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진료 지침 개발에 관한 연수회의를 다녀와서 下

"표준화 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존재가치 없다"



표준화 따른 공감대 형성·지속적 노력 절실

임상진료 지침 위한 기본적 자료 DB구축 필요





기분 좋은 피로를 느끼며 첫날의 일정을 마쳤을 때는 오후 5시를 넘어선 시간이었다. 다뉴브강에 배를 타러 갈 생각인데 합류하지 않겠냐는 Dr. Chen의 제안에 대만에서 온 신경외과의사인 Dr. Hsh와 함께 선뜻 따라나섰다. 6시를 지나 주위가 어두워지면서 고성들과 체인다리, 국회 건물들은 멋진 조명과 함께 새로 태어난 유럽을 실감케 했다.



작년 5월 하루 정도 이곳을 여행한 적이 있어 올 때는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역시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풍경들을 볼 수 있었다. 최근 헝가리는 국부총리의 부정부패로 인해 연일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10월23일이 D-day라고 하는데 사실 아주 산발적인 조용한 시위대의 모습이 보일뿐 그리 긴장감이 돌아보이는 분위기는 접할 수 없었다. 엽서에서 자주 본 듯한 말 그대로 체인을 두른 체인다리, 헝가리 사람들이 가장 좋아했다는 여왕의 애칭을 따서 부르는 씨씨다리, 다리 아래 보이는 마가렛섬, Gellert 언덕, 왕궁, 교회 건물들. 역사적 배경에 대해 설명을 들으며 마주하는 풍경들은 더욱 정감있게 다가왔다.

1시간 정도의 유람을 마치고 적당한 시장기를 느끼며 다시 시가지로 돌아와 사람이 많이 있는 식당이 맛있는 식당이라는 내 주장과 나이 많은 웨이터가 있는 식당이 역사 깊은 식당이라는 Dr. Chen의 의견을 모두 충족하는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정도의 평가에 동의하며 헝가리에서의 둘째 날이 저물었다.



연수회 둘째 날, 권고의 수립에 관한 주제들이 다루어졌다. 먼저 Dr. Sara로부터 임상진료 지침 자료에 대한 자료를 정리한 정보가 되어 논문을 다시 읽는 수고를 덜어 줄 수 있으며 개발자들간에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근거표(Evidence tables)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이어서 등급 체계(Grading Systems)에 대한 강의가 이루어졌는데 GRADE, SIGN, NICE, ICSI 등 세계 여러 곳에서 국가간 협의체를 구성하여 다양한 등급 체계를 소개하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우리도 표준화하고 방법론을 정비하지 않으면 이러한 협의체들의 힘에 밀려 우리 것을 우리가 제대로 평가하고 활용할 수 없는 시점이 올 수 있다는 것을 거듭 절감하게 된다. 마음이 바빠짐을 느낀다. 우리만큼 한의학에 대해 장점과 결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에 맞는 평가방법을 개발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에 대한 준비를 해 나아가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특히 한의계에서 아직까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연구들은 관찰적·기술적 연구이거나 동물실험 연구임을 고려할 때 이러한 임상진료 지침을 만들기 위한 기본적인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내 질문에 Dr. Nairn은 Cochrane에서도 이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향후 몇 년간 대체의학에 관한 연구에 많은 투자를 할 계획인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지속적인 노력을 강조했다. 우리 말고 누가 답을 줄 수 있겠으며 아쉬운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똑같은 연구 결과에 대해서도 연구자의 의도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함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음을 알기에 또 마음이 무거워진다.



주변의 많은 한의사들과 연구자들이 점점 임상연구 방법론과 근거중심의학에 관심을 갖고 노력하고 있는 모습들을 보며 나 자신이 많이 고무되곤 한다. 하지만 한 두 사람의 힘으로 되는 문제는 아니며 우리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어 연구방법론과 이에 대한 체계적인 노력이 절실하다는 생각이다. 이제 표준화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시대인 것 같다.



마지막 연수일, 이 날은 주로 이렇게 만들어진 임상진료 지침을 어떻게 보급하고 활용하며 계속 수정·보완해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뉴질랜드 HTA(건강기술평가위원회) 소속의 위원으로부터는 정책 결정에 어떻게 임상 진료지침이 반영될 수 있는지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그렇다. 실제 치료 효과면에서도 의학적 효용성이 높을 뿐 아니라 국가 정책면에서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의학이 아니면 더 이상은 이런 형태로의 한의학은 살아남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느껴졌다. 정말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가치 있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을 같은 언어로 표현해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3일간의 연수는 서로의 아쉬움과 숙제를 남기고 끝이 났다. 다음날 새벽 어둠 속을 1시간을 걸어 어렵게 찾아간 Gellert 스파의 나른한 휴식과 그린 브릿지에서 맞은 또 하나의 태양, 안개속의 가을 공원은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부다페스트다. 항상 떠나기 전의 그 번거로움과 불편한 마음들은 이렇게 새롭게 그리워할 무엇들로 어김없이 찾아오는 나의 나태함을 잠재운다. 길을 몰라도 가야는 하는, 돌아가기 위해 떠나야 하는 그것이 항상 나를 힘들게 한다.



끝으로 임상 연구와 진료 지침 개발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연수 관련 자료를 보내 드림으로써 나의 못 미치게 부족함을 대신할까 한다. 또 그래도 다녀왔으면 뭔가 보고서를 달라고 잊지 않고 나를 괴롭혀 준 선배에게도 미운 정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