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金 南 一 / 慶熙大 韓醫大 醫史學敎室
‘漢方醫藥界’는 한의사단체인 朝鮮醫生會에서 1914년 1월에 발간된 현존하는 최초의 한의학 학술잡지이다. 창간호가 1913년 10월에 간행되었지만 이듬해 발간된 2호만 남아 있기에 현존하는 최초의 잡지는 1914년 1월에 간행된 ‘漢方醫藥界’ 2호이다.
최초의 한의사단체인 朝鮮醫生會에서 본 잡지를 간행하게 된 이유는 앞쪽에 나오는 崔在學의 ‘한방의학의 개량’이라는 글에 잘 나와 있다. 이른바 ‘한방의학의 개량’이란 한의학 자체의 부정이 아니라 진단기기의 개발, 약재의 응용에 대한 개량, 병원설비의 개량 등 방법론적 개량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제에 의해 지속적으로 시행된 서양의학 일변도의 의료정책으로 한의학은 소외되게 되었고, 이러한 차별정책 속에서 한의사들은 학문의 생존권 확보를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에 ‘漢方醫藥界’를 발간하여 한의사들의 總意를 모아 집단적으로 대항하고자 한 것이다.
현재 경희대 한의과대학 의사학교실에 남아 있는 이 자료 속에는 朝鮮醫生會 會長인 洪鍾哲, 副會長인 徐丙琳, 評議長인 張容駿, 朝鮮醫生會 幹事인 裴碩鍾, 私立醫學講習所長인 李峻奎 등의 글이 실려 있다. 이들은 여러 글들을 통해 쇠퇴해 가는 한의학을 되살리고자 학문적 우수성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역설하고 있다. 이들의 값진 노력의 결과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후 한의학은 다시 부활하여 온 국민 곁에 있게 되었다.
이 잡지가 담고 있는 정신뿐 아니라 자료적인 측면에서 값진 것은 당시 朝鮮醫生會에서 활동했던 인물에 대한 면면을 소개하는 난이 앞부분에 있어서 근현대 한의학 인물을 연구하는 필자 같은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여기에 소개가 되어 인물로 朝鮮醫生會의 會長 洪鍾哲, 副會長 徐丙琳, 總務 黃翰周, 幹事長 李鶴浩, 評議長 張容駿, 私立醫學講習所學監 정재호, 朝鮮醫生會 幹事 沈希澤, 私立醫學講習所講師 裵碩鍾, 朝鮮醫生會 幹事 趙性燦, 私立醫學講習所 講師 李世浩, 朝鮮醫生會 評議員 孫師濬, 私立醫學講習所 講師 朴海鎭, 漢方醫藥界編述員 李洵宰 등이 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은 고종·순종 년간에 궁중에서 御醫였던 인물들로서 일제의 조선침략으로 인하여 고난의 역정을 걷게 된 사람들이다. 모두 儒醫로 분류되는 지식인 醫家들로서 학문적 식견이 남달라 당대에 사회적 존경을 받았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이 사회적 천대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의해 강요된 醫生制度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일제에 의해 자행되는 민족의학에 대한 탄압의 강도가 너무 높아 숨돌릴 틈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한의사들은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이 사멸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민족의학의 살길을 계속해서 모색하게 되었고 이것이 ‘漢方醫藥界’라는 학술잡지의 간행으로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이 잡지에 채워져 있는 글들은 시사적 의미가 있는 것들이 많다. 徐丙琳은 ‘醫門參古懲今’이라는 글에서 경쟁적 세계사회에서 한의학이 살아남기 위해서 日新又日新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뒤로 張容駿의 ‘運氣綱領’, 李峻奎의 ‘傷寒論’, 裵碩鍾의 ‘傷寒汗下虛實辨論’, 洪鍾哲의 ‘婦人論’, 黃翰周의 ‘鍼灸總論’, 崔奎憲의 ‘小兒生長調護論’, 李鶴浩의 ‘內傷論’, 姜元熙의 ‘人有四象說’ 등의 글들이 이어지고 있다.
당시까지 한의학을 학문적으로 이끄는 최고의 리더들로 인식되는 이들이 쓴 글들은 그대로 조선후기로부터 구한말까지 이어진 한의학의 學派的 색깔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들의 다양한 주장들은 ‘漢方醫藥界’라는 하나의 바다에 모여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아직은 미약하나마 서양의학적 學理에 대해 개방적인 논의가 시작된 것을 엿볼 수 있다. 비록 몇 쪽이 되지는 않지만 ‘生理衛生의 略說’이라는 글을 통해 西洋解剖學을 소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로 楊平郡 許浚, 北窓 鄭겸 , 芝田 李臣奎 등의 小傳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멸해가는 민족의학을 되살리고자 고래로부터 이어져온 민족혼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었다.
‘漢方醫藥界’로 만들어진 학술적 論議의 전통은 이후 한의학이 사멸되지 않고 명맥을 이어가는 데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