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형 교수의 근현대 한의학사 정리의 열망
1977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에서 간행한 『한국현대문화사대계』에는 ‘韓國東醫學史’라는 제목의 논문이 포함되어 있다. 이 글의 저자는 李鍾馨(1929~2008)이다. 李鍾馨은 1929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난 후 한의학 연구의 뜻을 품고 1949년 晴崗 金永勳(1882~1974)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 서울로 와서 지도를 받기 시작하였다. 李鍾馨은 학문적으로 晴崗 선생의 지도를 받았기에 『醫學入門』에 밝았다. 晴崗 선생의 지도로 『醫學入門』의 거의 모든 내용을 암기하고 있었던 그는 임상에서 이 책을 활용하였고 후학들의 지도에도 이 책을 기본으로 하였다.
李鍾馨 교수가 전문적으로 연구한 분야는 『醫學入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특별히 近現代 韓醫學史에도 깊이 천착하여 필생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이 시기 한의학사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던 데에는 그의 스승인 晴崗 金永勳의 영향도 크게 작용되었다. 스승 金永勳은 일제시대 전 시기를 통해 한의학의 부흥을 위해 음으로 양으로 노력한 인물이다. 1904년 同濟醫學校에 都敎授로 뽑힌 이래로 1915년 全國醫生大會가 개최되어 全鮮醫會가 만들어질 때에도 깊이 관여하였고, 1924년에는 東西醫學硏究會를 조직하여 학술 진흥에 힘썼고, 1935년부터는 학술잡지 東洋醫藥을 간행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와 같은 스승의 활동 이력은 수제자인 李鍾馨의 큰 귀감이 되는 일로서 李鍾馨으로 하여금 스승이 소중하게 간직하여 온 자료들과 그 기억을 잘 정리하여 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역사로 전달하게 주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李鍾馨 교수가 서거하기 전까지 근현대 한의학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구리시 집에서 연구를 계속했던 것은 이러한 사명감 때문이었다.
1977년 간행된 李鍾馨의 ‘韓國東醫學史’는 크게 序言, 一 開化期(舊韓國의 東醫學), 二 衰退期(日帝下의 東醫學), 三 光復과 東醫學의 復興, 結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근현대 동의학의 역사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우리의 文化遺産 중에서 近代 開化期를 거치는 동안 東醫學만큼 受難을 겪은 것이 없고, 또한 東醫學만큼 용케 保存되어진 것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것은 距今 100年을 前後한 이 나라의 開化期 過程이 그만큼 時運이 기구했던 때문이기도 하고, 한편 이러한 不運 속에서나마 東醫學이 살아 남을 수 있는 실제적 醫療價値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구한말 西文東漸의 趨勢에 따라 西洋醫學이 이 나라에 들어와서 새롭고 科學的인 醫藥으로서의 能力과 威勢를 發揮하는 동안, 옛 모습의 東醫學은 우리의 生活에서 멀리 버려져야 마땅한 것으로 알고 政策的으로 廢棄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東醫學이 버림받는 賤待 속에서나마 庶民 속에 파고들어 庶民醫學으로서 民族保健에 寄與하여 오늘에 이른 것은 확실히 이 醫學이 지니고 있는 臨床的 價値性 때문으로 보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東醫學은 이 重要한 近代化 過程, 즉 東醫學이 主體的으로 西醫學을 받아들여 攝取同化시켜야 했을 가장 중요한 時機를 哀惜하게도 이러한 政策的 抑壓과 排除 때문에 그 機會를 갖지 못하고 自體成長마저 저애되고 말았다.……또한, 本稿의 趣旨가 東醫學의 科學技術史的 發展面을 살피는 것이 되어야 하겠으나, 이 나라에 新文物 및 西醫學이 들어오기 시작한 舊韓末이나 倭政下에서는 東醫學은 發達이라기 보다는 그 存續面에서 迂餘曲折이 심하였고, 解放 後에 비로소 學術의 振興이 圖謀되었기 때문에 科學技術史的인 考察은 매우 日殘함을 附言해 둔다.”
이 원고는 청강 김영훈 선생이 보관하여온 일제시대 全時期의 자료들과 김영훈 선생이 생전에 구술해 준 역사 사실들을 그대로 정리한 玉稿이다. 李鍾馨은 이 때의 원고 작성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더 업그레이드 된 원고를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간행한 『한국 한의학사의 재정립』(1995년 간행)에 투고하였다. 이 때 그가 맡았던 부분은 일제시대 한의학사 부분이었다.
<- 1977년 발표된 이종형 교수의 한국동의학사의 목차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