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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라는 마지막 순간에 당신의 선택은?”김은혜 가천대 한의과대학 조교수 <선생님, 이제 그만 저 좀 포기해 주세요> 저자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한의사로서의 직분 수행과 더불어 한의약의 선한 영향력을 넓히고자 꾸준히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김은혜 교수의 글을 소개한다. 말기 암 환자를 돌보는 의료인이라면 누구나 가슴 속에 무거운 짐으로 남은 이가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내 마음에는 그 짐이 한 명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연마다 방방곡곡에 흩어진 환자들이 여전히 내 안에 살고 있다. 음식만 먹으면 토해 콧줄을 낀 채 금식해야 했던 환자가 너무 먹고 싶다며 애원하던 콜라 한 캔을 딱 잘라 금지했던 어느 날. 더 사는 것도, 아픈 것도 다 상관없으니 그저 딸의 결혼식에만 참석하게 해달라던 그 간절한 부탁을 지켜주지 못했던 어느 날. 미국에서 들어오는 딸의 얼굴을 볼 때까지만 버티게 해달라던 마지막 염원을 이뤄주지 못했던 어느 날. 참 다양한 사연들이 마음에 흉터처럼 남아 흔적을 깊게 새겼다. 그중에는 이런 짐도 있다. “이제껏 항암을 버텨왔고 최근 몇 년을 병원에서만 보냈으니, 지금 이 통증만 좀 잡아주면 죽기 전까지 제발 집에서 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하던 환자의 한탄 섞인 목소리다. 당시 환자 한 명 한 명을 쳐내기 바빴고, 철저히 병원과 의료서비스 중심으로만 사고하던 내게 그 한탄은 그저 말도 안 되는 하소연으로 들렸다. 집으로 찾아가는 의료의 당위성 확인 밥 먹을 기력이 없어 영양제를 매일 맞고,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온몸을 후벼 파는 통증 때문에 진통제에 의지하며, 잠깐 숨을 돌릴 만하면 고열과 기침 가래가 들이닥쳐 항생제를 부어야 하는 생활. 집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당시의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내가 해낼 수 없는 영역이라는 생각에 ‘이해 불가’라는 이름표를 붙여두고 서둘러 합리화했는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십수 년이 흘렀다. 얼마 전 지인 원장님의 배려로 재택의료 현장을 참관할 기회가 있었다. 의료 인프라가 취약한 지역이라 병원에 갈 여력이 없는 이들, 병원은 다니지만 집에서 전혀 관리가 되지 않는 이들, 거동이 불편한데 보호자가 없어 혼자 생활하는 이들이 가득했다. ‘집으로 찾아가는 의료’의 당위성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환자들의 집을 하나씩 들렀다. 그리고 마지막 집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전까지 모든 환자를 묵묵히 마주하던 원장님이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낮게 말씀하셨다. “이 환자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어가시지요.” 방에 들어서자마자 시선이 머문 곳은 발이었다. 엄지는 이미 소실되었고, 둘째 발가락부터 새끼발가락까지 모두 괴사해 발등까지 시퍼렇게 죽어 있었다. 상처를 감싸던 거즈를 하나씩 걷어내자, 이미 둘째 발가락마저 괴사되어 위태롭게 덜렁거렸다.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그 순간이었다. 덜렁거리는 발가락 주변을 살피며 거즈를 빼내는 와중에도 정작 할머니는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처음 보는 우리 얼굴을 그저 두리번거리며 바라볼 뿐이었다. 사랑하는 이와 맞는 삶의 마지막 순간 곁을 지키던 아들은 낯선 이들의 방문에 지나온 일들을 담담히 읊조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들은 은퇴한 경찰관이었다. “혹시나 해서 병원에 또 다녀왔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똑같더군요. 원인은 명확히 모르겠고, 연세가 너무 많아 수술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항생제를 써보겠지만 나이 때문에 강한 약을 쓸 수 없고, 쓴다 한들 발이 호전되기는 어렵다고요. 입원은 시켜줄 수 있지만 해줄 수 있는 건 드레싱뿐이라고 했습니다. 그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병원에 있는 걸 몹시 불안해하셨습니다. ‘빨리 집에 가자’, ‘무섭다’는 말씀만 반복하셨지요. 어차피 통증도 느끼지 못하시는데, 굳이 병원에 계실 이유가 없을 것 같아 집으로 모셨습니다.” 과연 경찰관다운, 명료한 브리핑이었다. 이어진 원장님의 답변 역시 누군가의 집에서 일어나는 이런 비극이 익숙한 듯 담담했다. “그럼에도 병원에 가시는 것을 권합니다.” 원장님이 거듭 청했지만, 아들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셀 수도 없이 다녀왔습니다. 다 떠나서, 혼자 두면 무서워하시는 분을 더 기대할 것도 없는 곳에 홀로 두는 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서류도 다 쓰지 않았습니까. 정리도 끝났습니다.” 아마 연명의료중단동의서를 포함한 서류들을 뜻하는 모양이었다. “이만하면 됐습니다. 충분합니다. 어머니와 시간도 잘 보냈고, 집에 계셨기에 할 수 있는 일들도 다 했습니다. 원장님께서는 그저 '그때'가 언제인지만 판단해 주십시오.” 길어지는 대화와 서류를 챙기는 모습에 나는 슬그머니 방에서 나와 밖에서 기다렸다. 수십 분을 더 머물다 나온 원장님과 함께, 그 집을 마지막으로 재택의료 방문 일정이 모두 끝났다. 그리고 이틀 뒤, 원장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때 보셨던 발 괴사 환자분, 호흡이 멈췄다는 연락을 받고 지금 막 다녀왔습니다. 아드님도, 환자분도 가정이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잘 가셨습니다. 혹시 궁금해하실까 싶어 소식 남깁니다.” 전화를 끊고 한동안 먹먹한 서글픔과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병원의 차가운 기계음 대신 익숙한 집안의 공기 속에서,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맞이하는 마지막. 그것이 그토록 원했던 ‘집에서 죽을 권리’, 즉 재택임종의 실체였다. 이제야 느낀 재택임종의 참된 의미 과거의 나였다면 의학적 관리의 부재를 우려하며 끝까지 병원을 고집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익숙한 방, 익숙한 냄새, 그리고 나를 지켜주는 가족의 존재. 그것이 비록 괴사해 가는 발을 고치지는 못할지언정, 떠나는 이의 영혼만큼은 평온하게 다듬어줄 수 있었기를 바란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 어디에 누워있기를 바랄 것인가. 병원의 고독한 침상인가, 아니면 내가 살아온 삶이 깃든 나의 집인가. 문득 십수 년 전, 집에서 죽게 해달라며 내게 하소연했던 그 환자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를 스쳤다. 이제야 그 마음에 온전히 가닿은 것 같아, 마음 속 오래된 흉터가 조금은 아물어가는 듯했다. -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 16김호철 교수 경희대 한의대 본초학교실 교수 (주)뉴메드 대표이사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김호철 교수(경희대 한의대 본초학교실)의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를 통해 임상 현장에서 자주 제기되는 한약의 궁금증과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최신 연구 결과와 한의학적 해석을 결합해 쉽게 설명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이 기존의 한약 지식을 새롭게 바라보고, 실제 진료 현장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계지탕(桂枝湯). 한의학을 공부한 이라면 누구나 입에 익은 이름이다. 외감풍한의 첫 자리에 놓인 처방이며, 『상한론』 113방의 첫머리에 자리한 처방이다. 