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진화된 조선 의학 우수성 널리 전파
이번 기행을 떠나기 전 조선통신사 의학문답을 연구 중인 차웅석 교수(경희대학교 의사학교실)의 강의를 통해 ‘남도고취(藍島鼓吹)’라는 원서의 짧은 문장을 볼 기회가 있었다.
남도(藍島) 즉 아이노시마는 일본 이키[壹岐] 섬 옆에 있는 조그마한 섬이었다. ‘남도고취(藍島鼓吹)’는 1719년 제9회 조선통신사 일원으로 파견된 제술관 신유한(申維翰), 양의(良醫) 권도(權道)가 일본에 갔을 때 지방의 의사인 오노시코우[小野士厚] 등과 아이노시마에서 주고받은 의학과 관련된 서신의 내용을 정리해 이듬해 책으로 펴냈다.
‘교린제성(交隣提醒)’에서 ‘성신교린(誠信交隣)’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당시 일본의 뛰어난 유학자이자 걸출한 외교가였던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의 주선으로 후쿠오카의 유학자 쿠시다킨잔[櫛田琴山] 등과 의사 오노시코우는 신유한을 비롯한 조선의 양의(良醫), 의원들과 여러 학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쿠시다킨잔과 신유한, 부사서기(副使書記) 성몽량(成夢良), 종사서기(從使書記) 장응두(張應斗), 아메노모리 호슈의 詩의 나눔에서 ‘남도창화집(藍島唱和集)’과 오노시코우의 ‘남도고취(藍島鼓吹)’가 탄생했다.
‘남도고취(藍島鼓吹)’에는 아이노시마를 방문한 조선통신사 일행으로부터 지유(地楡)와 편축( 蓄)을 구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원하는 양만큼 구해주지 못한 것에 대하여 책의 저자인 의사 오노시코우가 사과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아이노시마에서 자라는 청초(靑草)를 캐어다 달라고 한 부탁에 대해서도 이 섬에는 만형자(蔓荊子)와 사초(莎草) 같은 것들만 있을 뿐 원하는 것을 구해 주지 못한다고 대답하면서 靑草의 형상을 궁금해 하는 일행에게 책에 나와 있는 부분들을 요약하여 보여줬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전체 주민이 380명밖에 되지 않고 섬 전체의 반경이 6.14km, 면적 1.25㎢에 불과한 농지가 거의 없는 이 섬에서 통신사 일행이 요구한 약재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남도고취(藍島鼓吹)’에 나와 있는 몇 개의 짧은 의학문답 기록만을 가지고 이 책의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마저 없었다면 무심코 지나쳐 버릴 수 있었던 현해탄의 이 고독한 섬 아이노시마였을 것이다.
한의학의 大선배인 양의(良醫) 권도(權道)와 의원으로 파견됐던 백흥전(白興詮)과 김광사(金光泗)가 당시 조선이 군사적으로는 일본보다 열세에 있었지만, 의학만큼은 선진국이었던 조선이 일본의 의사와 학자를 상대로 마음껏 우리 한의학의 우수성을 펼쳐 보였을 모습들을 이곳에서 회상해 볼 수 있었다.
사실 일본 막부측에서는 조선에 대해 “의술이 뛰어난 사람을 선발해 주십시오”라든가, “그 수를 늘려주십시오”라며 계속하여 醫員을 요청했다. 이것은 醫員의 파견에 대해 일본의 관심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미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 초기에 ‘동의보감’이 들어왔으며, 조선 의학의 높은 수준은 임진왜란·정유재란의 양란(兩亂)과 왜관을 통해서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통신사 일행 중 의원에 대한 기대는 매우 컸던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뛰어난 재능과 능력을 지닌 까닭에 통신사 파견에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醫員의 신분은 양반이 아닌 중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이들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을 찾기가 어려운 듯 하다.
비록 짧은 방문이었지만 그동안 기록으로만 존재를 알고 있었던 아이노시마였는지라 섬에 오래 머물면서 이 곳 관계자들에게 묻고 싶은 것도 많았으나 일정상 다음 방문지인 시모노세키, 시모카마가리, 도모노우라로 발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