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대희 원장이 대한한의사협회 40년사 편찬과 의성 허준기념사업을 벌인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지난 7일 서울교육문화회관 3층 거문고홀에서 열린 제36회 보건의 날 기념식에서 대한한의학회와 대한한의사협회의 공동추천으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한 한 원장의 ‘영예’는 ‘한의학을 향한 열정적인 삶’에 대한 뒤늦은 평가로 비춰진다.
한 원장은 수상 직후 소감을 통해 “자신보다 훌륭하고 기라성 같은 선배, 후배 한의사들이 많음에도 부족한 제가 수상자로 뽑히는 영광을 안게 돼 송구하다”며, “남은 여생도 지금처럼 한의학을 위해 살겠다”고 말했다.
그의 치열한 삶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대한한의사협회 40년사 정리작업의 스트레스와 박사학위논문, 묘소 복원사업 등을 추진하던 중 1996년 우측시상하부 뇌출혈로 쓰러진 후 2급 장애자 판정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신체적 장애는 그가 보여준 한의학술 사료정리 등 초인적인 열정을 꺾지는 못했다. 오히려 육체적 장애가 정신적 투혼을 불태우게 한 촉매제가 된 셈이다.
그가 평생심혈을 기울인 한국한의학사 편찬과 한의학 관련 자료정리 등은 한의학사(史)의 기초사료로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한 원장은 한의학회 이사를 4번 역임하면서 8.15 해방 이후 발행된 모든 한의학 서적과 논문, 종설, 임상증례를 수집 정리해 지난 1987년 한국한의학술정보센터 후 ‘한국한의학술총람’으로 간행하기도 했다.
그 후 1988년 5월부터 20개월간 대한한의사협회 40년사 편찬위원장으로 한의계로서는 처음으로 290쪽 분량의 ‘한의사협회 40년사’를 편찬해 전국 한의회원 등에 무료로 배포하는 공을 세운다.
무엇보다 1991년부터 착수한 허준선생 기념사업은 새로운 사료발굴이란 측면에서 독보성이 인정된다. 허준과 관련된 역사 상당부분을 일반 사학계보다 앞서 발견했다는 사실은 그의 활동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강서구 가양동에서 허준 선생이 서거한 유적지 문헌을 찾아 고증해 ‘7000여평의 구암공원 설립’의 기반을 마련하고, 그곳에 ‘허준동상’ ‘허준박물관’ ‘대한한의사협회관’ 설립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이 기초사료에 근거한 것이다.
또 허준이 내의원에 들어가기 전인 젊은 시절 생활상을 미암일기를 세밀하게 조사해 이를 한의학계에 발표하고, 저서 ‘허준은 살아있다’ 등을 통해 허준선생을 세상에 올바로 알리기도 했다. 특히 그동안 허씨 족보 등에서 알려져 왔던 허준의 출생연도를 1546년에서 1539년으로 교정하고, 생년원일도 3월 5일로 국사편찬위원회에 건의해 받아들이도록 하는 등 이변을 낳기도 했다.
91년부터 97년까지 허준을 다각도로 조명한 논문, 각종 자료를 수집한 ‘구암학회’를 5권까지 제작 발행해 한의 회원, 전국 한의대, 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등에 배포해 허준을 알려나가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이같은 노력들을 토대로 허준의 저서의 보물지정을 위해 추진한 결과 동의보감 등 5종이 국보로 지정되기도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게다가 DMZ에서 50년 만에 허준의 실전 묘소를 찾아 이를 측량해 경기도 문화재로 설정토록 한데 이어 묘소를 복원시키는 공도 한 번쯤 되새겨야 할 대목이다.
뿐만 아니다. 한 원장이 사단법인 의성 허준기념사업회 사무처장 및 상임이사로서 사업회를 운영하면서 허준의학상 시상을 비롯해 학술세미나, 글짓기 대회 개최, 무료진료 실시 등을 추진해 문화부로부터 사단법인 인가를 취득하는 등 활동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의 한의학에 대한 애정은 한의역사 고증에만 끝나지 않는다. 전국의 제약회사 402개 중에서 한약을 이용해 엑기스 과립, 세립, 산제, 단제, 환제, 정제, 캅셀 등의 제약을 하는 69개 제약회사가 1003품목의 제품으로 만드는 자료를 제공받아 분류하는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한의사로서 봉사활동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불편한 몸으로 2006년 4월부터 지난해 11월30일까지 성북구 월곡동, 종암동 주민 2350여명의 무료진료는 한의사로서의 자존감을 확인시킨 것이다.
한 원장은 “그동안 의욕을 앞세운 나머지 다소 불편하게 생각했던 분들도 있을 것”이라며,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사사로운 것이 아닌 한의계를 위한 열정이었던 만큼 이해해 달라”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