그런데 이 처방의 군약인 桂枝가 정작 무엇이었는지를 묻기 시작하면, 천년이 넘는 본초고증학의 미해결 쟁점에 발을 들이게 된다. 장중경의 桂枝는 송대에 와서 다시 그어진 이름 『신농본초경』(2세기경)에는 모계(牡桂)와 균계(菌桂) 두 종이 상품에 수재되어 있다. 다만 이 구분은 산지와 형태에 따른 것이지, 가지와 껍질을 부위로 나눈 것은 아니었다. 한대의 桂는 Cinnamomum cassia 계통의 약재였으나, 그 안에서 부위를 명확히 갈라 약용했다는 기록은 충분치 않다. 장중경의 『상한론』과 『금궤요략』에는 桂, 桂枝, 桂心이라는 명칭이 함께 등장한다. 이 세 이름이 정확히 어떤 부위를 가리켰는지에 대해 학계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일본 학자 진류성(眞柳誠)은 ‘일본동양의학회지’에 23회에 걸쳐 연재한 「임억 등이 장중경 의서의 계류 약명을 계지로 바꾸었다」에서 도발적인 가설을 제시했다. 한대에는 桂, 수당대에는 桂心, 송대에는 桂枝去皮를 사용했고, 이들은 모두 Cinnamomum cassia의 가지껍질·줄기껍질에서 코르크층을 제거한 부위였다는 견해다. 핵심 근거는 송대 임억(林億) 등이 1057년 교정의서국에서 한대∼당대 의서를 교정하면서 원문의 桂를 일률적으로 桂枝로 통일했을 가능성이다. 우리가 오늘 보는 『상한론』의 桂枝는 송대 교정의 결과물일 수 있으며, 장중경이 실제 붓으로 쓴 글자는 그저 桂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계피나무 한 그루에서 나오는 부위들을 같은 약재로 분류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의문이 따라온다. 왜 송대에 이르러 桂가 본격적으로 분화되었는가. 본초학사를 다시 읽으면 임상경험의 누적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흐름이 보인다. 약재가 먼저 갈라져 있었던 것이다. 계피나무는 줄기껍질을 벗기면 형성층이 파괴되어 죽는다. 즉 육계 채취는 나무를 죽이는 작업이다. 그래서 cassia 재배는 6∼10년 키운 나무를 베어 껍질을 한 번에 벗기는 방식이 표준이다. 한 그루를 베면 밑둥의 두꺼운 수피인 판계(板桂)부터 굵은 줄기껍질인 기변계(企邊桂), 윗쪽 줄기껍질인 통계(筒桂), 가지껍질, 어린 가지까지 부위 위계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두꺼울수록 cinnamaldehyde와 procyanidin이 농축되며, 위로 올라갈수록 농도가 떨어진다. 한 나무에서 4∼5단계 등급이 형성되는 셈이다. 한대까지 본초학자들이 어떤 부위를 어떻게 약용했는지에 대한 직접 기록은 충분치 않다. 다만 농축된 수피가 약용의 중심이었으리라는 것이 본초고증학의 흐름이 가리키는 방향이다. 어린 가지 통째가 송대 이전부터 별도 약재로 분명히 인식되었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송대에 들어 도시화, 상품경제, 인쇄문화의 발달, 의서의 광범위한 보급, 약재 유통의 확대가 동시에 일어나면서 본초학의 풍경이 바뀐다. 약재의 등급화와 감별학이 정교해지고, 시장에서 유통되는 부위가 다양해진다. 1092년 진승(陳承)이 『본초별설』에서 어린 가지 자체를 유계(柳桂)라는 이름으로 분리한 것이 그러한 흐름 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전까지 주요 약용 산물로 부각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큰 부위가 약재 영역에 본격적으로 편입된 시점이다. 효능은 임상의 발견이 아니라 법상론이 입힌 언어였다 여기서 결정적인 일이 일어난다. 송대 본초학에는 이미 법상론(法象論)이라는 사유 체계가 자리잡고 있었다. 약재의 형태, 색, 질감, 자라는 자리가 그 약효와 연관된다는 사상이다. 가지는 가벼우니 위로 떠올라 표를 다스리고, 뿌리는 무거우니 아래로 가라앉아 리를 다스린다. 꽃은 가볍고 씨는 무겁다. 속이 빈 것은 통하게 하고 단단한 것은 굳힌다. 약재의 부위와 형태가 그 약효의 방향을 시사한다는 사유다. 송대 본초학자들이 새롭게 마주한 두 산물, 즉 두꺼운 껍질과 어린 가지를 법상론의 사유로 해석하면 결론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두꺼운 것은 무거우니 깊이 들어가고, 가지는 가벼우니 위로 떠오른다. 송대 허숙미(許叔微)는 『상한발미론』에서 “계지탕의 桂枝는 가지의 가늘고 얇은 끝을 쓰며, 두꺼운 육계와는 다르다. 두꺼운 것은 오장을 다스리니 그 무거운 성질을 취하고, 가지는 가벼이 떠올라 상한을 다스리니 그 발산하는 성질을 취한다”고 명문화했다. 이 진술의 문법 자체가 법상론의 정형구를 따른다. 가지는 가벼우니 위로 떠오른다는 표현은 임상경험의 누적과 함께, 송대 본초학의 사유 체계가 그 경험을 빠르게 정당화한 결과로 읽을 여지가 있다. 부위의 분리(1092년 진승)와 효능의 분화(12세기 허숙미)가 짧은 시기 안에 잇따라 명문화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임상경험이 부위 분리 이전부터 누적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송대 본초학의 법상론적 사유가 그 분화를 빠르게 이론화하는 동력으로 작용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같은 패턴이 송대 본초학 전반에 작동한다. 마황의 줄기와 마황근, 당귀의 두·신·미, 황기의 상부와 하부가 모두 송대 이후 부위별로 분화되었고, 법상론의 사유로 효능이 정리되었다. 계의 분화는 본초학사의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송대 본초학 전반에 흐른 사유의 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일본은 桂皮만 쓰고 중국과 한국은 桂枝를 따로 둔다 이후 명대 이시진의 『본초강목』(1578)에서 어린 가지는 계지로, 거친 껍질은 육계로, 안쪽 살은 계심으로 분류하는 체계가 표준화되었고, 청대에 이르러 1742년 『의종금감』과 1769년 황궁수의 『본초구진』에서 어린 가지 계지가 국가적으로 공식화되었다. 오늘날 약전이 정의하는 어린 가지 계지는 한대로부터 약 1500년이 지나서야 정착한 약재다. 이 천년의 분화는 세 나라 한의학의 분기를 만들었다. 일본은 진류성의 본초고증을 받아들여 한대 桂枝가 가지껍질·줄기껍질 계열이라는 입장에 섰다. 일본 약국방은 계피(Cinnamomi Cortex)만을 정식 약재로 인정하고 계지(Cinnamomi Ramulus)를 별도 약재로 두지 않는다. 고방파의 영향 아래 한대 처방의 원형 복원에 무게를 둔 결과다. 일본 한의학의 계지탕에는 어린 가지가 아니라 두꺼운 계피가 들어간다. 반면 중국과 한국은 송대 이후 정착된 분화를 본초학의 정통으로 받아들였다. 중국약전과 대한민국약전은 계지와 육계를 별도 약재로 분리하며, 장중경의 桂枝는 오늘날의 어린 가지로 해석한다. 그러니 우리가 마주한 자리는 이렇다. 장중경이 쓴 桂枝가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 모름의 뿌리에는 효능이 먼저 갈라진 것이 아니라 산물이 먼저 갈라져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갈라진 산물에 송대 본초학의 법상론적 사유가 작동해 효능 분화를 빠르게 정당화했다는 흐름이 놓여 있다. 한 그루의 계피나무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부위 위계가 있었고, 송대의 시장과 사유가 그 위계의 아래쪽까지 약용 영역에 끌어올렸으며, 법상론이라는 사유 체계가 그 산물에 승부와 침강이라는 효능 언어를 입혔다. 본초학은 종종 천년 전부터 흔들림 없이 이어져 온 견고한 체계처럼 표상된다. 그러나 그 안에 발을 들이면, 그 견고함이 실은 약재 산물의 위계, 송대 의가들의 사유 체계, 임상가들의 운용 경험이 만나는 자리에서 거듭 다시 그어진 경계의 흔적임을 보게 된다. 桂枝 한 약재만 들여다봐도 그 흔적이 천 년 동안 출렁이고 있다. 효능은 약재의 물질적 차이와 시대의 사유 체계가 만나는 자리에서 형성된 것이며, 그 형성의 두께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일이 어쩌면 본초학이 가진 가장 단단한 자산일지 모른다. -
