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天長地久, 天地所以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耶, 故能成其私.
하늘과 땅 그리고 성인은 ‘길고 오랜[長久]’ 삶, ‘오랜 삶[長生]’을 산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길고 오랜 삶’이란 생물학적 육신의 오랜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진실된 참 삶으로서의 영원한 삶을 말하는 것이다.
참 삶은 자기를 위해 사는 삶[自生]을 그만둘 때 가능하다고 하였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不自生], 자기를 앞세우지 않고[後其身], 자기를 버리고[外其身], 자기를 비우는 것[無私]이 진정으로 자기를 완성하고 영존시키는 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를 위해 살고, 자기를 앞세우지 않고,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비우고 할 때의 자기인 ‘자생(自生)’, ‘후신(後身)’, ‘무사(無私)’는 ‘작은 자기(small self)’, ‘자의식으로 도사리고 있는 자기(self-conscious self)’, ‘이기적인 자기(egoistic self)’이고, 이런 자기를 부정하고, 버리고, 버릴 때 발견하게 되는 새로운 자기인 ‘신선(身先)’, ‘신존(身存)’, ‘성기사(成其私)’는 ‘큰 자기(large self)’, ‘자기라는 의식마저도 없는 활달한 자기’, ‘남을 위한 존재로서의 자기’이다.
‘작은 자기[小我]’를 진정한 자기라고 착각하고 거기에 집착해서 그 꿈을 키워 보려하다가는 ‘큰 자기[大我]’를 잃어버리게 되고, 반대로 이런 작은 자기를 부정하고 비우면 큰 자기를 찾게 된다.
예수도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좆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하였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복 많이 받아 남보란 듯이 잘 살고, 내세(來世)에서도 죽지 않고 오래 살기 위한 것, 말하자면 ‘제 목숨’, 지금의 ‘작은 자기’가 잘되고 영속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런 자기를 구원코자 하면 참 자기를 잃을 수밖에 없고, 작은 자기를 버릴 때 큰 자기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는 또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2) 하였다. 사람들 앞에서 높아지기 위하여 일부러 낮추거나 남의 앞에 서기 위해서 일부러 뒤에서는 얄팍한 공리적 계산에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자기를 누르고 극복한 사람은 자연히 영적으로 위대한 사람이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도 마찬가지다. ‘나’라는 것은 허구에 불과하므로 거기에 집착하는 오류, 이런 오류에서 연유하는 온갖 부정적인 결과에서 해방을 얻으라는 것이다. 신유학(新儒學)에서도 무사(無私), 무욕(無慾) 등을 말하고 있는 데, 모두 참 삶을 되찾기 위해서는 이기적인 자아를 쳐서 복종시키는 일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비우는 것이 나를 완성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은 모든 종교들의 기본적 지침이 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죽기 전에 죽으면 죽어도 죽지 않는다(If you die before you die, you will not die when you die)”란 말은 참으로 명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명언임을 아는 것과 그것을 실천에 옳기는 것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