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음속초22.0℃
  • 맑음21.7℃
  • 맑음철원20.9℃
  • 맑음동두천22.2℃
  • 맑음파주21.7℃
  • 구름많음대관령19.1℃
  • 맑음춘천22.3℃
  • 맑음백령도20.3℃
  • 구름많음북강릉22.7℃
  • 구름많음강릉23.3℃
  • 구름많음동해23.3℃
  • 맑음서울24.3℃
  • 맑음인천24.2℃
  • 맑음원주22.3℃
  • 흐림울릉도24.0℃
  • 맑음수원22.7℃
  • 구름많음영월20.8℃
  • 구름많음충주21.5℃
  • 구름많음서산22.3℃
  • 구름많음울진24.0℃
  • 구름많음청주25.3℃
  • 흐림대전23.5℃
  • 흐림추풍령22.3℃
  • 흐림안동24.2℃
  • 흐림상주23.8℃
  • 흐림포항25.7℃
  • 흐림군산24.0℃
  • 흐림대구25.7℃
  • 흐림전주25.0℃
  • 흐림울산26.5℃
  • 구름많음창원26.1℃
  • 구름많음광주26.1℃
  • 구름많음부산27.9℃
  • 구름많음통영26.1℃
  • 구름많음목포25.7℃
  • 구름많음여수27.6℃
  • 구름많음흑산도25.0℃
  • 구름많음완도25.7℃
  • 흐림고창24.0℃
  • 구름많음순천24.1℃
  • 구름많음홍성(예)23.0℃
  • 구름많음22.4℃
  • 구름많음제주28.4℃
  • 구름많음고산26.2℃
  • 구름많음성산26.3℃
  • 흐림서귀포27.9℃
  • 구름많음진주24.4℃
  • 맑음강화21.2℃
  • 맑음양평22.8℃
  • 구름많음이천22.1℃
  • 맑음인제21.7℃
  • 구름많음홍천22.0℃
  • 구름많음태백19.3℃
  • 구름많음정선군20.9℃
  • 구름많음제천20.0℃
  • 구름많음보은21.8℃
  • 구름많음천안22.2℃
  • 흐림보령23.7℃
  • 구름많음부여23.2℃
  • 흐림금산23.3℃
  • 흐림22.9℃
  • 흐림부안24.6℃
  • 흐림임실23.6℃
  • 흐림정읍24.3℃
  • 구름많음남원24.7℃
  • 흐림장수22.3℃
  • 흐림고창군23.6℃
  • 흐림영광군23.9℃
  • 구름많음김해시27.1℃
  • 구름많음순창군24.6℃
  • 구름많음북창원28.1℃
  • 구름많음양산시27.6℃
  • 흐림보성군25.7℃
  • 흐림강진군25.6℃
  • 흐림장흥25.3℃
  • 구름많음해남25.9℃
  • 흐림고흥24.9℃
  • 구름많음의령군25.8℃
  • 구름많음함양군25.6℃
  • 구름많음광양시26.7℃
  • 구름많음진도군24.2℃
  • 구름많음봉화21.0℃
  • 구름많음영주20.3℃
  • 구름많음문경21.4℃
  • 흐림청송군24.4℃
  • 흐림영덕23.4℃
  • 흐림의성24.8℃
  • 흐림구미23.9℃
  • 흐림영천25.4℃
  • 흐림경주시25.4℃
  • 흐림거창25.3℃
  • 흐림합천25.1℃
  • 구름많음밀양27.4℃
  • 구름많음산청26.3℃
  • 구름많음거제25.1℃
  • 구름많음남해25.7℃
  • 구름많음26.8℃
기상청 제공

2026년 09월 02일 (수)

김남일의 儒醫列傳 76

김남일의 儒醫列傳 76

B0112007090741052-1.jpg

실용주의적 醫學論을 외친 亂世의 儒醫



호가 遲川인 崔鳴吉은 명분에 사로잡혀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철학으로 당시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를 제대로 꿰뚫어 본 몇 안되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李恒福과 申欽의 제자로서 1602년 10대의 나이에 증광문과에 합격한 후에 승문원을 거쳐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광해군 때 파직된 후 趙翼, 張維, 李時白 등과 교류하면서 陽明學에 몰두하여 특유의 실용적 사상을 정립하였다. 인조반정에 참여하면서부터는 국정에 직접 참여하면서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실용적 방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崔鳴吉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633년에 ‘鄕藥集成方’의 간행에 직접 관여하여 이의 출판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실용적 유비무환의 정신의 발로였다. 그는 이 당시에 內醫院의 都提調였다. 內醫院의 都提調는 중신 가운데 의학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겸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崔鳴吉이 이 관직에 있었던 것은 그가 출중한 의학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鄕藥集成方’의 跋文에서 당시 중국의 의약이 횡행하는 풍조를 개탄하면서 민족전통의학의 부활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세종 때 간행된 이후에 이리저리 흩어져 완본을 구하기 어려운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수소문하여 제주도에서 완본을 확보하여 출간하였다. 전운이 감도는 시기에 백성들에게 질병치료에 대한 유용한 지식을 전달할 醫書의 출간이 절실하다는 시대적 필요성에 부응하기 위한 것도 중요한 출간 배경이다.



이렇듯 崔鳴吉의 실용주의적 의학론은 한의학을 음해하려고 노력하는 집단들의 광풍 속에서 생존권을 외치고 있는 현 한의계에 귀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관련기사

가장 많이 본 뉴스

더보기
  • 오늘 인기기사
  • 주간 인기기사

최신뉴스

더보기

뉴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