를 관통하는 특징적 경향성”을 강조하는 시대명의 성격이 강했다. 즉, 인류의 영향력이, 기후변화와 같은 지구의 역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을 드러내는 명명으로서, 인류세는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인문사회과학에서도 중요한 용어로 회자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최근에는 인류세를 공식적인 지질시대로 지정하기 위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1). 화석연료가 탈 때 생기는 탄소 입자, 미세플라스틱 등, 인간 활동의 잔여물들이 인류세의 실제 증거를 땅에 새기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세는 상이한 시대 구분의 기준들이 만나는 시대다. 상관없을 것 같았던 자연사(natural history)와 인류사(human history)가 얽히고 있는 시대다2). 46억 년의 지구의 역사에 비하면 아주 최근에 탄생한 인류가, 지구의 역사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기후위기는 인류세의 얽힘을 예시하는 지구-인류사적 현상이다. 인류세 시대에 인간의 생각과 행동은 어느 시대보다 중요하다. 인류사뿐만 아니라 자연사에도 영향을 주며,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의 생존과 멸종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세는 특히, 어떤 생각의 방향성을 담지한 말들을 살펴보고, 그 말들이 규정하는 인간 행동의 제한들을 돌아보기를 요구받는 시대다. 이번에 세 번의 글로 논의하고 있는 “생명”이라는 말도 인류세에 반드시 고찰해 보아야 할 말이다.


시대의 말들


DNA 구조가 밝혀진 1950년대 이후, 생명의 이해는 염기서열로 환원되는 경향을 보인다. 염기서열화된 생명의 시대에 생명의 의미는 생화학적 기호로 코드화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경향은 개별체를 강조하는 생명 이해의 방식을 강화한다. 염기서열의 차이가 개체를 차별화하는 기준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최근 팬데믹의 와중에 바이러스의 변이를 구분하는 방식은 염기서열의 차이가 존재의 차이가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각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염기서열화된 생명(生命)의 이해에서 소명, 소임, 품부 받음을 뜻하는 명(命)자는 더이상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염기의 순서로 보는 생명에 대한 이해는 성“명”(性命)론으로 시작하는 동의수세보원의 생명에 대한 이해와 차이가 있다. 인간 존재를 천인성명(天人性命)의 체계로 읽는 것과 ACGT 염기의 결합 순서로 보는 것은 차이가 작지 않다.


인간이 한 “시대(時代)”를 산다는 것은 그 시대를 관통하는 생각의 어떤 경향성에 심대한 영향을 받으며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들을 담은 말들을 일상에서 사용하며 그 경향성에 맞닿은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연시되는 시대의 담론들도 유통기한이 있다. 전환기가 되면 새로운 말들이 생겨나고, 새로운 생각이 드러난다. 인류세와 같은 전환기에 생각을 뒤집어 보는 것은 중요하다. 동아시아의 사유를 담지한 말들을 살펴보면 뒤집어 보기를 가능하게 하는 언어들이 발견된다. 만물도 그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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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萬物)


만물이라는 말보다 포괄적인 말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 다 들어있다. 인간, 고양이, 맥문동, 말미잘 등 지금 우리의 상식에서 생각하는 생명을 가진 것들이 모두 만물이다. 또한, 바위, 바닷물, 흙, 공기 등 무생물도 포함된다. 사전적 의미도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만물 속 인간의 위치다. 동아시아의 만물에서 인간은 특별히 돌출되는 존재가 아니다. 만약, 만물에 만 종의 존재들이 있다면 인간은 만 종 중 하나다. 물론 동아시아에서도 인간을 다른 존재에 비해 존귀하게 보는 시선들이 있어 왔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을 중심에 두는 생각의 방식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환경이라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이전 연재글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인류세의 한의학> <5> “환경위기와 천인상응”) 환경(environment)은 번역어다. 일본에서 19세기 말에 번역이 되었다. 환경은 말 그대로 싸고 있는(environ) 지대를 말하고, 그 영역에 의해 감싸져 있는 것은 인간이고, 인간의 사회다. 환경은 인간을 중심에 두는 사고를 바로 드러낸다. 인간이 중심에 있으면서, 또한 그 외의 생물과 무생물들과 인간의 영역 사이에는 분리가 존재한다. 동아시아의 만물에는 이러한 경계가 없다. 지대를 나누어서, 여기는 인간의 영역, 저기는 비인간의 영역으로 보는 분리의 생각의 습벽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동아시아의 세계 이해에서 만물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인류학자들의 최근 연구는 근대 서구의 존재 이해뿐만 아니라 비서구의 존재 이해를 논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동안의 다양한 인류학 논의를 통해, 지금까지 인류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네 가지로 분류하는 기념비적 작업을 한 필리프 데스콜라(Philippe Descola 2013)는 동아시아의 존재 이해 방식을 아날로지즘(analogism)이라고 명명한다3). 존재들을 관통하는 음양, 사시, 육기 등의 이치가 (혹은 아날로지가) 세계의 만물들을 빽빽한 연결망으로 묶고 있는 것이 동아시아 아날로지즘의 세계다. 여기에 환경과 같이 싸고 있는 지대는 없다. 싸여져 있는 인간만의 영역도 없다.


환경은 인간을 중심에 둔 생각에 바탕한다. 인간과 사회를 감싸고 있는 것이 환경이다. 여기에는 인간과 비인간의 분리가 있다. 이전 연재글에서 이야기 한 인간과 치킨용 닭의 관계는(<인류세의 한의학> <15> “생명의 관계II: 음양, 관계의 생명론” 참조), 이러한 인간의 영역과 인간 아닌 것들의 영역을 나누는 생각의 습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간의 관점과 이득을 기준으로 인간 아닌 존재를 방사형으로 나열하는 생명 배치의 방식과 연결된다.


“환경없는 만물”에는 개체에 대한 규정 보다, 생명 현상을 앞에 두는 생각의 방식이 깔려있다. 개별적 개체는 쉽게 대상이 된다. 대상의 개념에는, 그 대상의 상대격인 주체가 상정되어 있다. 주객의 방식과 달리, 만물은 만 개의 개별 대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개별 대상이 아닌 연결되어 있는 생명의 연결망이 만물이다. 바오밥나무, 개코원숭이, 동백꽃 자체 보다, 관계를 앞세우는 것은, 생명들을 관통하는 원리를 먼저 보게 한다. 공유된 원리 속에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내경』에서 사시음양을 만물의 근본으로(四時陰陽者萬物之根本) 본 것에는 이러한 생각의 방식이 내재해 있다. 만물이 공유하는 생명됨의 양상들(사시음양과 같은)이 존재들을 연결망 속에 결속시킨다. 만물은 경계 없는 빽빽한 연결망 속 상호관계되어 있는 생명들의 이해를 드러낸다.


1) 오철우(2022) “인류세를 대표하는 퇴적층” (한겨레신문 2022) 참조.

2) 이러한 내용을 위해 차크라바티(Dipesh Chakrabarty 2021)의 <The Climate of History in a Planetary Age>를 참조하였다. 시카고대 역사학과 교수인 차크라바티는, 최근 인류세의 문제를 역사학의 핵심 주제로서 논의하고 있다. 

3) Philippe Descola(2013) <Beyond Nature and Culture>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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