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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05일 (금)

“강우규 의사의 정신과 사상, 온 국민에게 전달되길”

“강우규 의사의 정신과 사상, 온 국민에게 전달되길”

의열투쟁과 함께 동양·세계 평화라는 인류보편적 가치 주장한 독립운동가
1919년 9월 2일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 시도…민족운동의 큰 기폭제
“잊혀진 한의사들의 독립운동 정당하게 평가받고, 새롭게 부활되길 기대”
‘한의사이자 교육자 왈우 강우규 평전’…강우규 의사의 일생 조명
박환 고려학술문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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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환 고려학술문화재단 이사장

 

<편집자주>한의사 출신 독립운동가 강우규 의사의 일생을 다룬 한의사이자 교육자 왈우 강우규 평전이 출간됐다. 본란에서는 책을 저술한 박환 작가에게 강우규 의사의 의열투쟁의 의의, 한의사이자 교육자로서의 행보 등에 대해 들어봤다.

 

박환 작가는 역사학자로서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러시아지역 한국사 연구를 지원하는 고려학술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국독립운동사 전공으로 그 중에서 특히 만주·러시아 지역의 한인독립운동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만주한인민족운동사연구(일조각, 1991)’, ‘동방 김세환평전(선인, 2025)’ 등 독립운동사 관련 50여 권이 있다.

 

특히 잊혀진 항일영웅들의 발굴에 관심을 갖고 있어 이회영, 최재형, 최봉준, 문창범, 임면수, 김세환, 정이형 등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으며, 또한 대종교 2대 교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김교헌의 동생인 독립운동과 더불어 한의사로도 활동한 김교준에 대해서도 연구한 적이 있다.

 

Q. ‘한의사이자 교육자 왈우 강우규 평전을 저술하게 된 계기는?

강우규(18551920)191992일 오후 5시 일제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제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하기 위해 폭탄을 투척했다. 강우규 의사가 던진 폭탄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해 신임총독 사이토를 환영나온 일제 관헌 및 그 추종자들 37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그의 의거는 일차적으로 일본을 상징하는 신임 조선총독에게 폭탄을 투척했다는 측면에서 제2의 안중근 의거로서 한국과 일본을 넘어 동아시아 전체에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특히 이 사건이 젊은이도 아닌 65세의 노인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에서 더욱 큰 주목을 받았으며, 더욱이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 위축돼 가던 한의사에 의해 이뤄진 점은 더욱 주목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강우규 의사는 한의사로서 동양평화론을 주장한 사상가이자, 참 교육자였음에도 이점 또한 그동안 간과되고 있었다. 특히 학계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 더욱 안타까웠고, 올해는 광복 80주년이자 강우규 의사 탄신 170주년이라 강우규 의사의 중요성을 알리고 싶어 책자를 저술하게 됐다.

 

강우규평전.jpg

 

Q. 특히 강조하고자 한 내용이 있다면?

강우규 의사는 그동안 의열투쟁을 전개한 행동가로만 주로 알려져 있었다. 강우규 의사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계승해 조선의 독립을 넘어 동양평화, 세계평화라는 인류보편적 가치를 주장한 평화사상가였음을 보다 널리 알리고 싶었다. 당시 국제정세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분명한 시각을 갖고 있던 보편적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지성인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강우규 의사는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누구보다도 미래세대인 학생들에게 근대적인 민족의식을 심어주고자 한 참 교육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강우규 의사의 사상가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의 측면을 특별히 강조하고 싶었다. 이와 함께 그동안 강우규 의사가 일제의 탄압 속에서 우리의 전통의학, 민족의학이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에 분개했던 한의사였다는 점이 등한시 되었음에 주목해 책 제목을 한의사이자 교육자 왈우 강우규평전이라고 지어 특별히 한의사인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내 주변의 학자들 조차도 강우규 의사가 한의사였다는 점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Q. 강우규 의사의 의열투쟁에 대한 의의는?