대만은 어떻게 협진이 가능한가…한국 의료의 과제와 한계강서원 수원특례시한의사회장 (대한한의사협회 국제이사·경기도한의사회 국제부회장) 최근 몇 년간 경기도한의사회는 대만 신죽시중의사공회와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2019년 교류협력 MOU 체결 이후 양국은 학술교류와 의료정책 공유, 의료기관 참관, 국제행사 협력 등을 꾸준히 확대해 왔다. 특히 올해 제96회 대만 국의절 행사와 한국·대만 학술교류회에 참석하며 다시금 느낀 것은 대만이 단순히 전통의학을 보존하는 수준을 넘어 ‘현대의료 체계 안에서 중의약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 매우 현실적이고 전략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 “환자 중심 협진”…대만이 보여준 중의·서의 공존 모델 대만의 의료 현장을 접할 때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중의학과 서양의학이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한의학과 의학의 관계가 대립과 갈등의 프레임 속에서 논의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대만에서는 환자 중심이라는 원칙 아래 두 체계가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었다. 특히 중국의약대학 부속병원 참관 과정은 많은 생각을 남겼다. 병원 내에는 중의치료실과 중의 전문 외래가 별도로 운영되고 있었고, 환자들은 필요에 따라 중의와 서의를 선택하거나 함께 이용하고 있었다. 의료진 또한 이를 특별한 ‘직역 충돌’로 인식하지 않았다.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이라면 협력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의 중의약 활용이었다. 대만은 팬데믹 시기 중의약을 단순 보조요법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대응 체계 속에서 적극 활용했다. 중의약 신약인 ‘청관1’, ‘청관2’를 개발해 해외로 수출했고, 감염 예방과 후유증 관리에도 중의약을 폭넓게 적용했다. 실제로 대만에서는 코로나19 이후 중의약 이용률이 20% 이상 증가했다는 설명도 들을 수 있었다. 이는 단순히 전통의학을 보호했기 때문이 아니다. 국가가 중의약을 보건의료 자산으로 인정하고, 연구·임상·산업화·보험체계와 연결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대만은 중의약을 문화로만 다루지 않았다. 의료이자 산업이며 공공보건 자원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었다. 실제로 대만의 제약회사 ‘코다(Ko Da Pharmaceutical, 科達製藥)’를 방문했을 당시 관계자로부터 매우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 제약회사와 협업해 대만의 중약제제를 한국에 수출하고, 한국의 한약제제를 대만으로 수입하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이는 단순한 상품 교역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양국 전통의학이 상호 보완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였기 때문이다. ◆ ‘중의재택의료’의 진화…대만은 어떻게 돌봄체계를 만들었나 대만은 의료뿐 아니라 제도 설계에서도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최근 경기도한의사회와 신죽시중의사공회가 공동 개최한 학술교류회에서는 대만의 중의재택의료 모델과 장기요양 3.0 시스템에 대한 발표가 진행됐다. 대만에서는 중의사가 재택에 방문해 침 치료와 한약 처방, 건강관리 지도, 식이 상담 등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지역 의료기관과 재택의료팀이 유기적으로 연계돼 환자를 지속 관리하는 구조가 이미 정착돼 있었다. 특히 환자 신청부터 초기 평가, 방문진료, 사례관리까지 단계별 프로세스가 체계적으로 구축돼 있다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단순 방문진료가 아니라 ‘지역사회 통합돌봄’ 체계 안에서 중의약이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 역시 초고령사회 진입과 함께 재택의료와 지역돌봄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직역 갈등과 제도적 장벽 속에서 논쟁을 반복하고 있다. 한의사의 역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보다는, 무엇을 제한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만의 경험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왜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의료 자원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가. 왜 환자 중심의 협력 모델 대신 직역 중심의 대립 구조를 반복하고 있는가. 물론 대만의 시스템을 그대로 한국에 적용할 수는 없다. 의료 환경도 다르고 역사적 배경도 다르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대만은 전통의학을 현대의료 안에서 활용 가능한 자산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이를 실제 정책과 산업, 공공보건 체계 안으로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한국도 한의학을 단순한 보완 영역이 아니라 미래 의료체계 안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고령화와 만성질환 증가, 감염병 위기와 돌봄 공백이라는 현실 앞에서 단일 의료체계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대만은 이미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 ‘가능한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언제 시작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
치매 진단 소견서 발급권 차별 문제와 해결 방안박규찬 법학박사(전 국회 수석전문위원) 1. 개 요 상위 법률인 「치매관리법」은 치매 진단 권한을 한의사와 양의사 모두에게 인정하고 있고, 「장기요양보험법」에서도 장기요양인정을 신청하기 위한 소견서 발급 권한을 한의사나 양의사 모두에게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하위 규범인 「장기요양급여 제공기준 및 급여비용 산정방법 등에 관한 고시」에서는 양의사는 전문의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양의사에 대하여 소견서(치매진단 관련 양식) 발급 권한을 인정하고 있으나, 한의사는 한방신경정신과 전문의에 한하여 소견서 발급 권한을 인정함으로써 치매관리법에서 인정한 한의사의 치매 진단권, 장기요양보험법에서 인정한 소견서 작성권을 부당하게 제한하고 있다. 이러한 장기요양인정 신청시 첨부하는 서류인 치매 진단 소견서를 발급하는 권한과 관련한 한의사에 대한 차별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헌법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첫째, 한의사에 대해서는 한방신경정신과 전문의인 경우에만 소견서 작성권을 인정하는 것은 한의사를 양의사에 비하여 합리적인 이유없이 차별하는 것으로서 우리 헌법 제11조에서 인정하고 있는 평등권을 침해하고 있다. 둘째, 이러한 행위는 치매관리법 제2조에서 치매 진단권을 제한없이 의사 및 한의사 모두에 대하여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위 규정인 고시를 통하여 한의사의 치매 진단권을 부당하게 제한하는 것으로서 하위법인 고시로 상위 법률들을 위반한 것이다. 셋째, 헌법 제37조 제2항에 따라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기 위해서는 국회에서 제정한 법률로만 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법률의 근거없이 하위규정인 고시를 통하여 한의사의 치매 진단권을 제한하는 것은 우리 헌법의 기본원리인 법률유보 원칙에 반한다는 것이다. <장기요양등급 판정을 위한 소견서(치매진단 관련 양식) 관련 규정> 규정 내용 법률(치매관리법, 노인장기요양보험법) 「치매관리법」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2. “치매환자”란 치매로 인한 임상적 특징이 나타나는 사람으로서 의사 또는 한의사로부터 치매로 진단받은 사람을 말한다. 「노인장기요양보험법」 제13조(장기요양인정의 신청) ①장기요양인정을 신청하는 자(이하 “신청인”이라 한다)는 공단에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장기요양인정신청서(이하 “신청서”라 한다)에 의사 또는 한의사가 발급하는 소견서(이하 “의사소견서”라 한다)를 첨부하여 제출하여야 한다. 