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金 南 一 / 慶熙大 韓醫大 醫史學敎室
서양의학이 한국에 이식된 이후 한의학계는 한의학의 정체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하게 되었다. 한국과 같이 한의학과 서양의학이 이원적으로 공존하는 체계에서 한의학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온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일제시대로 넘어 오면서 한의학의 정체성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 것이 있었으니 醫生試驗이 바로 그것이다.
한의학은 백여년 전 서양의학이 도입되기 이전까지는 한국인의 건강을 지켜주는 유일한 의학으로서의 일원적 지위를 지키고 있었다. 개항 이후에 서양의학이 이 땅에 들어옴에 따라 한의학은 국가기관에서 점차 멀어지기 시작하였고 일제시대로 넘어가면서 제도권 영역의 주변부로 밀려나고 말았다. 일제는 일본 본토에서는 한의학을 없애버리는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였지만, 한국에서는 부족한 서양의학의 의료인력으로는 식민지 백성들의 노동력을 수탈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일제시대 초기인 1913년에 醫生制度라는 제도를 만들어 한시적으로 한의사제도가 유지되게 하였다.
이러한 제도를 만들게 된 것은 당시 한국인의 높은 한의학 선호도를 고려하여 한국인들에게 여전히 보편의학으로 의식화되어 있는 한의학을 이용하여 부족한 의료공백을 메우려는 시도에서였다. 그러나 이 제도가 시행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이후에 실시된 醫生試驗에 출제된 문제는 한국에서의 한의학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불러일으킨 혐의가 짙은 원인 제공자였다. 1917년 京畿道警務部에서 실시한 의생시험문제를 보면 ①猩紅熱에 就하여 知하는 바를 記하라 ②亞細亞虎列刺에 就하여 知하는 바를 記하라 ③麻疹의 療法을 記하라 ④副睾丸炎의 증상과 요법을 기하라 ⑤훈창과 훈독의 요법을 기하라는 등의 서양의학 일변도의 문제들로 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醫生이 되기 위해서는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한의학 지식보다는 서양의학에 대한 학습이 보다 유용하다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후 간행된 한의학 학술잡지에는 지속적으로 서양의학에 대한 통신교육형식의 글들로 채워지기 시작한 것은 이와 같은 분위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 간행된 ‘東西醫學’, ‘東西醫學硏究會月報’ 등의 한의학 학술잡지들은 서양의학 강좌들로 채워지게 되는데, 이것은 이 잡지들의 독자들에게 醫生試驗에 대비할 수 있는 지식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정지훈의 ‘일제시대 한의학학술잡지에 대한 연구’ 참조).
당시 한의사들의 이러한 식의 대응양식은 한의학이 후진을 양성하여 살아남는 생존전략으로서 깊은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서양의학에 대한 지속적인 학습으로 이어져 東西醫學의 會通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동기를 부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들은 한의학계에서 그다지 중심에 자리 잡지는 못하였다. 1930년대,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다시 傳統醫學으로의 회귀 흐름이 광범위하게 일어난 것이나 조선일보 등 지면을 통해 한의학의 고유한 발전을 위해 토론한 것 등이 그러하다. 그리고 1930년대 이후에 간행된 한의학학술잡지의 논조가 전통의학 위주로 바뀌어간 것 등을 통해서 이러한 흐름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1935년부터 3회에 걸쳐 東西醫學硏究會에서 간행한 ‘東洋醫藥’은 이와 같은 한의학 부흥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 잡지이다. 이 잡지에서는 金永勳, 張基茂 등이 전통의학에 대한 부흥을 역설하여 분위기를 이끌고 있다. 이후 연이어 ‘忠南醫藥’(1935~1939), ‘漢方醫藥’(1939~1942)등이 연이어 간행되어 한의학부흥의 논의를 이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