강우규 의사의 의거는 3.1운동 이후 최초의 의열투쟁으로써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에게 큰 경고가 되었음은 물론 국내외의 한인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강우규 의사는 의거는 물론 재판과정과, 수형생활, 처형과정에서도 당당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한인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고 할 수 있다. 강우규 의사의 의거는 이처럼 민족운동선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의거 후 국내외 민족운동의 큰 기폭제가 됐다는 점에서 더욱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1920216일 오후 930분경 경성부 남대문역 대합실에서 한 청년이 백여 명의 민중들에게 강우규는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지고 조선민족을 위해 희생되었음을 알아야 하며, 따라서 우리 청년은 더 한층 분기해 조선독립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취지의 연설을 끝낸 다음 대한독립만세10회 정도 연거푸 외쳤던 일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1924519일 만주의 참의부 독립군은 압록강을 순시하던 사이토 총독을 습격하기도 했다.

 

박환작가님 (2).jpg

 

Q. 한의사 그리고 교육자로서의 강우규는?

강우규 의사는 한의업에 종사했다. 그의 손녀 강영재의 회고에 따르면 “30여 세에 함경남도 홍원으로 이사하기 전 그는 고향에서 한의의술을 배워서 어느 정도 시술을 했던 것으로 짐작되니 전하는 말에 의하면 홍원으로 이사한 후 그는 동리사람들의 간단한 병은 손수 고쳐주며 의원 노릇을 하였다 한다”, “좌우간 그는 한미한 농가의 막내둥이로 태어나서 10여 세에 한학을 배우고 이후 한의의술을 익혀 한의원으로 주업을 삼았으며라고 증언하고 있다.

 

강우규 의사는 어려서 한의 공부를 했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고향 평안도를 넘어 함경도 그리고 만주, 러시아 지역에서도 한의사로서 동포들의 질병치료에 만전을 기하였다. 특히 치료차 왕진하는 과정에서 동포들의 어려움을 직접 목격하고, 조국의 독립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강우규 의사는 한약방을 독립운동 거점으로 활용했으며, 한의업을 통해 번돈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는 한편 폭탄을 구입해 사이토 총독을 처단하고자 했다. 아울러 자신이 치료한 최자남의 부인과의 연계를 통해 자신의 의열투쟁을 보다 효율적으로 진행하고자 했다.

 

특히 강우규 의사는 조국의 독립과 해방된 조국의 미래를 위해 학생들에게 교육을 시켜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사형을 당하는 그 순간까지도 잊지 않았다. 의술로 모은 돈을 모아 함경도와 만주, 러시아 등지에 여러 학교를 세운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참다운 실천자라고 할 수 있겠다. 그가 세운 대표적 학교로는 함경남도 홍원군 영명학교, 북만주 요하현(현 헤이룽장성 라오허현)의 광동학교, 러시아 이만(현 달네레첸스크)의 협성학교, 밋가루시카학교(하바롭스크 소재로 추정)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손녀 강영재씨가 1969신동아에 기고한 글에서 새로 세운 학교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행상의료업에 나섰다고 회고할 정도로 학생 교육에 강한 집념을 보였던 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Q. 이번 책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다가가길 바라는지?

강우규 의사는 노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자, 동양평화를 주장한 사상가 그리고 학생들에게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근대적인 민족교육을 시키고자 한 참 교육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강우규 의사의 정신과 사상이 저서를 통해 넓게는 우리 국민들 모두에게, 가까이는 한의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 특히 한의학도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으면 한다. 강우규 의사의 경우 한의사로서 개인들에게 인술을 베푸는 것을 넘어 민족을 치유하고, 나아가 동양과 세계의 미래와 인류보편적 가치를 추군한 분이므로 우리 한의계의 좌표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Q. 평소 한의약에 대한 생각은?

한의약은 우리의 생활 속에, 또한 우리의 역사와 함께 해온 영원한 친구이자 동반자가 아닌가 생각한다. 특히 우리 민족이 어려울 때, 동포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해준 것이 바로 한의약이다. 그 당시 한약방은 독립운동의 연락거점으로, 강우규 의사와 같은 한의사들은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한 독립운동의 원천과 동력으로서 또는 독립운동가로서도 그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앞으로 잊혀진 한의사들의 독립운동도 정당하게 평가받고, 새롭게 부활되기를 기대하며, 나 역시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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