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년기 제2의 사춘기
사람이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와 연구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 이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를 탐구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에서 성현이라 부르는 사람들을 성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사람의 본질을 잘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의학적으로도 10명의 남자를 치료하는 것보다 1명의 여자를 치료하는 것이 어렵고, 10명의 여자를 치료하는 것보다 1명의 어린이를 치료하는 것이 어렵다는 명의들의 고백도 있을 정도로 인간은 남녀가 다르고 노소에 따라 다르다.
인간을 이해하기 쉽지 않게 하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는데 그중 한가지 요인이 있다면 인간은 탄생과 죽음의 과정에서 성장이라는 과정과 노화라는 과정을 겪는 ‘변화’ 때문일 것이다. 이 변화는 신체적인 것 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들도 포함하고 있다. 어린이의 심리 상태가 다르며, 노인의 심리상태가 다르다.
청소년기를 사춘기라고 한다. 사춘기는 자신을 발견하는 시기이다. 융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사춘기 이전까지 무의식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이 별로 없다. 그래서 자신을 독립적 인격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부모와 동일하거나 또는 부모의 부속물로 이해한다. 하지만 사춘기가 되면 이런 동일시 현상이 사라지고 자신이 부모와 같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춘기 청소년들이 부모와 대립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사춘기의 반항은 지극히 정상적인 성장의 한 과정이 된다. 때로 이런 과정을 겪지 않은 ‘착하고 순하게’ 사춘기의 열병없이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 중 일부는 중년기가 되서야 사춘기와 같은 현상을 겪게 되는 경우가 나타난다.
사춘기에 부모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한 인간은 바로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 이 시기의 청소년들은 자신과 친구를 동일시하는 단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부모보다 친구가 더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친구들에게서 동질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친구관계가 평생 좋은 관계로 가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 시기의 인간은 조만간 그 친구와 자신이 같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다음 단계에서 인간은 친구를 대체할 또 다른 존재를 찾게 된다. 성년이 되서 인간이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는 것은 대개 자신의 직업이 된다. 때로는 자신이 속한 커다란 단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속한 단체 또는 직업의 세계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됨으로서 인간은 자신의 자아상을 만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자아상을 두고 융은 ‘페르조나 - 외적 인격’이라고 하였다.
그리스에서 연극할 때 쓰는 가면이라는 뜻의 페르조나는 그야말로 가면인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또는 이 세계에 속한 인간은 자신의 직업세계에서 만들어진 자아상이 일종의 가면인 것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여자들에게는 이것이 남편이나, 또는 가정이 될 수도 있으며, 때로는 자신의 자녀가 될 수도 있다. 특히나 한국의 어머니들은 자신들의 못다이룬 꿈을 자녀를 통해서 이룩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는데, 이럴 경우 자식은 어머니에게 외적 인격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가면을 쓰고 살 때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굳이 이것을 가면으로 불러야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경증의 상당히 많은 원인이 이런 가면, 즉 외적 인격이라 불리는 페르조나에 집착할 때 발생한다고 하는 것이 융의 지적이다.
융은 말하기를 “우리는 인생의 오전 프로그램에 따라 인생의 오후를 살아갈 수 없다. 아침에는 대단했던 것이 저녁에는 사소한 것일 수 있고, 아침에 진실했던 것이 저녁에는 거짓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페르조나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하는 시기가 있으니, 융은 이 때를 중년기라고 하였다. 융은 인간의 생을 35세를 전후해서 삶의 전반기와 삶의 후반기로 나눈다. 융이 말하는 중년기는 인생의 전반기가 끝나고 후반기가 시작하는 35세경부터 45세 정도까지 약 10여년의 기간을 말한다. 융은 이 중년기를 제2의 사춘기라고도 말을 한다. 왜냐하면 이 때는 사춘기에 정서적·정신적인 변화가 발생하는 것처럼, 또 한번 커다란 정서적·정신적 변화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가 발생하는 것은 인생의 전반부가 외적 인격의 발달이 목표였다면, 인생의 후반기의 모는 내적 인격의 발달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융은 생명체로서의 인간은 자기를 실현하는 것을 생의 목표로 하여 끊임없이 움직여 나간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것은 융의 분석심리학의 핵심인 자기실현론이 되는 것이다. 자기실현론의 핵심은 융의 ‘심리 유형론’과 더불어 이를 기초로한 ‘자기실현’ 인데 이것을 요약해보면 결국 ‘외적 인격과 내적 인격의 통합’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동양의 성현의 한 사람인 공자께서도 “化而不同” 이라는 말로 군자의 기본적인 덕성으로 제시하는 바와 같다. 즉 건전하고 이상적인 인간상은, 자기가 속한 집단이 제시하는 가면 페르조나에 집착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뜻에 살아가는 독립적인 인간이 될 것을 뜻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융이 제시하는 자기실현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중년기에 사춘기와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정서적인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또 한번 독립적 인간으로서, 페르조나라는 가면을 벗고, 내적 인격을 성숙시켜 자기를 실현하라는 무의식의 발현 때문인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사춘기에는 자아에 대한 인식과 자신의 독립성에 대한 자각이 거의 반자동적으로 이루어지며, 이런 자각 때문에 이전에 자신의 뿌리라 여겼던 부모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중년기에는 이런 자각이 사춘기 때와 달리 외부의 존재가 아닌 내부의 자신에게서 이루어지는 자신과의 갈등이며, 또한 사춘기 때처럼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상당히 필요한, 어느 정도 고통이 따르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공자께서도 사십대를 “不惑” 이라 지칭하는 것도 자신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30대의 외적 인격 페르조나에 대해서 “化而不同” 이라는 자각을 거쳐서 내적 인격에 대한 자기 이해가 깊어지고 확고해지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중년기에 들어서서 인생의 전반부에 형성해왔던 페르조나-외적 인격을 벗어버리고 자기의 깊은 내면과 무의식의 세계까지 이해하고 포용하는 不惑의 계단을 밟아 올라서고 나서야 비로서 50대의 知天命의 단계에 이르러 자기를 꽃피우고 실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