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우소와 한의학의 현대적 재해석
얼마 전 모 TV 프로그램에 전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교수가 나와서 최고의 유적지로 순천의 선암사를 꼽았다고 한다. 선암사에 관광객이 갑자기 늘어났다는 내용을 인터넷 뉴스로 먼저 접했고 나중에 우연히 재방송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유홍준 교수는 선암사가 화려하지는 않지만 자연과 어우러져 한국의 자연 속에서만 나올 수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곳이며 외국인 손님들과 방문할 때마다 극찬을 받았던 곳이라고 추천을 했다.
선암사 가는 길에 외국인이 차를 세우고 산과 강과 마을과 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한국의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동하며 사진을 찍었다는 이야기까지 곁들여져 언젠가는 꼭 방문해야 할 곳으로 나도 기억해 두게 되었다. 그 방송 이후 선암사는 문의전화를 받느라 종무소 업무가 마비되고 홈페이지가 접속 폭주로 다운되는 등 유명세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고 하니 방송의 힘이 대단히 크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올해 선암사가 매스컴에 오르내린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올해 5월 말 인터넷을 통해 재미있으면서도 자랑스러운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세계적인 정원박람회인 영국의 첼시 꽃박람회에서 한국의 해우소를 주제로 한 정원이 소형 정원 부문에서 최고의 정원으로 선정되어 금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는데 이 해우소가 바로 지은 지 300년이 넘은 선암사의 해우소를 소재로 하여 제작된 것이라 한다. 첼시 꽃박람회는 18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세계 최고의 정원 및 원예 박람회로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으며, 개최 18개월 전부터 기획서를 검토하여 참가작품을 엄격하게 선발한다고 하는데, 한국의 정원 작품이 전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니 첫 참가에서 최고상을 수상한 것이다.
해우소는 解憂라는 글자에서 알 수 있듯이 몸 속의 오염된 찌꺼기를 배출하면서 몸 뿐만 아니라 마음 속의 근심과 번뇌도 함께 비우고 삶의 의미를 깨닫는 곳이다. 가장 개인적인 공간이면서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곳이기에 가장 원초적이고 자유로운 곳이면서 또한 가장 철학적인 곳이 바로 해우소이다. 작가인 황지혜씨는 이러한 생명의 환원과 비움의 특성을 가진 해우소를 주제로 하여 우리 정원의 자연미와 단순미를 함께 보여주고자 했다고 하며 그래서인지 이 작품의 사진을 보면 어느 한적한 옛 시골마을에서 만날 것만 같은 단순하고도 정겨운 해우소와 뒷마당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러한 작가의 의도가 통했는지 한 영국 전문가는 영국인들에게는 낯선 주제를 이용하여 한국적인 해학과 자연미를 담아낸 놀라운 작품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찾아보기 쉽지는 않지만 과거에는 어느 집 뒷마당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해우소 주변의 풍경이 이렇게 극찬을 받다니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많은 한국인들이 ‘해우소 가는 길’이라는 주제가 최고의 정원으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에 반신반의할 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해우소를 주제로 한 정원이 출품되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고개를 갸우뚱 했으니 영국인들이 처음 기획서를 접했을 때 얼마나 황당해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한국의 해우소가 가지는 함의와 한국적인 정원에 대한 작가의 설명을 듣고서야 이해를 하고 출품작으로 선정될 수 있었다고 하며 그 결과는 최고상 수상으로 돌아왔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에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흔하게 보던 시골풍경이 외국인들에게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기 힘든 산과 강과 들과 마을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새로운 어울림의 미학이 되고, 해우소가 있는 뒷마당의 풍경이 그들에게는 자연과 인간의 공생과 순환을 보여주는 놀라운 모습이 되는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사실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외국인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면 그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곳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주로 가는 강남이나 압구정동 같은 번화한 거리가 아니라 인사동, 삼청동과 같이 한국적인 분위기가 살아있는 곳이며, 창경궁, 경복궁과 같은 고궁이다. 처음 먹어보는 한식의 매운 맛이 너무 강하지 않을까 우려해도 다양한 한식을 꼭 먹어보고 싶어 한다.
한국에 오래 살다가 직장 때문에 다른 나라로 이주한 영국인 친구는 한국을 떠나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곳으로 안동 하회마을을 꼽았고 바로 엊그제 국제회의에서 만났던 중국인들은 회의가 끝나면 무엇을 할 예정이냐는 나의 질문에 인사동에 가서 한국적인 기념품을 사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의학 역시 가장 한국적인 것 중 하나이며, 그 중에서도 현재까지 살아 숨 쉬고 있는 학문이자 의술이기에 가장 세계적일 수 있다는 가장 단순한 진리를 또 한 번 되새기게 된다. 우리에게는 매일 밥을 먹고 숨을 쉬는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지만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내용이기에 관심을 갖게 되고 감탄하는 것이다. 20세기 후반부터 급격히 증가한 동양의 전통의학에 대한 관심은 이제 세계적인 트렌드가 되어 가고 있다.
인기 있는 미국 드라마에 침 치료를 받는 모습이 등장하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고 가까운 일본이나 홍콩, 중국에서부터 러시아, 미국 등지에서까지 한방진료를 받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한의학은 현 시점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시장이자 높은 부가가치를 지닌 산업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다만 이 시점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전통의 현대적 재해석이다. 정원으로 꾸며진 해우소 역시 어느 시골집이나 절의 해우소를 그대로 옮겨 놓는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해우소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고민을 통해 재탄생한 것이리라. 한국음식의 세계화 과정에서 한국음식의 특징을 유지하면서도 세계인들의 입맛에 맞도록 약간의 변화를 가미하는 것처럼 한의학 역시 한의학의 전통적 가치를 유지하면서 현대화, 세계화하는 작업에 많은 고민을 할애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며칠 전 ISO/TC249의 의료기기 관련 작업반의 회의에 참석하였는데, 한국측 발표 중 우리나라에서 개발된 맥진기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나라들이 작업범위에 대한 원론적인 제안에 그치고 있는데 비해 이미 해외에서까지 시판되고 있는 맥진기에 관한 내용을 발표하면서 3차원적인 맥을 어떻게 구현하여 어떠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지를 설명하자 여러 나라에서 관심을 가지고 들으면서 카메라를 꺼내 슬라이드를 직접 촬영하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의학은 전통적 가치의 보존과 개발, 현대적 재해석을 통해 전통의학을 세계적으로 선도할 만한 잠재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음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이 바로 우리 스스로의 가치와 잠재력을 믿고 자신 있게 세계 속으로 나아가야 할 시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