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항일투쟁에 직접 뛰어들었다. 그 과정에서 일제의 탄압 속 형무소에 투옥된 독립운동가들도 많았다. ‘1679’라는 수감번호와 함께 투옥된 한의사 독립운동가 신광열(개명 전 신현표) 선생도 그중 하나다.
◇독립운동 가문의 자손
자생한방병원 설립자 신준식 박사의 선친이자 독립운동가 신홍균 선생의 조카인 신광열은 1903년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났다. 9살이 되던 해 그는 숙부 신홍균을 따라 만주로 향했고 그 곳에서 일제가 자행한 침략의 역사를 보고 자랐다. 성인이 된 이후 1925년에는 제일 정몽학교의 훈도(교원)로 재임했다. 당시 정몽학교는 다수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으며 교내 모든 교사들 또한 독립운동가였다.
독립운동가 육성에 힘을 쏟았던 그는 1930년 간도에서 3·1절 11주년을 맞아 대대적으로 일어난 만세 시위를 이끌었다. 거리로 뛰쳐나온 학생들은 일본 조계지 철조망 앞에 서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전개했다. 이를 알아챈 일본총영사관 기병대는 해산을 요구하며 무력 진압을 시작했다. 당시 저항운동의 세를 확장하기 위해 전단을 살포하는 등 시위 주동자로 지목 받았던 신광열은 현장에서 경찰이 휘두른 경찰도에 맞아 옆구리에 30cm나 되는 큰 자상을 입었다. 이후 그는 간도일본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돼 경성 서대문 형무소로 수감됐다.
당시 그를 포함한 69명의 독립운동가들이 경성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됐으며 이는 중외일보 1930년 4월 26일 자 기사에 실리기도 했다.
서대문 형무소는 독립운동가들을 구금하고 탄압했던 고난과 투쟁의 장소로 일부는 고문과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이처럼 암울한 수감생활 속에서도 신광열은 독립운동의 의지를 잃지 않았다. 그는 독립운동 가문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의사 시험 자격을 여러 번 박탈당했지만 석방 후 당당하게 의사 시험에 합격했다. 많은 차별과 우여곡절 끝에 의사가 된 그는 “의술이 아닌 인술(仁術)을 펼친다”는 신념으로 만주에 광생의원을 개업했다. 그는 8년간 의원을 운영, 비밀리에 부상을 입은 독립운동가들의 치료를 도우며 약자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 이후인 1942년에는 신홍균을 따라 독립운동의 산실인 만주 목단강시 동승촌으로 향했다. 그 곳에서 신광열은 솜, 옷 등 군수품과 독립운동 자금을 항일연합군부대에 조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일제는 강제 봉쇄정책으로 목단강 주변의 군수물자 보급을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도움은 독립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중외일보 1930년 4월 26일자 기사
◇정치공작대 가입
그리고 77년 전인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광복이 찾아왔다. 그는 감개무량하다고 말하면서도 “사십여 년간 왜놈의 압박 속에서 신음하다가 해방이 왔으나 오히려 미래에 잔존한 경구지심(驚懼之心)은 시일을 요하고 있다”며 해방 후의 앞날을 걱정했다.
특히 인권침해는 물론 갖은 만행을 벌이고 있었던 소련군에 대한 깊은 적개심은 그의 독립 의지를 다시금 불태웠다. 당시 신북청인민종합병원 원장으로 근무했던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1945년 12월에 남한으로 향했다. 이어 독립운동가 신익희 선생이 주도하던 정치공작대에 가입했다. 정치공작대는 임시정부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만든 전위대로 철저한 비밀 점조직 방식으로 운영돼 미군조차 그 존재를 알지 못했다. 신광열은 함경도 책임위원을 맡아 북청으로 파견됐고 남다른 애국심과 함께 구국 활동을 펼쳤다.
그러던 어느 날, 신북청 보안대원 3명의 갑작스런 가택수색에 신분이 노출되며 신광열은 또 한 차례 투옥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몸수색 중 비밀문서가 발각돼 투옥뿐만 아니라 사형을 면하기 어려웠다. 그때 그는 기지를 발휘해 의약품 광고지를 비밀문서처럼 감추는 행동을 했고 보안대원들이 이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 틈을 타 집을 빠져나왔다.
신광열 선생이 작성한 ‘월남유서’
◇민족의학 부흥 토대 쌓아
피난민에 섞여 구사일생으로 서울에 돌아온 그는 더 이상의 임무 수행이 어려워지자 국가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고민 끝에 신광열이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일제의 한의학 말살정책 속 잊혀질 위기에 처한 한의학을 재정립하는 것이었다. 선대부터 이어져 온 한의사 가문에서 성장한 신광열은 민족의학인 한의학을 되살리기 위해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고 1955년에 한의사 시험을 합격했다.
한방과 양방의 의사자격을 모두 취득한 그는 아산시 도고역 앞에 청파 한의원을 개원한 뒤 의료시설이 낙후된 마을로 17번이나 이사를 다니며 지역의료 활동을 펼쳤다. 그가 작고한 1980년까지 의료활동을 멈추지 않았으며 한의학의 과학적 검증과 치료법 표준화 정립에 힘써 민족의학 부흥의 토대를 쌓았다.
이처럼 파란만장했던 그의 일대기는 최근에서야 ‘월남유서(越南遺書)’를 통해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월남유서는 북한에 있던 가족들이 고문으로 죽게 됐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슬픔을 이기지 못해 작성한 유서다. 그의 유서는 미국중앙정보부(CIA) 보고서와 일치하는 기록이 발견되면서 근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귀중한 사료의 가치를 갖게 됐다.
실제로 월남유서는 집안 어른인 신홍균 선생이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신흘(申屹), 신굴(申矻)이라는 가명으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됐다. 그 덕분에 신홍균이 독립군에서 한의군의관으로 활약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2020년 11월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받았다.
그리고 2022년 광복절, 신광열도 드디어 영광스러운 독립유공자 서훈(대통령표창)을 받게 됐다. 광복을 이끌었던 숨은 영웅 중 하나였던 그가 정부로부터 자신의 업적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신광열의 표창은 그의 장남인 신준식 박사와 차남 신민식 박사(잠실자생한방병원 병원장)에게 전달됐다.
그의 숭고한 독립운동 정신은 약자에 대한 연민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인술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이는 자생한방병원의 설립 가치로 오늘날 많은 한의사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