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개원가 일기
냉철하고 실력이 뛰어난, 철두철미 완벽한 두뇌와 차가운 심장을 가진 의사… 따뜻하고 포용력이 있는, 뜨거운 심장을 지녔지만 완벽하지는 못한 의사….
어떤 의사가 되고 싶냐고 물으면 언제나 전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지 못하는 자신을 책하면서 최소한 그런 의사라도 되어야 환자에게 피해는 주지 않을 것이라고 나 자신을 몰아갔다.
사실 진짜로 전자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정말은 뜨거운 심장과 완벽한 지식과 기술을 다 가진 의사가 되고 싶었다. 능력이 부족해서 하나밖에 할 수 없다면 최소한 실력 있는 의사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뜻한 가슴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쉽게 이룰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1년쯤 전에 임상에서 환자를 잘 보고 있는 한 선배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환자가 잘 나아요?”
난 비방 내지는 특별한 환자관리방법 뭐 그런 대답을 기대했다.
“환자를 사랑하면 그 환자가 잘 나아.”
환자를 사랑한다…. 이건 내가 기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그런 대답은 너무 뻔해서 오히려 시시하게 느껴졌다.
한편 너무 식상한 답이었지만 임상 10년차가 되면서 나 자신이나 친구들도 더 이상 그런 말을 입 밖에 내는 것이 쑥스러웠던지라 아주 오랜만에 들어서 그런지 신선한 느낌도 있었다.
그래도 이후 환자를 만나면서 힘든 순간에는 마음 속에서 외쳐보았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침을 놓을 때도 속으로 중얼거리며 놓아보기도 하였다. “사랑해, 사랑해….” 그러면 어쩐지 환자가 더 빨리 좋아지기도 하는 것 같다.
힘든 환자들을 만날 때가 있다.
몸이 괴로우니까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매일 전화를 해서 고통을 호소하기도 하고, 치료를 받으면서 보통 이상의 것들을 요구해서 당황스럽게 하는 경우가 있다. 처음에는 이런 환자들을 만나면 겁이 나서 마음을 멀리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증상들을 내가 어찌 컨트롤할 수 없으니 괴로워서 자연스레 멀리 대하게 된다. 시간이 좀 지나면서는 방어진료 차원에서 멀리 대하게 된다. 내 마음이 멀어지면 환자도 자연스럽게 멀어져갔다.
그런데 환자들을 대하면서 조금씩 깨닫는 것은 환자들은 정말 고통스러움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괴로움을 호소하기도 하지만 의사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서 괴로움을 호소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의사가 자신의 증상을 함께 고민하며 고통을 이해해주는데서 마음의 위로와 함께 증상의 개선도 잘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머니께서 늘 말씀하신다.
“환자는 의사의 표정 하나에도, 말투 하나에도 희망을 얻기도 하고 절망을 하기도 한다. 의사 말에 의해서 병이 반은 절로 낫는다. 항상 표정이나 말을 조심해라.”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낫기 어려운 환자에게 ‘어렵지만’ 해보자고 해야 하나 ‘꼭 나으니까’ 희망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자고 해야 하나하는 갈등을 느낀다. 희망을 선택하는 편이 환자에게 훨씬 좋을 것이라 판단했는데 결론적으로 이러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낫지 않는 환자와 겪을 의료분쟁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어디까지 내가 책임지고 어느 선에서 냉정하게 하는 것이 의사 자신을 위해서나 환자를 위해서 좋을지 그 줄다리기를 이 작은 진료실 안에서 늘 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냉철한 두뇌와 함께 따뜻한 가슴이다. 예전에는 의학지식이 더욱 풍부하다면 냉정한 가슴으로도 얼마든지 치료를 잘 하고 줄다리기의 적정선을 잘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다. 물론 내가 아직은 지식과 경험을 더 많이 쌓아가야 할 때이다. 그러나 의학적 지식과 경험이 완벽해진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런 게 있다면 인류가 질병에 신음하는 일은 벌써 없어졌을 것이다. 나의 가슴이 더 뜨겁고 여유 있다면 내가 가진 지식으로도 조금 더 치료율이 나아질 것이다.
몸과 마음이 분리될 수 없듯이,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 분리될 수 없는 자만이 진짜 의사가 될 것이다. 나는 오늘도 그 과정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