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8년 『朝鮮醫學界』 제4호에 기록된 醫學講習所 11회 기념식 장면
1918년 『朝鮮醫學界』 제4호에는 醫學講習所 11회 기념식 모습을 스케치하고 있다. 醫學講習所는 1908년 洪鍾哲에 의해 설립된 한의학 교육기관이다. 洪鍾哲(1852~ 1919)은 號가 慕景으로 서울에 거주하면서 구한말에서 일제시대 초기까지 40여년간 名醫로 이름을 날린 醫家이다.
그는 일찍이 12세부터 부모님의 권유로 한의학에 뜻을 두기 시작하여 『景岳全書』를 많이 연구하여 호를 張景岳(1563~1640)을 사모한다는 의미인 ‘慕景’이라고 하기까지 하였다.
『朝鮮醫學界』 제4호에는 두쪽에 걸쳐서 의학강습소 11회 기념식을 기술하고 있다. 아래에 그 번역문의 일부를 게재한다.
“京城府의 慶雲洞 四番地에 있는 醫學講習所에서는 지난달(5월) 20일 하오 3시부터 본 강습소의 넓은 강당에서 제11회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내빈은 醫師, 醫生 및 사회의 신사, 신문기자 등 무려 50여 명이었다. 소장인 홍종철 선의 式辭가 있은 다음에 朝鮮醫學界社의 부사장인 趙炳瑾 선생이 내빈을 대표해서 祝辭를 하여 다음과 같이 하였다. ‘모든 분들께서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우리 한방의업계의 유일무이한 본 강습소가 고고의 一聲으로 처음 설치된지가 이미 11년을 지났으되 저간에 소장 홍종철 선생은 백절불굴의 용감함으로 천가지 만가지 어려움을 극복해가며 나날이 발전하여 옴은 우리들이 행복으로 알고 있는 바 입니다. 이 강습소를 인생의 연령에 비교해본다면 11세의 아동과 같은 것인즉 더욱 보호하여 선량한 방면으로 지도할 시기입니다. 오직 원하건데 모든 분들은 마음들을 모아 성을 이루고 모두의 입김으로 금속을 녹이고자 하는 정성의 힘으로 더욱 전진할 것을 바랍니다.’ 이에 내빈들은 일제히 박수갈채를 보내고 이때부터 한 팔뚝의 힘이라도 도와주리고 결심한 듯하였다. 이 강습소의 졸업은 6회에 이르렀고 졸업생수는 제1회 17인, 제2회 14인, 제3회 12인, 제4회 33인, 제5회 36인, 제6회 37인 등 모두 159인이고, 그 가운데 醫生免許를 받은 사람은 52인이다.”(번역은 필자가 함)
이 글을 통해 당시 본 강습소를 거쳐간 많은 학생들이 醫生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유일의 한의학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의 바로 다음에는 ‘張醫生의 美擧’라는 제목으로 醫生 張煥善 선생의 미담을 기록하고 있다.
“京城府 慶雲洞에 있는 朝鮮 唯一의 醫學講習所에서 지난달 20일에 이 강습소 제11회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할 때에 朝鮮醫學界社 顧問醫生인 張煥善 선생이 이 紀念式에 참여하면서 소장인 洪鍾哲 선생의 苦心熱誠함에 자못 同情을 表하여 金二圓을 내어 當日 茶菓費에 補用케 하였다.”
의생 장환선 선생이 홍종철 소장의 노력에 감복하여 찬조금을 내었다는 기록이다. 홍종철 선생의 노력을 찬양한 것은 본래 본 강습소가 한의사 단체인 대한의사회 소속으로 운영되다가 대한의사회가 해산되면서 홍종철 선생이 자신의 집으로 이전하여 사재를 털어 운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 11주년 행사가 있은 다음해인 1919년에 홍종철 선생이 서거하면서 본 강습소는 문을 닫게 되고 만다. 그 후에 한의사 단체인 동서의학연구회가 1922년에 창립돼 부속의학강습원을 설치하여 한의학 교육의 명맥을 잇다가 경기도립의생강습소가 만들어져 1938년부터 경기도청 강당을 빌려 강의를 시작하여 매년 50명씩 6년간 300명을 양성하였다.
이 때 배출된 한의사들은 해방 후 한의학교육의 초석이 되었다. 홍종철 선생의 노력이 현대까지 결실로 이어진 셈이다.
<- 1918년 조선의학계 제4호에 나오는 의학강습소 개소 11주년 기념식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