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난기 八家一志會의 활동
한의학교육의 기초를 다진 사람들
‘八家一志會’라는 모임에 대해서는 李鍾馨(1929〜2008)이 처음으로 소개하였다. 李鍾馨은 구한말에서부터 일제시대 전시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스승인 晴崗 金永勳(1882〜1974) 선생에게서 소상히 듣고 정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1977년 『한국현대문화사대계』의 안에 포함된 그의 저작 「한국동의학사韓國東醫學史」는 스승이 서거한 3년 후 완성된 연구로서 스승으로부터 전해들은 생생한 사실들을 담고 있다. ‘八家一志會’는 스승으로부터 전해들은 생생한 역사적 사실의 하나이다.
李鍾馨에 따르면 ‘八家一志會’는 趙炳瑾, 金永勳(서울), 田光王(黃海), 張起學(平安), 朴爀東(江原), 李喜豊(忠淸), 徐丙琳(大邱), 林炳厚(東來) 등 8인의 한의사를 구성인으로 한다. 이 모임은 1905년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의학을 정책적으로 배제하려고 하는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경향각지의 뜻있는 젊은 한의사들이 뜻을 모아 조직되었다. 이들은 1909년 典醫들을 움직여 한의사 단체인 大韓醫士會를 만들었다. 그러나 한일합방이 된 이후에 자진해산했다. 실제로 ‘八家一志會’라는 이름으로는 단 5년간 활동한 셈이지만 이들은 이 모임을 바탕으로 일제시대 전시기에 걸쳐 한의학 부흥을 위한 활동을 계속 펼쳐나갔다.
조병근은 동서의학강습소를 1908년 1월 10일 홍종철(洪鍾哲), 이해성(李海盛), 조병근(趙炳瑾) 등과 함께 경성 중부에 있는 사동(寺洞)의 8통 2호에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해방후에는 동양의학회에서 김영훈, 홍재호, 신채성 등과 함께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어 적극활동하면서 민족의학의 부흥에 노력하였다.
김영훈은 동제의학교에 도교수가 된 이후로 일제시대 전시기 한의학의 부흥을 위한 노력을 하였고, 해방 이후에도 한의학의 제도화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한의사제도를 만들기 위해 부산 피난시절 방주혁, 박성수 등과 벌인 활동은 청사를 빛내는 것이다. 해방 후에도 그는 한의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이었다.
전광옥은 김영훈과 함께 동제의학교 도교수를 역임한 인물로서 의학강습소를 통해 함경북도, 전주, 함흥 등 전국을 순회하면서 의생지망자들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1915년 전국적 학술단체인 全鮮醫會가 만들어진 이후 東西醫學硏究會 등 단체에서도 講師로 활동하면서 한의학교육에 힘썼다.
서병림은 1901년에는 서울에 개원을 하여 경향각지의 환자를 돌보기 시작하였다. 그는 시들어가는 한의학을 되살리고 그 명맥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후진의 양성이 절실하다고 깨닫고 한의학교육에 투신하였다. 1912년 조선의사연찬회부속 강습소장이 된 것도 이러한 그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1913년에도 사립의학강습소의 강사가 되어 후진의 양성에 힘썼고, 의학강구회(醫學講究會)의 부회장으로 활약하였다.
안타깝게도 張起學, 朴爀東, 李喜豊, 林炳厚 등 인물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를 통해서 조명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앞으로 추가적 자료가 발굴되어 밝혀질 것을 기대한다. 장기학과 이희풍 등은 강습소에서 강사로 활동했다는 일부 기록이 보일 뿐이다.
八家一志會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시절 이들은 대한의사회라는 한의사 단체를 만들어낸 공적이 남아있지만 이들의 활동은 일제시대 전 시기에 걸쳐 교육활동이 중심이었음이 분명해진다. 특히 조병근, 김영훈, 전광옥, 서병림, 장기학, 이희풍의 경우 교육활동이 두드러진다.
이들이 교육활동을 중심으로 삼은 것은 한의학의 정치적 활동도 중요하지만 후진 양성을 지속적으로 해낼 수 있는 교육기관의 설립이 가장 중요한 현안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 팔가일지회의 중심인물 김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