다만, 의사소견서는 공단이 제15조제1항에 따라 등급판정위원회에 자료를 제출하기 전까지 제출할 수 있다. ③의사소견서의 발급비용ㆍ비용부담방법ㆍ발급자의 범위, 그 밖에 필요한 사항은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한다. 「치매관리법」은 의사 및 한의사 모두에 치매 진단권 인정 「노인장기요양보험법」은 의사 및 한의사 모두에 장기요양인정신청을 위한 소견서 발급 권한을 인정 노인장기요양보험법 시행규칙 제2조(장기요양인정 신청 및 의사소견서 제출) ① 법 제13조제1항에 따라 장기요양인정을 신청하려는 자(이하 “신청인”이라 한다)는 별지 제1호의2서식의 장기요양인정신청서에 별지 제2호서식에 따른 의사 또는 한의사의 소견서를첨부하여 제출하여야 한다. 제4조(의사소견서 발급비용 등) ① 법 제13조제3항에 따른 의사소견서의 발급비용은 의료기관의 종류에 따라 보건복지부장관이 정하여 고시하는 금액으로 한다. 장기요양급여 제공기준 및 급여비용 산정방법 등에 관한 고시 제78조(의사소견서 및 방문간호지시서 발급비용) ③ 의사소견서 발급비용은 공단이 규칙 별지 제3호 서식으로써 의사소견서 발급을의뢰하여 발급된 경우에 산정한다. 이 경우보건복지부 장관이 정하는 치매진단관련 양식은 보건복지부에서 정한 의사소견서 작성교육을 이수한 의사, 한의사(한방신경정신과 전문의에 한한다)가 발급한 경우에 한하여 인정하고, 「의료법」에따른 의료기관(보건의료원 포함)은 29,220원, 「지역보건법」에 따른 보건소 및 보건지소는 26,510원을 산정한다. 장기요양인정 신청을 위한 치매진단 소견서 발급시, 한의사에 대해서만 한방신경정신과 전문의에 한정하여 소견서 발급권 인정 2. 소견서 발급권 차별의 헌법적 문제점 1) 평등권 침해 장기요양인정 신청을 위한 치매 진단 소견서 작성시 한의사를 양의사에 비하여 차별하는 관련 고시의 내용은 헌법 제11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헌법상의 기본권인 평등권 침해의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우리 헌법은 제11조에서 평등권을 규정하고 있으나, 평등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이는 구체적인 해석을 통하여 보충되어야 할 성질의 것으로 보고 있다. 평등권은 우선 ‘본질적으로 같은 것은 같게,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다르게 취급하였다고 하여 곧 평등권 위반이 되는 것은 아니고, 차별대우가 헌법적인 정당성을 갖지 못하는 경우에 평등권 위반이 되는 것이다.1) 평등권의 심사기준, 즉 차별대우가 헌법적으로 정당화되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크게 ‘자의(恣意)금지의 원칙’과 ‘비례의 원칙(과잉금지의 원칙)’이 제시되고 있다. 자의금지의 원칙은 어떠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합리적인 이유가 결여된 차별은 위헌적인 차별로서 금지된다고 하는 것이다. 자의금지의 원칙은 차별에 합리적인 이유만 있으면 평등권 침해가 아니라는 것으로서 비교적 완화된 평등권 심사기준이다. 특히 이 기준이 적용되는 경우는 국회가 입법으로 차별대우를 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경우에는 헌법상의 ‘권력분립의 원칙’이나 국회의 ‘광범위한 입법형성의 자유’를 인정하여 평등권 심사에 있어서 완화된 기준인 자의금지의 원칙을 적용하게 된다. 비례성 원칙 또는 과잉금지의 원칙은2) 평등권 심사에 있어서 보다 엄격한 기준으로, 정당한 차별 목적이 존재하여야 하고(목적의 정당성), 차별대우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적합한 것이어야 하며(수단의 적합성), 차별대우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불가피한 것이어야 하고(침해의 최소성), 차별을 정당화하는 이유와 차별대우 사이에 균형관계가 있어야 한다(법익의 균형성)는 원칙이다. 이 비례성 원칙은 주로 자유권에 대한 제한(차별대우)에 있어서 적용되는 심사기준이다. 한의사의 치매 진단권 내지는 소견서 발급 권한은 우리 헌법 제15조가 규정하고 있는 직업의 자유 중 직업행사의 자유의 한 내용인바, 관련 고시의 내용은 국민의 기본권인 직업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므로 보다 엄격한 기준인 비례성의 원칙에 따른 심사를 받아야 한다. 이에 따를 경우, 당해 고시의 내용은 차별 목적의 정당성은 인정될 수 있을지언정, 한의사에 대한 차별대우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 될 수 없고, 한방신경과 전문의가 아닌 한의사에 대해서는 치매진단 소견서 작성 권한을 원천적으로 박탈함으로써 법익 침해의 정도가 극심하여 법익의 균형성도 결여되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장기요양인정 신청을 위한 치매 진단 소견서 작성시 한의사를 양의사에 비하여 차별하는 관련 고시의 내용은 우리 헌법 제37조 제2항에서 인정하고 있는 헌법상의 원칙인 과잉금지 원칙 또는 비례성 원칙을 위반함으로써 헌법 제11조의 평등권을 침해한 위헌 규정이라고 할 것이다. 2) 상위 법률 위배 일반적으로 법령 상호 간에는 일정한 위계가 있는바, 하위법은 상위법을 위반하여서는 안 된다. 즉, 법률은 헌법을 위반해서는 안 되고, 대통령령이나 부령은 법률을 위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위 「장기요양급여 제공기준 및 급여비용 산정방법 등에 관한 고시」는 그 형식은 행정규칙으로 법률의 하위 규정인 것이 명백하다. 그런데, 치매관리법 제2조에서 치매진단권을 한의사 및 양의사 모두에게 인정하고 있고, 장기요양보험법 제12조도 장기요양인정 신청을 위한 소견서 작성 권한을 한의사와 양의사 모두에게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한의사 및 양의사의 치매 진단권 또는 소견서 작성 권한은 법률에서 어떠한 유보도 없이 완결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으로서, 하위 법령에 의한 제한을 예정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요양급여 제공기준 및 급여비용 산정방법 등에 관한 고시」는 한의사에 대해서만 치매 진단권 내지 소견서 작성 권한을 제한하고 있는바, 이는 상위법인 치매관리법과 장기요양보험법을 명백히 위반한 위법한 고시인 것이다. 또한, 「장기요양급여 제공기준 및 급여비용 산정방법 등에 관한 고시」 제78조 제3항은 상위법에서 위임받지 않은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상위법을 위반하고 있다. 즉 고시 제78조 제3항은 그 근거 법령이 장기요양보험법 제13조 제3항 및 동법 시행규칙 제4조 제1항인데, 위 근거 법령들이 동 고시에 위임한 사항은 소견서의 발급비용에 관한 사항만임에도 불구하고 소견서 발급 권한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상위 법령이 위임한 사항을 넘어 규정한 위법이 있다. 3) 법률유보 원칙 위배 법률유보의 원칙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제한은 입법자에게 유보되어야 한다는 원칙으로 헌법상의 기본원리인 법치주의의 한 표현이다. 즉,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기 위해서는 국회가 제정한 법률에 의하거나 법률에 그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헌법은 제37조 제2항에서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라고 하여 법률유보의 원칙을 선언하고 있다. 아울러 국민의 기본권을 법률로써 제한하더라도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제한하여야 하고(과잉금지의 원칙), 그 본질적 내용은 침해할 수 없도록(본질적 내용의 침해금지원칙) 함으로써 기본권 제한의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 한의사의 치매 진단권 또는 소견서 작성권은 국민의 한 사람인 한의사의 기본권인 직업의 자유의 한 내용이다.3) 그런데, 이와 같은 헌법상의 권리인 직업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서는 국회가 제정한 법률에 의하거나 법률에 그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치매관리법 또는 장기요양보험법 어디에도 한의사의 치매 진단권 내지 소견서 작성 권한을 제한하는 규정이 없고, 하위 법령에 그 제한의 가능성을 위임한 규정도 없다. 