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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09일 (토)

백은경원장의 진료실 이야기7

백은경원장의 진료실 이야기7

소소한 일상



내가 근무하는 한의원의 진료실은 사방으로 열 걸음 미만의 공간이다. 그나마 몇 개 있는 창문은 펄펄 나는 아이들이 몸의 절반을 창밖으로 내미는 위험한 경우가 있어서 쇠로 막아둔지라 흉측하다. 인테리어공사를 맡은 건축사가 예전에 정신과병원을 설계해 보신 분이라 세로줄 대신 가로줄로 점잖게 막아놨지만, 이마저도 보기 싫어 평소에는 불투명 블라인드로 가리고 있다.



다른 원장님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창살 없는 감옥에서 오랫동안 수감생활을 하다보니 때로는 도로를 달리는 차가 부럽고 나무 위에서 ‘깍깍’거리는 까치가 부럽다. 7~8년 전엔 점심시간마다 병원건물 밖으로 나가 거리의 벤치에 앉아서 햇볕을 쬐곤 했는데, 지금은 진료실에서 만나는 심란한 인생살이에 이마저도 사치라 느껴진다. 그동안 재미없는 진료실 얘기만 잔뜩 늘어놓은 죄책감에 오늘은 soft한 일상사 보따리를 풀어본다.



1탄. 말발굽이에요



환자는 40대 후반 여성인데 대기실 의자에 앉아있고, 남편으로 보이는 50대 중년남성이 쇼핑백에 딱딱한 뭔가를 담아서 진료실에 먼저 들어왔다. 그리고는 그걸 넣어서 약을 지어달라고 했다.

나: 이게 뭔가요?

아저씨: 말발굽이에요.

나: 예? 이거 어디다 쓰는 건데요?(순식간에 주객이 바뀜)

중년남성: 울화병에 쓰는 거래요.

나: 울화병요? 동의보감에 어떻게 나왔나 한번 찾아봅시다.(뒤적 뒤적) 아! 여기 나왔네요.....부인이 아래로 피를 쏟습니까?

중년남성: 네. 제가 젊었을 때 바람피워서 집사람 속을 많이 썩혔습니다. 집사람 아픈 게 다 저 때문인 것 같아요.

나: 네~에.(끄덕 끄덕) 부인 들어오라고 하십시오.

남편이 나간 뒤 나는 부인의 진맥을 하고, 증상을 확인했다. 남편이 말발굽을 구해온 이유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부인이 조용히 미소를 띠었다. 그 후 서울로 이사하기 전까지 매년 금슬 좋은 이 부부를 만났다.



2탄. 메멘토 아기엄마



‘메멘토’ 라는 영화가 있다. 단기기억상실증 환자인 주인공이 그나마 기억을 잃지 않으려고 온몸에다 문신하듯 글을 새기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영화다. 이 주인공과 비슷하게 단기기억상실을 보였던 두 명의 암환자가 있었다. 한 명은 20대의 젊은 아기엄마였다. 항암제와 방사선치료로 인해 단기기억상실증이 있다보니 자신을 진료했던 원장을 그 다음날 만나면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인사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내일 다시 만나면 오늘 한의원 다녀간 일을 또 잊어버릴 거니까 이해하세요”라며 웃는 여유를 보였다. 보호자가 같이 다니니까 이 정도는 괜찮았는데, 문제는 아기였다. 아기가 울자 분유를 타서 먹이고, 또 30분도 안되어 깜박 잊어버리고서는 아기가 울자마자 또 분유를 타서 먹이는 통에 더러 배탈이 났기 때문이다.



다른 암환자는 올 초 아들의 초등학교에 입학을 앞두고 세상을 떠나 지금은 고인이 되었다. 걸어 다닐 수 있는 동안엔 가발대신 큰 모자를 쓰고 한달에 한번씩 아이를 데리고 왔다.



말할 때마다 말더듬 증상을 보였는데 단락과 단락이 단절되는 느낌을 줬다. 일반적인 말더듬의 증상은 첫 구절 시작하는 단어를 반복하거나 길게 늘이는 식인데 비해, 항암치료 부작용으로 인한 말더듬은 LP 레코드판이 튀는듯 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더러는 주의 깊게 듣고 있다가 cue를 줘야 대화가 자연스럽게 계속 이어지곤 했었다.



‘암치료의 부작용으로 발생된 기억장애에 도움이 될만한 처방이 무엇이 있을까’지나가는 말로 옆방 원장님에게 물었더니 동의보감 神門의 加味茯笭湯이 괜찮을 것 같다고 한다. 처방내용을 보니 수긍이 가는데, 실제가 어떨지는 경험이 없어서 모르겠다. 이 글을 읽으시는 교수님이나 원장님들 중 관심 있는 분이 연구해서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3탄. 선생님, 오늘 친하게 지냈잖아요



옆방 선생님에게 진료를 받는 남아였다. 지능이 낮고 언어 발달이 늦어 매사에 자신감이 없는데다 짜증이 무척 심했다. 한약치료를 하고 난 이후로 다행히 말이 늘면서 표정이 밝아지고 개구쟁이가 되어갔다. 하루는 이 아동이 눈치를 봐가며 담임선생님의 컴퓨터를 자꾸 만졌다.



그러자 담임이 “엄마한테 너 오늘 컴퓨터 못하게 하시라고 알림장에 쓸 거야”라고 경고를 했다. 순간, 그 아이가 공손하게 선생님의 손을 맞잡더니 “선생니~임, 우리 오늘 친하게 지냈잖아요”하며 너스레를 떨었다고 한다.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 아이는 생존비법을 나름 터득하고 있었다.



4탄. 붙잡히기만 해봐라, 요녀석!



하루는 관형찰색과 진맥을 다 마치고 문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A아동: 원장선생님, 천원만 빌려 주세요.

나: 왜?

A아동: 딱지 사려고요.

나: 무슨 딱지?

A아동: 코딱지요.(아뿔사!하고 있는데, 아이는 벌써 진료실 밖으로 후다닥 튐)

3평 남짓한 진료실은 우리에게 넉넉한 꿈의 바다이다. 뱃사공이 행복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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