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시대 韓醫들의 활동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한의학을 지켜낸 인물들
1910년 국권이 일제로 넘어가면서 한의학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일제가 1905년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에 대한 간섭을 본격화하면서 이듬해인 1906년 국립의료기관인 廣濟院에서 강제로 서양의학 위주의 시험을 치러서 한의사들을 추출하면서부터 한의학의 탄압은 시작되었다.
한의학의 위기를 느낀 한의사들은 고종의 도움으로 1904년 同濟醫學校라는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후원자인 고종이 강제퇴위되면서 폐교되어 한의학 공교육의 모처럼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만다.
1913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제정된 醫生制度는 한의학의 위상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1914년 朝鮮醫生會에서는 『漢方醫藥界』라는 학술잡지를 간행하는데, 이 잡지는 한국 최초의 한의학 학술잡지라는 의의가 있다. 전국에 있는 한의사들은 1915년 가을에 열린 共進會라는 산업박람회를 기회로 창덕궁 광장에 770여명이 모여 全國醫生大會를 개최하여 이 때 全鮮醫會라는 한의사 단체를 구성한다. 이 때 회장에 池錫永, 부회장에 崔東燮, 총무에 金壽哲, 임원에 趙炳瑾, 景道學, 金永勳 등이 선출되었다.
1921년에는 東西醫學硏究會라는 한의사들의 친목과 학술진흥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설립되었다. 會長은 金性璂, 副會長은 李乙雨였다. 東西醫學硏究會는 1923년부터 『東西醫學硏究會月報』라는 학술지를 간행하면서 학술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이 단체는 1936년 4월18일에 東亞日報 후원으로 ‘通俗漢醫學講演會’를 갖고 통속한의학의 확산을 위해 노력한다. 이 때 金永勳은 “肺病과 腦炎에 대하야”, 申佶求는 “民衆保健과 漢方藥”, 趙憲泳은 “漢方醫學에서 본 現代病”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한편 1935년에는 成周鳳을 발행인으로 하는 『忠南醫藥』이 창간되었다. 『忠南醫藥』은 忠南醫藥組合이라는 충청남도에 조직된 한의계를 망라하는 단체에서 간행한 기관지로서 1937년에 『漢方醫藥』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가면서 1942년까지 50호까지 간행되었다.
1939년 4월 16일과 17일 양일간 태평동 府民館에서 東洋醫藥協會의 결성식이 거행된다. 이날 창립총회에서는 理事長에 金明汝(韓醫側), 副理事長에 趙寅燮(漢藥側), 李丁玉을 選出하고, 醫藥界를 網羅한 42名의 理事를 委囑하여 總務, 財務, 硏究事業의 각 部署를 定하였다. 그리고 議決事項으로서는 ①漢方醫藥專門學校의 設立, ②附屬漢方病院의 設立, ③學術誌 및 漢方文獻의 刊行, ④漢藥材의 生産勸奬과 調達 등을 實踐할 것을 決議하였다.
한편 노병희(魯炳熹: 1850~1918)와 조종대(趙鍾大: 1873~1922), 姜宇奎(1855~1920)와 沈秉祚(1894~1945) 등은 일제에 저항한 한의사들로 이름이 높다. 이들의 독립운동 활동은 청사를 빛내고 있다.
일제시대 한의사들은 시대적 문제를 타파해 나가기 위해 학술적 논쟁을 전개한다.
특히 1934년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벌어진 한의학 부흥 논쟁은 유명하다. 조선일보를 통해 당시 趙憲泳, 張基茂, 鄭槿陽, 李乙浩 등의 논쟁은 한의학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유도해 내기에 충분하였다.
일제시대 한의학 학술잡지를 살펴보면 당시 어떤 문제가 주 이슈였는지 분명해진다. 이 시기 韓醫들은, 시대에 맞게 한의학을 개량시키고 한의사들의 의식을 바꿔 진정한 보건의료인으로서의 자질을 함양하며 사회적 역할의 증대를 위해 노력하여 한의학의 사회 속에서의 위치를 정립할 것을 갈망하였다.
<- 1916년 전선의회에서 간행한 한의학 학술잡지 ‘동의보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