그런데, 「장기요양급여 제공기준 및 급여비용 산정방법 등에 관한 고시」는 아무런 법률상의 근거없이 한의사의 치매 진단권 내지 소견서 작성 권한을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한의사에 대해서 치매 진단권 내지 소견서 작성권을 제한하는 위 고시는 법률상의 근거가 없는 것으로서 우리 헌법상의 원칙인 법률유보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다. 3. 소견서 작성권 차별에 대한 대응방안 1) 행정소송 가) 고시 자체에 대한 행정소송 행정소송 중 항고소송(취소소송, 무효 확인 소송 등)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처분성이 인정되어야 하는바, 처분이란 행정청이 행하는 구체적 사실에 관한 법집행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행정청에 의한 법령 제정작용의 산물인 법규명령이나 행정규칙은 일반·추상적인 법규범으로서 구체적 사실에 관한 집행작용이 아니므로 취소소송 등 항고소송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일반적이다.4) 그러나 대법원판례는 법령·조례가 구체적 집행행위의 개입 없이 그 자체로서 직접 국민에 대하여 구체적 효과를 발생하여 특정한 권리의무를 형성하게 하는 경우 항고소송의 대상이 된다고 하고 있다.5) 법규적 효력이 있는 고시의 경우에도 그 자체로서 직접 국민의 구체적인 권리의무나 법적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등의 법률상 효과를 발생하는 경우에는 행정처분으로 보아 행정소송이 가능하다.6) 사안의 경우에도 「장기요양급여 제공기준 및 급여비용 산정방법 등에 관한 고시」규정이 그 자체로 직접 한의사의 치매 진단을 위한 소견서 작성권을 제한하고 있으므로 항고소송으로 취소소송이나 무효확인소송 등이 가능할 것이다. 나) 거부 처분에 대한 행정소송 우리 대법원판례는 고시에 대하여 사안에 따라 처분으로 보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7) 만약 「장기요양급여 제공기준 및 급여비용 산정방법 등에 관한 고시」에 대하여 처분성을 부정하여 항고소송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법원이 판단할 경우에는 행정청의 구체적 집행행위를 기다려 행정소송을 제기하여야 할 것이다. 즉, 한의사가 작성한 소견서를 첨부한 장기요양인정 신청서를 담당 기관이 접수를 거부하면, 그 접수 거부처분에 대하여 취소소송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처분에 대한 행정소송 과정에서 재판을 위한 선결문제로서 위 고시의 위헌·위법 여부에 대한 심사를 하게 될 것이다.8) 다만, 장기요양인정 신청 수리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이 행정청이 아닌 공공기관일 경우에는 소송의 방식과 관련하여 다툼이 있다.9) 이는 공공기관의 행위를 행정소송의 대상이 되는 처분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대법원판례의 입장은 공공기관 중 공기업이나 준정부기관의 행위에 대해서는 처분성을 인정하고 있고, 기타 공공기관의 경우에는 처분성을 부정하고 있다.10) 따라서 해당 업무를 담당하는 공공기관의 성격에 따라 그 다투는 방식은 행정소송과 민사소송으로 달라질 수 있다. 2) 헌법소원 가) 고시 자체에 대한 헌법소원 이는「장기요양급여 제공기준 및 급여비용 산정방법 등에 관한 고시」 자체에 대하여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법 제68조에 의해 공권력의 행사 또는 불행사로 인하여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받은 자는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할 수 있는바, 우리 헌법재판소는 판례를 통하여11) 법령이 집행행위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경우에는 보충성의 예외로서 헌법소원이 허용된다고 하고 있다.12) 나아가 그 법령에 따른 집행행위가 성질상 기속행위에 해당하여 국민의 권리관계가 집행행위의 유무나 내용에 의하여 좌우될 수 없을 정도로 확정적인 상태라면 법령에 의한 기본권 침해의 직접성이 인정되는 것이므로 역시 헌법소원을 인정하고 있다.13) 사안의 경우는「장기요양급여 제공기준 및 급여비용 산정방법 등에 관한 고시」에 의하여 집행행위의 개입 없이 직접 한의사의 치매 진단 소견서 작성권이 침해받는 경우라 할 것이고, 설사 행정권의 집행행위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집행행위는 기속행위로서 한의사의 소견서 작성권 침해는 확정적인 것이므로 기본권 침해의 직접성을 인정할 수 있으므로 치매 진단 소견서 작성에 있어 차별을 받는 한의사는 헌법소원을 제기할 수 있다. 나) 법원의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 2026년 3월 12일 헌법재판소법의 개정에 따라 그동안 헌법소원심판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법원의 재판에 대해서도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할 수 있게 되었다.14) 따라서 한의사가 「장기요양급여 제공기준 및 급여비용 산정방법 등에 관한 고시」에 따른 처분 또는 고시 그 자체에 대하여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패소한 경우라면 패소한 확정 재판을 대상으로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함으로써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받아볼 수 있다. 1) 한수웅, 헌법학, 박영사, 2017, 581면 2) 과잉금지 원칙은 법치국가 원리, 자유권의 본질 등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 원칙이 구체화 된 헌법 규정이 헌법 제37조 제2항인바, 이는 기본권 제한 입법의 헌법적 한계로서 과잉금지 원칙을 규정한 것이다. 3) 직업의 자유 중 직업수행의 자유에 해당한다. 4) 하명호, 행정법, 박영사, 2025. 627∽628면. 5) 대법원 1996. 9. 20. 선고 95누8003 판결 6) 대법원 2006. 9. 22. 선고 2005두2506 판결. 이는 이른바, ‘약가고시 사건’으로 특정 제약회사의 특정 약제에 대하여 상한금액을 특정금액으로 인하하는 내용의 고시를 항고소송의 대상이 되는 처분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7) 하명호, 행정법, 박영사, 2025. 629면, 1991. 8. 27. 선고 91누1738 판결 등 8) 헌법 제107조 제2항에서 명령이나 규칙이 헌법이나 법률에 위반되는 여부가 재판의 전제가 된 경우에는 대법원이 이를 최종적으로 심사하도록 하고 있다. 9) 민사소송설과 행정소송설의 대립이 있다. 10) 대법원 2010. 11. 26. 2010무137 결정 11) 헌재 1992. 11. 12. 선고 91헌마192 등 12) 한수웅, 헌법학, 박영사, 2017, 1456면 13) 헌재 2008. 6. 26. 2005헌마173 등 14) 헌법재판소법 제68조 제3항 제1항에 따라 청구된 헌법소원심판 중 법원의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은 확정된 재판을 그 대상으로 하며,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 한정하여 청구할 수 있다. 1. 법원의 재판이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반하는 취지로 재판함으로써 기본권을 침해한 경우 2. 법원의 재판이 헌법과 법률에서 정한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아니함으로써 기본권을 침해한 경우 3. 법원의 재판이 헌법과 법률을 위반함으로써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 명백한 경우 -
