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醫林』의 창간호를 보니…
“杏林界의 첫아이를 잘 기르자”
“本誌는 醫林이라 題하여 오늘 呱呱의 聲을 올렸다. 우리가 悠久한 歷史와 빛나는 文化를 가짐과 동시에 우리의 生活에 있어 重要한 部分을 차지한 醫學亦是 오랜 歷史를 지녔으니 우리 文化와 함께 發達進步한 것은 勿論이다. 우리 歷史의 수레바퀴가 消長과 隆替를 되풀이하는 중에서도 恒常 前進을 게을리하지 아니한 바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醫術도 波蘭과 曲折을 거듭하면서도 꾸준히 成長發達하기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法則에 의한 發達을 거듭한 今日의 科學은 마침내 人類生活에 變革을 초래하였고 우리 醫學에 커다란 變革을 招來하였으니 즉 解剖學을 中心으로 急速한 發達을 보는 西洋醫學은 治療學을 中心으로 한 우리 한방의학의 領域에 浸透肉薄하여온 것이다. 이는 우리 한방의학이 오랜 歷史와 玄妙 또는 深幽한 舊殼 속에서 安眠하여 國民의 數的 支持와 愛顧를 받고 있다는 甘夢에 잠겨 있는 동안에 近代科學으로 武裝한 西洋醫學이 이 深幽, 玄妙의 地帶를 席捲하여 온 것이다.……그러므로 우리 한방의학의 學說이나 理論的 發展은 勿論, 技術面의 向上과 아울러 이를 一般大衆에 理解普及을 위한 發表機關이 없었고 玄妙難澁한만치 一般大衆을 對象으로 하는 新聞雜誌 등 一般刊行物에서 取扱하는 不肯하여 온 것은 斯界에 從事하는 人事의 共通된 悲哀였던 것이다. ……內容이 貧弱하나마 이것이 우리 同人의 努力의 結晶이니만치 滿天下의 愛讀者와 斯界先輩와 同志의 꾸준한 聲援과 鞭撻과 叱正 중에 자라나기를 庶幾한다.”
위의 글은 1954년 11월1일에 발간된 『醫林』의 창간호에 나오는 발행인 裵元植의 창간사이다. 한국전쟁이 끝난지 채 1년밖에 안된 시점에 이와 같은 잡지를 창간하여 긴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이 창간호는 책 표지까지 포함해서 모두 16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15쪽에 있는 편집후기에는 “비록 醫林의 誕生이라 하지만 워낙 産母가 虛弱하고 또한 初産인지라 難産이었고 難産이었으니 만치 영兒 또한 건강치 못한 것을 自認한다. 그러나 잘생겼던 못생겼던 낳은 이상에는 無病하게 命도 길게 길러야 할 것은 물론이다. 우리 杏林界에 있어서 이것이 첫아이니 비록 못생겼지만 미워할 생각은 없을 것이다”라고 부족한 점을 자인하고 앞으로 분발할 것을 스스로 격려하고 있다.
의림의 창간을 허약한 산모의 출산에 비유하고 있는 것도 적절하지만 어렵게 얻은 못생긴 첫아이에 비유하는 것은 매우 재치가 있는 것 같다. 잘생겼던 못생겼던 이것은 우리의 첫 번째로 낳은 자식이기에 잘 기르자는 것이다.
창간호는 申翼熙와 朴性洙의 축사와 각종 논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논문의 제목들을 통해 앞으로 학술잡지의 나아갈 방향의 가닥이 느껴진다. 裵元植의 ‘한방의학개론’, 이창빈의 ‘臟腑學(病理, 解剖)講義’, 松山의 ‘內科學(雜病)新講義’, 金斗明의 ‘傷寒門講義’, 보건부 J.Y.S의 ‘漢藥物效用’, 본지편집부의 ‘한의사국가시험문제와 해답’, 백태형의 ‘한의학에 대한 고찰’, 진상길의 ‘기존 한약종상과 국가시험’, 김래성의 ‘한의학에 대한 관심’, 본지특별공개라는 제목의 ‘중국역대대방가의 비방공개’, 본지편집부의 ‘폐결핵(폐병)한방신요법’ 등이 그 내용이다. 이어서 ‘한, 양약종상매상허규정’, ‘제4회 한의사국가시험합격자’, ‘한약품시세일람표’로 이어진다.
아직 ‘한의사협보’(한의신문의 전신)가 나오기 전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본 학술잡지가 한의계의 기관지로서의 역할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당시 서울시한의사회장 朴性洙는 ‘杏林의 指針이 되라’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回顧컨대 우리 杏林界에는 碩學과 師表가 적고, 硏究와 發表의 機關이 아직 없음으로 學術에 대한 呼吸이 서로 通하지 않으며 各自의 偏見과 獨善에서 그 貴重한 經驗과 許多한 秘方과 浩澣한 眞理가 公開되지 못한 이 때 『醫林』이 杏林의 指針이 되어주기 바라는 바이다.”
<- 1954년에 나온 의림 창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