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 전통의학 시장을 뒤바꾼 새로운 법령
두통약이나 소화제, 박카스와 같은 일반의약품의 슈퍼판매를 위한 약사법 개정을 놓고 보건복지부와 약사회의 힘겨루기가 가열되고 있다. 박카스를 구입하면서 복약지도를 받아 본 적이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사회는 일반의약품의 약국 외 판매는 의약품 오남용을 증가시킬 수 있으므로 복약지도와 상담이 가능한 약국에서 판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약국에서 일반의약품을 관리하는 현 상황 하에서도 약물과다복용이나 중독에 따른 안전시스템은 거의 갖추어져 있지 않은 실정임에도 논쟁은 끝날 줄을 모른다. 밥그릇 싸움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음에도 약사회가 멈출 수 없는 것은, 약사법 개정이 약업계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서양의학의 제품화된 의약품의 판매와 관련하여 약사법을 개정하느니 마느니 국내가 시끄러운 한편, 올해 유럽에서는 한약제제와 관련하여 새로운 법이 시행되면서 관련 단체와 업계가 들썩이고 있다. 이 법령은 2004년에 통과된 전통한약제제에 관한 것으로 올해 5월1일자로 발효되었다. 내용은 일반의약품으로 판매되어 왔던 한약제제의 부작용으로부터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 한약제제의 규제를 유럽 전역에서 표준화하여 안전성과 품질을 담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취지만을 놓고 보자면 흠잡을 구석이 없다. 한약제제를 사용하는 소비자들을 위하여 안전성과 유효성을 검증하겠다는데 누가 무엇이라 할 수 있으랴. 법령 발효 이전까지는 유럽연합 내의 국가마다 자기들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한약제제를 다뤄왔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벨기에 같은 경우 한약제제가 비싸고 어려운 등록과정을 거쳐 의약품으로 취급되었으나, 네덜란드와 체코의 경우 식품으로 관리되었기 때문에 거의 규제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5월부터는 전 유럽연합 국가들에서 새 법령에 따라 한약제제가 의약품으로 등록되어 관리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법 테두리 안에서 한약제제를 관리하게 되면 장점이 있다. 먼저, 한약제제의 사용에 대한 안전한 법적 기반을 제공하게 되어 한의약이 제도권 안으로 포용될 수 있다. 또한 규제 정도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던 한약제제의 품질 향상을 가져올 것이고, 이는 장기적으로 한의약에 대한 신뢰도를 증가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유럽시장 내에서 한의약이나 대체의학의 지속적인 성장을 가능케 할 수 있다.
따라서 유럽연합에서 한약제제를 제도권 안으로 편입시켜 관리한다는 것은, 전통의학의 표준화가 진행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세계화·국제화를 꿈꾸는 한의학계에 희소식일 수 있다. 안전성 테스트와 임상시험결과가 필요한 서양의약품과는 달리 한약제제의 경우, 유해성이 없음을 증명하는 서류와 30년 이상 사용되어 왔음을 증명하는 서류를 제출하면 된다고 하는 점도 서양의약품에 비해 절차가 간단하므로 장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유럽의 한약관련 단체와 업계는, 법령 제정 시부터 현재까지 이 법령의 철폐 내지는 개정을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다. 먼저, 소위 30년 법칙이라고 하는 것이 적용되기 때문인데, 한약제제를 허가받기 위해서는 EU 내에서 최소한 15년 이상을 포함하여 총 30년 이상 사용되었음을 증명해야 한다.
즉, 30년 이상 사용된 한약제제라면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허가받아 판매될 수 있고, 새롭게 개발된 한약제제의 경우 허가받기까지 30년의 기간이 소요된다는 뜻이다. 이는 아직 유럽 진출이 활발하지 않은 한국의 경우, 국내에서 15년 이상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더라도 추가로 15년의 세월이 소요된다는 것이며, 신 한방제제의 경우 그 이상의 기간이 소요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허가에 드는 비용이 한약제제의 판매가에 비해 너무 비싸다는 점도 단점으로 꼽힌다. 영국의 경우 한 가지 한약제제를 허가받는데 드는 비용이 £80,000~120,000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기가 많은 인삼이나 생강제제 같은 경우 살아남을 것으로 보이지만, 널리 사용되지 않는 제제의 경우에는 허가비를 투자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어 시장에서 사라질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러한 경우 다양한 약에 대한 소비자의 선택권이 감소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또한 허가받지 않은 한약제제 중 일부는 건강보조식품으로 판매될 수 있는데, 이 경우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에 현재보다 더욱 심각한 관리상의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도 단점의 하나이다.
저품질, 가짜 약, 미생물 오염, 살충제나 독성물질 등의 안전성과 유효성 문제 때문에 안전한 표준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 과도한 규제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EU의 입장이지만 엄격한 허가절차 때문에 많은 한약제조업체들이 그리 쉽게 허가를 받지 못한 실정이다. 현지의 일부 업체들이 한약제제에 대한 허가를 받았을 뿐이고 중국이나 인도의 업체들은 4월말까지도 거의 대부분이 허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한국의 업체들도 유럽 진출을 시도할 경우 다른 나라 업체들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상황을 겪을 것이라 예상된다. ISO에서의 한약제제 표준화와 함께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할 부분의 하나이다.
어려운 규제 때문에 걱정되는 부분도 있지만, 이러한 법규가 시행된다는 것은 그만큼 유럽에서 한의약 사용이 늘어났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영국의 경우 이번 법령 시행 이전까지는 무려 40여년 전인 1968년에 제정된 법령에 의해 한약제제가 관리되어 왔다. 그만큼 한약 복용이 드물고 한약을 관리하는 인력이 적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조사에 따르면 영국 성인의 약 1/4이 지난 2년간 한약을 복용한 적이 있으며, 건강식품점이나 약국에서 일반의약품으로 구입했다고 한다. 국가적으로 관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될 만한 결과라 보인다.
영국은 이번 법령 도입과 더불어 전통의학 인력 관리에 관해서도 10여년 전부터 논의해 왔다. 이번 법령 시행 이후로 허가받지 않고 제조되는 한약을 소비자들이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전문인력을 법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직 어떠한 확정적인 제도가 만들어진 바는 없으나 한의사의 국제 진출을 위해서는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이다.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85%가 전문인력의 관리·규제가 필요하다고 하였으며, 한약, 침, 중의학 분야에서 자격증제도로 인력을 관리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의사자격증이 아닌 것이 아쉽지만, 머지않아 영국에서는 이러한 자격증제도가 도입될 것으로 보인다.
ISO(국제표준화기구: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Standardization)의 전통의학 기술위원회에서는 한약, 침을 포함한 의료기기, 한의학 용어 세 분야의 작업반이 만들어졌고, 앞으로 교육이나 자격 분야도 논의하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유럽의 법령이나 제도의 변화가 우리의 장애물이 아니라 우리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아직 미진한 부분은 열심히 준비하고, 이미 좋은 제도와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은 솔선해서 준비함으로써 표준을 우리가 세계로 나아가는 단단한 발판으로 만들어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