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름많음속초5.3℃
  • 박무-1.0℃
  • 흐림철원-1.1℃
  • 흐림동두천0.6℃
  • 흐림파주-0.4℃
  • 흐림대관령-1.0℃
  • 흐림춘천-0.6℃
  • 구름조금백령도7.4℃
  • 구름많음북강릉3.2℃
  • 구름많음강릉4.9℃
  • 구름많음동해3.7℃
  • 박무서울2.3℃
  • 흐림인천4.2℃
  • 흐림원주-0.1℃
  • 구름조금울릉도6.2℃
  • 비수원2.1℃
  • 흐림영월-0.6℃
  • 구름많음충주0.3℃
  • 흐림서산2.7℃
  • 구름조금울진3.2℃
  • 구름많음청주2.5℃
  • 구름많음대전1.3℃
  • 흐림추풍령-1.8℃
  • 구름많음안동-3.2℃
  • 흐림상주-1.0℃
  • 맑음포항2.1℃
  • 구름많음군산3.0℃
  • 맑음대구-2.0℃
  • 흐림전주3.8℃
  • 맑음울산0.2℃
  • 맑음창원2.2℃
  • 흐림광주2.8℃
  • 맑음부산3.3℃
  • 맑음통영2.9℃
  • 맑음목포3.2℃
  • 구름조금여수4.7℃
  • 구름조금흑산도8.7℃
  • 맑음완도1.6℃
  • 맑음고창2.2℃
  • 흐림순천-3.0℃
  • 비홍성(예)1.8℃
  • 구름많음0.4℃
  • 구름많음제주6.7℃
  • 구름많음고산11.3℃
  • 맑음성산5.3℃
  • 구름조금서귀포8.3℃
  • 맑음진주-3.3℃
  • 흐림강화1.7℃
  • 흐림양평0.5℃
  • 흐림이천-0.6℃
  • 흐림인제-0.2℃
  • 흐림홍천-0.8℃
  • 흐림태백1.0℃
  • 흐림정선군
  • 흐림제천-0.3℃
  • 흐림보은-1.1℃
  • 흐림천안1.4℃
  • 구름많음보령5.2℃
  • 맑음부여0.5℃
  • 흐림금산-0.2℃
  • 흐림1.5℃
  • 흐림부안5.3℃
  • 흐림임실0.1℃
  • 흐림정읍3.4℃
  • 흐림남원-0.5℃
  • 흐림장수-1.0℃
  • 흐림고창군3.6℃
  • 맑음영광군1.4℃
  • 맑음김해시0.6℃
  • 흐림순창군-0.3℃
  • 맑음북창원1.2℃
  • 맑음양산시0.3℃
  • 맑음보성군0.3℃
  • 맑음강진군-0.8℃
  • 맑음장흥-2.0℃
  • 맑음해남-0.7℃
  • 맑음고흥-2.0℃
  • 맑음의령군-5.4℃
  • 맑음함양군-3.4℃
  • 구름조금광양시2.2℃
  • 맑음진도군1.5℃
  • 흐림봉화-5.2℃
  • 흐림영주-2.1℃
  • 흐림문경-1.2℃
  • 맑음청송군-6.0℃
  • 맑음영덕0.2℃
  • 흐림의성-4.7℃
  • 흐림구미-2.5℃
  • 맑음영천-4.1℃
  • 맑음경주시-3.2℃
  • 맑음거창-5.0℃
  • 맑음합천-2.5℃
  • 맑음밀양-2.8℃
  • 맑음산청-3.5℃
  • 맑음거제1.3℃
  • 맑음남해1.0℃
  • 맑음-2.2℃
기상청 제공

2025년 12월 16일 (화)

김남일의 儒醫列傳 28

김남일의 儒醫列傳 28

의술로 외교에 성공한 신라시대의 유의



‘日本書紀’는 삼국시대 전후 시기의 역사기록을 보존하여 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깊지만, 역사 왜곡이라는 깊은 오점을 남겼다. 특히 이 책의 편찬 책임자였던 후지화라 후이도(藤原不比等)는 反新羅的인 편찬 입장을 고수한 것으로 유명하다.

왜곡된 역사 서술로 인해 초래된 동아시아의 역사적 갈등은 지금도 후유증으로 남아 분쟁의 불씨가 되고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한국의학사에서 삼국시대는 자료의 빈곤으로 인하여 이 시기의 편린만을 엿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일본측 자료인 ‘日本書紀’와 ‘古事記’에 나오는 서기 414년의 신라의 사신 金武에 대한 기록은 이 시기에 기록된 한·일간의 의학교류에 대한 몇 안 되는 자료이다.



그 내용은 서기 414년에 신라의 사신인 金波鎭漢紀武가 의학에 밝아서 병을 앓고 있던 倭王을 치료하였다는 기록이다. 여기에서 金波鎭漢紀武의 波鎭은 관직이름이고 漢紀는 부족명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은 金武가 된다.



이로 볼 때 金武는 일본에 파견된 신라의 사신으로 의학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보인다. 게다가 파진찬의 벼슬에까지 이른 것으로 보아 그는 높은 지배계층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정황은 당시 지식인층들 사이에 의학이 널리 유행하였음을 보여준다.



일개 사신이 다른 나라의 어의들을 제치고 임금을 치료하였다는 것은 당시 신라 의술의 수준을 가늠하는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는 조국 신라에서도 이미 뛰어난 의술로 많은 사람들에게 이름이 나있었고 이러한 이유로 일본왕의 치료에 차출되었을 것이다.



金武에 대한 기록은 삼국과 일본간의 의학교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 富士川游, 中尾萬三 등 일본의 醫學史家들은 기록상 金武가 일본에 와서 일본의 임금을 치료한 것이 사실이기에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못하고 다만 이 때에 사용된 의학이 중국의학이라는 식의 논리를 펴서 신라의 의술의 수준을 격하시키려고 하였다. 이것은 또 다른 역사 왜곡이 아닌가 생각된다.
 

관련기사

가장 많이 본 뉴스

더보기
  • 오늘 인기기사
  • 주간 인기기사

최신뉴스

더보기

뉴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