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보근(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과 1학년)
그 중 한 분은 나중에 비행기 고장으로 일정이 하루 미뤄진 진료단을 위해 별장으로 식사 초대를 해주셨다. 별장도 넓고 아름다웠지만 한쪽에 별도로 설치된 러시아식 사우나는 우리가 받은 최고로 따뜻한 선물이었다.
공식적인 진료가 끝나고 우리가 방문한 곳은 코프샤코프 ‘망향의 언덕’이라고 이름 붙여진 곳이었다. 동행한 르포 작가이신 남해경 박사님으로부터 이곳에서 마지막 귀국선을 타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늘어섰다는 얘기들과 그때 배를 타지 못한 사람들의 통곡소리 때문에 인근 주민들이 몇 날 몇 일 잠을 잘 수 없었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는 잠시 목이 메었다.
이어서 들른 곳은 한인 1세들이 많이 묻힌 공동묘지. 오는 길에 사온 꽃으로 헌화를 하고 김일권 원장님이 써주신 시를 낭독하고 잠시 묵념을 했다. 이곳은 비석에 얼굴 사진을 새겨 넣고, ‘학생 000지 묘’라고 쓰는 특징이 있었는데, 입구 쪽의 화려함과 달리 까마귀가 머리 위로 울며 날아다니는 깊은 곳에는 풀이 무성하고 찾기도 힘든 더 많은 묘가 있었다. 그 중 우리가 발걸음을 멈춘 곳이 우연히도 우리를 인솔해주시던 한인 분의 아버지의 묘이었고, 시를 낭독하고 묵념을 하는 동안 아버지를 부르는 그 분의 눈물에 우리는 뒤늦게, 이제야 찾아뵌다는 죄송스럽고 아픈 마음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예정된 마지막날 저녁, 한의사협회 진주환 부회장님, 그리고 우리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대우건설 사장님과 함께한 사할린주 외교부 장관 초청 만찬까지 모든 일정이 끝나고 아쉬워하는 가운데, 사할린 항공의 비행기가 ‘technical problem’으로 귀국 일정이 불확실해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전화도 인터넷도 할 수 없었던 일주일. 해진 이후로는 외출을 할 수 없었고, 더군다나 진료 중에서는 아랄리아 요양원 밖을 한번도 나가지 못했던 시간들이 스치고 지나가면서 불안한 마음을 안고 우선 이수진 회장님의 도움으로 이산가족협회 사무실에서 전화를 할 수 있는 집으로 기회를 가졌다.
가족들의 목소리를 들으니 내가 정말 사할린에 있구나 하는 생각과 나는 몇 일 늦더라도 돌아갈 수 있으니 다행이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SAT의 문제가 길어지면 아시아나와 협정으로 아시아나를 탈 수도 있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더 늦더라도 아시아나를 타고 오라는, 전화하는 당시로는 웃을 수 없는 부탁도 잊지 않으셨다.
다행일까 불행일까. 사할린에 한의사로서 동포들을 위해 뼈를 묻어야 한다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하루가 지났고, 다음날 우리는 SAT를 타고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 사할린시간 19:35 비행기. 한국시간 20:35 도착. 시차는 두 시간. 마지막 남은 시간 동안 잠시 시내 중심가를 둘러보고 오호츠크해에 발을 담궜다.
그리고 공항에 도착. 우리와 동행하며 공항가는 마지막까지 도와주신 이수진 회장님과 김부자 선생님을 포함한 통역 분들의 푸근한 미소, 그리고 우리를 따라다니며 사진 찍어주고 장난치던 꼬마 사샤의 눈물이 마음에 박혔다. 세시간 거리인데 한번 오기가 이렇게 힘들었다니…. ‘꼭 다시 오겠습니다.
당신들을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생각하면서 모두 피곤한 몸보다 더욱 무거운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일주일간의 몸과 마음의 피로에 깜박 잠이 들었다. 하지만 정말 작은 비행기 SAT의 흔들림과 얼마전 일어난 러시아 비행기 사고, 그리고 대포동이 떠올라 곧바로 깼다. 두리번거리다 뒤를 돌아보니 녹색병원의 박재만 선생님께서는 글쓰기에 한참 집중하고 계신다.
우리는 무사히 인천에 도착했다. 공항의 화려함이 한국임을 실감하게 했다. 짐을 찾고, 진료하던 매일 아침 화이팅을 외치던 때처럼 다시 한번 둥글게 모여서 박재만 선생님께서 쓰신 ‘사할린 동포에게 보내는 글’을 들으며 감상의 끝에 잠시 젖었다.
“돌아오지 못한 사할린 동포를 고국의 품으로”라는 이름으로 출발했지만, 우리 마음 속의 사할린은 러시아 사우나만큼이나 따뜻하고 비록 부자유로부터 시작했지만, ‘스스로 말미암은’ 자유를 만들어가는 곳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