“글로벌 천연물 규제과학의 허브로 토대 다지겠다”[한의신문] 동남권 천연물 안전관리의 허브 구축을 목표로 출범한 천연물안전관리연구원(이하 연구원)의 초대 원장인 최준용(전 부산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한방병원 교수) 신임 원장으로부터 연구원의 역할과 비전을 들어봤다. Q. 연구원의 출범 배경과 비전은? 2017년 경남 양산시 일원에 동남권 의생명특화단지 조성이라는 지역 공약 추진을 위해 부산대학교 양산캠퍼스, 양산부산대학교병원, 부산대한방병원 등이 경상남도, 양산시와 함께 기획안을 마련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천연물임상지원센터’라는 초안을 작성했고,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면서 부처 기능과 역할에 맞도록 사업안을 수차례 수정했다. 이후 ‘천연물안전지원센터’로 방향이 정리됐고, 2020년 식약처 지원으로 1.5억 규모의 타당성 조사 기획과제를 수행했다. 개인적으로 부산대한방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연구자로서 한약·한약제제의 기초·임상 연구를 수행하면서 여러 현실적인 문제를 지속적으로 체감해 왔다. 특히 한약과 한약제제 등 천연물을 원료로 하는 의약품은 천연물의 기원 문제, 위품 혼입, 제제약의 품질관리 문제 등이 꾸준히 제기됐다. 또 케미컬 의약품이나 바이오·재생의료 분야에 비해 국민 신뢰도가 상대적으로 낮고 시장 성장도 충분치 못한 점, 전통의학의 오랜 경험과 자산에도 세계 천연물 시장에서 우리나라가 충분한 경쟁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보며, 안전하고 품질 높은 한약과 한약제제를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전문기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이후 2021년에는 로드맵 및 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기획과제를 추가로 수행했고, 2022년 설계에 착수했다. 2023년부터 건축이 진행돼 2025년 12월17일 준공됐고 약사법 개정(2026년 11월 시행 예정)을 통해 법인 설립의 기반이 마련됐다. 이를 바탕으로 2026년 1월 식약처 산하 재단법인인 천연물안전관리연구원이 정식 출범하게 됐다. 연구원의 핵심 추진 전략은 ‘과학적 품질관리 기술개발(Science)’, ‘생산 및 제품화 지원(Support)’, ‘시설·인력 등 인프라 구축 지원(Synergy)’의 3S로 설정했으며, 이에 맞춰 세부적인 중장기 과제를 수립하고 있다. 연구원의 핵심 역할은 기존 천연물 관련 시험·분석 기술을 고도화하고, 품질 및 안전과 관련한 약리 기반 AI기술 등 첨단기술을 도입해 국민이 보다 안전하고 품질 좋은 천연물 유래 의약품을 사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있다. 중장기적 목표로는 세계적 수준의 규제과학 역량을 확보해 해외 의약품 규제를 전문적으로 분석하고 국내 기업의 품질관리 기술을 높여 우수한 국산 천연물의약품이 세계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Q. 식약처가 강조하는 ‘천연물 의약품의 전주기적 안전관리 체계 구축과 천연물 산업 활성화’라는 목표를 지원하기 위한 연구원의 중요한 기능은 무엇인지요? 전주기란 의약품의 원료가 되는 천연물의 기원과 재배환경에서부터 시작해, 주로 건조한 동식물·광물 등의 한약재 제조과정, 한약·생약제제의 원료의약품과 완제의약품에 대한 다양한 시험·분석 방법, 개발 전 단계의 인허가에 필요한 의약품 규제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런 안전관리는 한 단계라도 놓치면 국민 건강에 직접적 위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식약처 규제 및 심의 업무를 과학적 연구개발 측면에서 적극 보조·보완하는 역할이 중요하다. 또한 우수한 안전관리 기술을 국내외에 적극 알리고, 이를 통해 한약재와 한약·생약제제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 보건의료인과 국민이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결국 시장의 확대와 산업 활성화도 자연스럽게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구원은 식약처의 공식적인 규제와 심의업무를 보다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는 전문 산하기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Q. 연구원은 AI와 디지털을 어떻게 한의약과 접목할 계획인지? 천연물은 성분의 복잡성과 다양성이 매우 큰 분야이기 때문에, AI와 디지털 기술이 도입될 경우 가장 혁신적인 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미 식약처에서도 AI를 활용한 한약재 관능검사학습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천연물의 경우, 산지와 재배 조건에 따라 축적되는 방대한 성분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디지털화하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 기반으로 AI 이미지 인식기술과 다성분 분석모델을 결합하면, 지능형 품질판별 및 진위감별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 다만 이런 시스템이 실제 작동하기 위해선 각 요소에 대한 개별적이고 충분한 연구가 선행돼야 한다. 또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다면 천연물의 재배부터 유통까지 전주기 이력관리 플랫폼을 구축할 수 있어, 보다 투명하고 신뢰도 높은 관리가 가능할 것이다. 당장 모든 것을 구현하기보다, 향후 이러한 기술들이 현실화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 나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Q. 산·학·연·병 협력 플랫폼으로서 연구원이 국내 천연물 산업계에 제공할 수 있는 지원은? 연구원이 위치한 부산대학교 양산캠퍼스 일대에는 비수도권 최대 규모의 의료클러스터가 조성돼 있다. 상급종합병원, 재활병원, 어린이병원, 한방병원, 치과병원 등이 집적돼 있으며, 의·치·한·간호학과 등 보건의료계열 대학과 정보의생명공학대학이 함께 위치하고 있어 천연물 관련 제품의 초기 아이디어 발굴부터 제품 승인과 임상까지 전 주기적 연구가 가능한 매우 우수한 기반을 갖추고 있다. 또 인근의 부산항은 우리나라 한약재 수입 통관의 가장 중요한 항구다. 때문에 연구원은 천연물 산업 육성을 위한 연구개발과 안전관리에 매우 적합한 입지라고 생각한다. 산업계와 기업에 대해서는 제품화 연구개발 과정에서 필요한 다양한 전문가의 컨설팅을 연구원 플랫폼을 통해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동남권에 위치한 한약재 제조업체들에게는 개방형시험실 서비스를 통해 한약재 확인시험과 필요 시 지표성분 및 유효성분 확인 등을 통해 hGMP에 효율적인 대응이 가능해 질 것으로 보인다. 한약재 제조업체 이외의 천연물 유관 기업, 대학, 병원 등과도 협업을 통해 연구 및 개발(R&D), 아이디어 구체화 가설 검증, 시제품 제작, 기술 사업화까지 폭넓은 품질관리 지원이 가능할 것이다. 아울러 한약·생약제제 생산 제약회사에는 의약품 기준 및 시험법 지원, 제품화를 위한 한약 조성 설정, 임상시험 관련 자문 등 실질적 컨설팅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연구원이 이제 막 출범한 신생기관인 만큼,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지원은 개방형시험실을 통한 한약재 품질관리 지원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대한약전과 대한약전외한약(생약)규격집에 수록된 여러 시험법을 실제 산업현장에서 보다 현실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개선해 기업의 부담을 줄여주는 역할에 우선 집중하고자 한다. Q. 기존 한약 산업과의 연계 또는 지원 방향은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지? 한약재의 품질관리는 연구원의 매우 중요한 핵심 업무 가운데 하나다. 상당수의 hGMP 한약재 제조업체는 규모가 영세해 충분한 자체 품질관리 시스템을 갖추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식약처가 운영하는 개방형시험실 서비스는 이러한 소규모 한약재 제조업체들이 필요한 시설과 장비를 활용해 품질관리와 hGMP 기준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다. 현재까지 서울 1개소에서만 운영되고 있었는데, 올해부터 연구원 내에도 개방형시험실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목표다. 