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 정 식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의사학 전공·청솔한의원 원장)
조선시대 17세기에 일본으로 파견된 ‘조선통신사’들의 의학문답 논문 준비와 관련, 지난달 1일부터 5일까지 ‘조선통신사 옛길을 따라서’라는 예술기행을 다녀왔다. ‘조선통신사’의 문화 및 학술 교류에 있어 ‘한의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이번 기행에서 조선통신사가 숙박한 고장의 유학자와 문인들과 교류하는 장소에는 유의(儒醫) 혹은 양의(良醫)라는 신분의 의학자들이 있다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이와관련 조선통신사 전문가 신성순은 저서 ‘조선통신사’에서 “조선통신사 방일시 학술 교류를 말할 때 한의학을 빼놓을 수 없다”고 서술하고 있다. 역사에 따르면,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1607년(선조 40)부터 260년이라는 기간 동안 총 12회에 걸쳐 일본에 파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기행은 옛 조선통신사 일행이 17~18세기 일본과 문화교류를 할 때 밟았던 길의 일부를 답사하는 형식이었다. 생소했던 조선통신사가 일반인에게 알려진 것은 재일(在日)학자 신기수(辛基秀)가 1979년 2월에 제작한 ‘에도[江戶] 시대의 조선통신사’라는 50분용 기록영화.
옛 조선통신사는 한양을 떠나 청주, 부산, 쓰시마[對馬島] 등지를 지나 일본 막부가 있던 에도[도쿄]까지 가는 데 짧게는 70여일에서 길게는 13개월이 걸렸다. 반면 이번 예술기행은 일본 지역 뱃길 여정을 5일 동안 답사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일행은 뱃길 혹은 육로를 따라 아이노시마, 시모노세키, 시모카마가리, 도모노우라, 우시마도까지를 차례로 답사해 나갔다. 옛 조선통신사가 거쳐 갔던 전체 여정의 절반인 동시에 육로를 제외한 바닷길 노정에 해당되는 길이었다.
이번 기행은 후쿠오카[福岡]현 싱구초[新宮町]에 속한 섬 ‘아이노시마’[藍島/옛 지명 相島]에서 시작됐다(옛 조선통신사 길은 쓰시마[對馬島]가 일본 땅의 첫 기착지였다).
‘아이노시마’는 지금은 일본인들에게도 이름이 생소하며 잊혀진 섬이지만 300년 전만 하더라도 조선통신사가 도착하면 일본 각지에서 몰려든 3,500명이나 되는 인원으로 들끓던 곳이었다.
옛 조선통신사 일행이 방문할 때마다 숙박할 객관은 거금을 들여 섬의 서쪽에 건설됐다. 조선통신사가 한번 지나가면 일본 각 지방의 재정은 2~3년간 바닥이 날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조선통신사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듯 하다.
그래서 경비 절약을 목적으로 한 ‘역지빙례(易地聘禮)’로 인하여 쓰시마에서만 국서를 교환한 1811년 제12회 조선통신사를 제외하고 아이노시마는 나머지 11차례 모두 통신사가 객관에 머물면서 거쳐 간 곳이기도 하다.
야마토혼조[大和本草]로 유명한 후쿠오카 번의 본초학자인 가이바라 에키켄[貝原益幹]은 1655년 제6회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왔을 때 아이노시마에서 일본산 인삼에 관하여 문답을 한 기록이 있다. 그는 또 1682년 제7회 통신사 사행에서는 정주학자(程朱學者)로 변신, 통신사가 머문 아이노시마의 객관을 찾아 필담창화(筆談唱和)를 나누기도 했다.
1719년 제9회 통신사의 의학문답에 참여한 제술관 신유한(申維翰)은 “이번 항해에서 처음으로 신선의 땅을 본다. 신축한 관사는 천 칸에 이르고, 여러 가지 물건들은 화려하고 아름답다”고 조선통신사 ‘3大 사행록’으로 평가받는 ‘해유록’에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아이노시마에 도착하기 일주일 전 후쿠오카는 큰 태풍으로 수해를 입어, 어쩔 수 없이 조선통신사 일행은 불가피하게 10일 정도 아이노시마에 발이 묶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일본과 후쿠오카 지방의 의학 발전을 위해서는 도리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조선통신사의 의학자들과 교류하여 획득한 조선의 한의학과 本草에 대한 선진 지식은 일본 의학 발전에 큰 역할을 수행했던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