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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16일 (화)

김남일의 儒醫列傳 20

김남일의 儒醫列傳 20

金南一

慶熙大 韓醫大 醫史學敎室



양반관료 출신으로 의학연구에 뛰어난 능력 발휘





조선시대의 의학 종사자들은 일반적으로 儒醫·業醫·藥種商의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



儒醫는 儒學을 연구하는 학자가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된 경우이고, 業醫는 대대로 醫業을 家業으로 하는 中人層에 속하는 醫師를 말하며, 藥種商은 단순히 약물을 사고파는 약물판매업자를 말한다. 조선 전시대를 통털어 의학에 조예가 깊은 儒醫는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많다.



그들은 자신의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자연과학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의학연구에 몰두하였으며 심지어 이를 생업으로 삼는 이들 조차 있게 되었다. 儒學的 자연관을 밑바탕에 깔고 의학 연구에 매진한 이들의 수준은 매우 높아서 한의학을 연구하는 계층 가운데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면서 한의학 발전을 선도하였던 것이다.



許琮은 조선전기에 활동한 儒醫들 가운데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그가 단순히 의학과 관련된 활동을 왕성하게 하였다는 점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金順蒙, 河宗海 등 당시 내노라는 醫人들의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許琮은 본래 문과에 급제하여 문관으로 관직의 길을 연 이후에 여러 관직을 거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에 공헌하여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기도 하였다.

그는 여진족이 침입했을 때에는 병마절도사로 출정하기도 하였고 성균관주부, 예문관봉교, 이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렇듯 문무를 겸전하여 국방과 문예에 큰 공적을 남겼다.



그의 이러한 능력은 의학분야에서도 발휘되어 內醫院提調를 겸하면서 중종 때의 名醫인 金順蒙, 河宗海 등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서거정, 노사신 등과 함께 ‘鄕藥集成方’을 諺解하기도 하였고, 윤호와 함께 ‘新撰救急簡易方’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스스로 ‘醫方類聚’를 요약한 ‘醫門精要’를 내기도 하였다.



양반관료 출신으로 의학연구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의사들까지 지도한 것은 양반사회에서 의학을 바라보는 관점이 얼마나 개방적이었는가를 나타내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의 학문적 사승관계는 한국 한의학의 학술유파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앞으로의 연구가 요망되는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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