장기적으로는 천연물 단계에서부터 한약재의 기원과 진위를 보다 과학적으로 검증하고, 생산부터 유통까지 이력을 추적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한약산업 전반의 신뢰도를 높이고 보다 안정적인 품질관리 기반을 마련코자 한다. Q. 국내 기업의 국제 경쟁력 강화를 위해 어떤 전략을 구상하고 있는지? 천연물의약품의 세계시장은 매우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다. 중국, 대만, EU, 미국 등 여러 국가에서 한의학에서 활용되는 소재를 포함한 다양한 천연물을 추출·가공해 시장에 적극 진출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우수한 기술력과 전통의학의 경험이 있음에도, 까다로운 해외 규제의 장벽을 넘지 못해 글로벌 시장 진출이 상당히 제한적인 상황이다. 천연물안전관리연구원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천연물의약품 분야의 규제외교’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자 한다. 단순히 규정을 해석하는 수준을 넘어, 각국의 규제 체계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통과할 수 있는 규제기술 역량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 필요할 경우, 외교적 협력과 제도적 지원까지 연계해 국내 기업들이 해외 시장에 보다 안정적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연구원의 중장기적인 목표다. Q. 신뢰받을 수 있는 천연물(한약재)의 위상 제고를 위해 어떤 계획을 설정하고 있는가? 신뢰받을 수 있는 천연물의 출발점은 무엇보다 천연물의 품질과 안전관리다. 여기에 더해 가공된 한약재의 품질 확보, 제약회사에서 제조하는 다양한 제형의 한약·생약제제 및 천연물의약품에 대한 과학적이고 엄격한 품질관리가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 그동안 다소 침체되고 위축됐던 한약과 한약·생약제제 시장이 다시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품질관리뿐 아니라 적극적인 홍보와 신뢰 회복 노력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홍보성 광고를 넘어, 엄격하고 과학적으로 검증된 데이터를 축적하고 이를 국내외 유수 학술지에 발표하며, 그 결과를 국민들이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또 해당 분야와 관련한 ISO 국제 표준을 선도해 천연물 안전관리 분야의 선진국으로 발돋움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해야 하겠다. 제약회사들도 품질관리가 까다로운 의약품들을 연구원과 협력해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제품화에 성공할 수 있다면, 국민의 신뢰는 자연스럽게 회복될 것이다. 나아가 국민의 신뢰는 국내시장의 활성화는 물론 해외시장 진출의 기반이 돼, 우리나라 천연물의약품 산업의 경쟁력을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Q. 향후 대한한의사협회와의 협력 방안은? 한약재 및 한약제제 품질의 개선은 한의사의 처방 확대, 국민의 신뢰도 상승 및 시장 확대라는 바람직한 현상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기에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연구원은 대한한의사협회와 양방향 소통을 통해 연구 주제의 발굴, 연구결과 홍보 등을 계속해 나가기를 희망한다. -
醫史學으로 읽는 近現代 韓醫學 (566)김남일 교수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2000년 4월23일 타이완 중국의약대학부속병원에서 ‘제4회 立夫中醫藥學術獎演講會(FOURTH LIFU ACADEMIC AWARD FOR CHINESE MEDICINE)’를 개최할 때 경희대 류기원(柳基遠) 교수(1940〜2024)가 강연한다. 류기원 교수가 2005년 경희대 의사학교실에 기증한 자료에 이 강연회에서 만든 자료집이 포함되어 있다. 자료집에 따르면 본 강연은 4월23일 오후 1시30분부터 5시40분까지 강좌마다 40분씩 모두 5강좌가 진행됐다. 강연 장소는 중국의약대학 부속병원의 立夫醫療大樓 21층 국제회의실이었다. 강연에 앞서 치사를 한 인물은 陳立夫, 黃維三, 謝明村, 蔡長海 등 관계자들이었고, 발표자는 경희대 류기원, 日本 北里硏究所의 山田陽城, 國立中醫藥硏究所의 陳介甫, 버지니아대학의 David J. Mayer, 中國中醫硏究院 鍼灸硏究所의 朱麗霞 등이었다. 류기원 교수의 강연은 오후 2시부터 2시40분까지 첫 번째로 진행되었다. 좌장은 林昭庚·謝慶良 교수였고, 통역은 경희대 이혜정 교수가 진행했다. 강연의 제목은 「難病之中醫治療」(앞쪽 강연 제목에서 이렇게 되어 있지만, 뒤쪽 메인 논문에는 제목이 「疑難病的醫方治療」로 되어 있음)였다. 류기원 교수는 인천시 강화군 출신으로서 경희대 한의대를 1964년 13기로 졸업하고 경희대 한의대에서 한방내과학(제3내과) 교수로 근무했다. 그는 한의학회 이사장, 한방병원협회 회장, 한방내과학 회장, 경희대 한방병원 원장 등을 역임했다. 류기원 교수의 강의를 위해 제출된 논문은 「疑難病的醫方治療」였다. 류기원 교수는 난치병으로 ①베제트씨병 ②중증무력증 ③만성신장병 ④전신성 홍반 ⑤이명 및 현훈 ⑥천식 ⑦말초혈관폐색증 ⑧과민성질환 ⑨갑상선기능이상 ⑩면역기능이상으로 인한 질병, ⑪중풍 및 후유증 ⑫만성소화계통질환 ⑬각종 癌症 등을 꼽고 있다. 13종의 질환에 대해 그는 임상표현, 한의학적 병리관, 예후 및 치료, 처방의 순서로 정리하고 있다. 지면 관계상 그가 제시한 처방들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베제트씨병: 태음인청폐사간탕, 용담사간탕, 방풍통성산, 지유탕, 오폐산. ②중증무력증: 빈소산, 사군자탕, 사물탕, 빈소천마탕. ③만성신장병: 가감위령탕, 청신건비탕, 청심연자탕, 실비음, 목방기탕. ④전신성 홍반: 가감위령탕, 태음인청폐사간탕, 용담사간탕, 시호억간탕. ⑤이명 및 현훈: 반하백출천마탕, 비소산, 자금정, 우황청심환, 사향소합원, 태음인청폐사간탕, 용담사간탕. ⑥천식: 心源性哮喘은 분심기음, 사향소합원, 조위승청탕, 기관지성 효천은 조위승청탕, 청심연자탕, 육미지황원, 팔미환, 신기환, 이진탕, 보폐연자탕, 청상보하탕. ⑦말초혈관폐색증: 육묘탕, 시우담주, 해독제생탕. ⑧과민성질환: 과민성 비염은 청상견통탕, 조위승청탕, 소음인보중익기탕, 반하백출천마탕, 소양인독활지황탕, 소양인형방지황탕, 육미지황탕, 과민성 피부염은 승마갈근탕, 청기산, 태음인청폐사간탕, 방풍통성산, 은화사간탕가감방, 평위건비탕. ⑨갑상선기능이상: 청심연자탕, 태음인청폐사간탕, 자감초탕, 분심기음, 십육미유기음, 청간해울탕. ⑩면역기능이상으로 인한 질병: 보중익기탕, 육미지황탕. ⑪중풍 및 후유증: 우황청심원, 사향소합원, 성향정기산, 오약순기산, 유풍탕, 태음인청폐사간탕, 소음인보중익기탕, 형방지황탕. ⑫만성소화계통질환: 반하백출천마탕, 보심건비탕, 정전가미이진탕. ⑬각종 癌症: 육군자탕, 대시호탕, 보중익기탕, 소음인보중익기탕. -
신미숙 여의도 책방-76신미숙 국회사무처 부속한의원 원장 (前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편집자주] 『신미숙의 여의도 책방』은 각 회마다 1개의 키워드에 5권의 도서를 추천하는 형식으로 이어갑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부침을 겪는 정부 조직이 있다. 2005년 김대중 정부에서 출범했었던 여성가족부(약칭 여가부)는 명칭과 기능을 두고 특정 정권 때마다 존폐의 기로에 선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여가부 폐지가 대선 캠페인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이대남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기도 했다.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에 거부감과 공격성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온·오프라인의 짧은 글이나 밈을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은 ‘우리 모두는 어머니로부터 생성된 존재들 아닌가?’이다. 여가부는 작년 9월 성평등가족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맘충, 페미충 등 범람하는 여성혐오 문화의 시작점이 순차적으로 치유될 수 있다면 연이은 세대갈등이나 이념갈등 결국은 사회갈등도 조금씩은 완화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지난 5일 새벽 광주에서 발생한 여고생 살인사건의 피의자 장모씨는 경찰서로 연행되는 과정에서 범행 동기에 관한 기자의 질문에 “여학생인 걸 알고 한 건 아닙니다”, “계획한 거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같이 일하던 외국인 여성을 상대로 성폭행과 스토킹을 일삼던 자가 범행 대상으로 또 다른 여성을 물색하고 저지른 일이라고 보는 것이 현재로서는 타당하다. 서초구 한 건물 화장실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 피의자의 “여자라서 죽였다”라는 끔찍한 자백에 전국민이 분노했던 때가 딱 10년 전인 2016년 5월의 일이다. 일명 ‘강남역 살인 사건’이다. 여혐으로 인한 사건들이 끊이지 않는 오늘 참담한 심정으로 다시 한 번 묻게 된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왜? 어째서?” 1990년에 방영된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드라마 제목도 갑자기 떠오른다. 로스쿨 준비 중인 딸을 두신 직원 한 분이 정기적으로 내원하신다. 본인 허리치료와 더불어 따님 처방을 문의하기 위해서이다. 다낭성난소증후군으로 생리량이 극소한 데다가 생리통과 냉증을 달고 사는, 예민하고 늘 소화는 안 되고 그래서 밥은 깨작깨작 먹는 편이며 진하게 내려앉은 다크 서클에 누가 보아도 44싸이즈의 깡마른 체형을 가진 전형적인 소음인 대학생! 여성의학 분야의 실력이 미천한 나이지만 소음인을 살려내는 몇 개의 비방(?)을 알고있기에 자신있게 처방을 했고 약 복용 후 제반 증상이 호전되었다는 기쁜 소식도 얼마 후 전해들었다. 만성피로증후군, 과민성대장증후군, 미주신경성 실신의 과거력, 기립성 저혈압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음인 환자군은 대부분 해당질환 전문 분과의 순례를 두세바퀴 마친 후 종국에는 한의 쪽으로 심신을 의탁하러 오는 경우가 많다. 한의사들은 준비되어 있다. 유독 예민한 그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해결해 줄 준비 말이다.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 (마야 뒤센베리, 한문화, 2019년 10월) - 의학계가 여성의 허약한 건강에 집착하는 데서 무시하는 쪽으로 이행한 핵심적인 원인은 히스테리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 정확한 병명으로 진단될 때까지 여성의 질병은 심인성이다. - 눈에 보이지 않는 피로와 통증을 동반한 만성질환은 대체로 여성의 몫으로 나타난다. - 사실 의료계가 여성 환자의 증상을 믿지 않아서 생긴 지식의 손실은 생각만 해도 충격적이다. 히스테릭한 여성이라는 망령은 너무나 강력해서 그것이 살짝만 환기되어도, 경험적인 진실에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여자들은 왜 화장실에 자주 갈까?』 (비르기트 불라, 열린책들, 2025년 7월) - 의사가 방광 시스템을 완전히 뒤집어 철저하게 검사하고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고 모든 기질적 원인을 배제하고 나면 범인은 딱 하나 남는다. 바로 우리의 정신이다. - 한의학에 따르면 음과 양, 즉 여성 에너지와 남성 에너지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방광에 자주 문제가 발생한다. 또한 방광과 신장 사이에도 부조화가 있을 수 있다. - 방광이 다른 장기에 의해 또는 유착이나 근막 구조, 인대, 근육 등에 의해 압박을 받아 움직임이 제한되면 태업을 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배변 장애나 과민성 방광 또는 빈번한 방광염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여자는 늘 어딘가가 아프다』 (야마자키 아쓰코, 마인드빌딩, 2025년 9월) - 자율신경실조증에 대한 침구치료는 환자 자신이 생명에 관계된 병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납득한 후에 했을 때 치료 효과가 높아진다. - ‘컨디션 난조를 개선하고 싶다면 거들을 입지 말라’ 혈행이 나빠지면 혈액이 몸 구석구석까지 전달되지 않는다. 이러한 모든 요소가 냉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 혈류의 개선, 면역력 향상, 진통 작용이 뛰어나서 뜸만으로도 괴로운 증상은 서서히 완화된다. - 40세부터 60세 전후까지의 20년은 괴로운 시기이다. 여성의 컨디션 난조의 원인은 이게 거의 전부라고 해도 될 정도로 갱년기가 미치는 영향이 크다. 『여성의 몸에 대한 의학의 배신』 (엘리자베스 코멘, 생각의힘, 2026년 1월) - 호흡기내과 역시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증상을 단순히 불안으로 치부해 버리고, 더 깊이 들어가 유기적 원인을 탐구하지 않는 경향이 만연해있다. - 여성들에게 있어 호흡기 건강은 점점 의료의 영역이기보다 자기 관리의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여성들은 명상을 하라거나, 호흡을 측정하는 앱을 다운로드하라거나, 운동을 더 많이 하라는 사이비 과학 조언의 홍수에 시달린다. - 10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의사들은 여성 위장관 환자들을 불안해하고 까다로우며 감정적이고 치료가 힘든 환자들로 간주한다. - 골다공증을 둘러싼 의료 환경은 너무나 혼란스럽고 여성의 골격을 연약한 것과 동일시했던 기존의 편견과 얽혀 있다. 『최초의 이브들』(캣 보해넌, 시공사, 2026년 3월) - 임신은 원래 위험한 일이고 여성의 몸에 손상이 남는 장기적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 난소는 성숙한 난자를 만들기 위해 훨씬 오랜 시간에 걸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인간 태아는 자궁에 있을 때부터 난포를 만든다는 점을 기억하자. - 세계 어느 곳에서든 여성은 죽음을 피하는 능력이 남성보다 뛰어나다. 백세인은 유니콘같은 존재였다. 오늘날 백세인은 80퍼센트 이상이 여성이다. - 여성은 근본적으로 운동 직후 근육 강도가 더 떨어지는 듯했지만 훨씬 더 빨리 회복했다. 이것은 강한지 약한지의 문제가 아니라 대사와 조직 복구의 문제다. 지난 1월 KBS 1TV 『생로병사의 비밀』에서는 “성차(性差)의학” 즉 “남녀의 병 다르게 고쳐야 산다” 편을 방영했다.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에 따라 진단과 치료가 달라져야 한다는 말인데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이 원칙이 ‘맞춤의학’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 듯하다. 상견 증상이나 체질에 따른 구별을 중시해 온 한의학적 시각에서는 ‘성차의학’이라고 부르지만 않았을 뿐 이미 개인간의 차이를 중시하여 이를 구별하고 그에 맞춰 치료를 해온지 오래이다. 칸 영화제를 찾은 배우 하비에르 바르뎀은 “유해한 남성성이 전쟁의 원인”이라며 유력 정치 지도자들 몇 명의 이름을 거론했다. 정치적 올바름과 다양성에 대한 감수성을 기준으로 디즈니의 기존 작품들이 추구했던 여성성은 과연 올바른 것이었냐에 대한 반성이 지속적으로 요구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리고 의학적으로도 가치 평가와 영향력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었고 화두였다. 정치판에서 여성성은 득이었다가 독이 되기도 하고 독이었다가 득이 되는 경우도 자주 발생한다. 영화 『여인의 향기』(1992년)하면 떠올려지는 탱고곡이 있다. 바로 “Por Una Cabeza”이다. 경마 용어로 ‘머리 하나 차이’라는 뜻으로 아주 근소한 차이, 간발의 차이로 승부가 결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6월3일 지방선거가 코앞이다! 임신, 출산, 육아의 짐을 짊어져야 하는 그 시기는 여성 정치인들에게는 어쩌면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일 수도 있다. 여성성이 아닌 능력만으로 더 많은 여성들이 정치판에 뛰어들 수 있는 시대는 과연 도래할 것인가? -
한의학 교육의 현재와 미래Ⅱ 24한상윤 원광대 한의과대학 교수 (한의학교육학회 회장)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원광대 한의과대학 한상윤 교수(한의학교육학회 회장)로부터 한의학 교육의 질적 향상과 함께 우수한 인재 양성을 위해 ‘한의학 교육의 현재와 미래Ⅱ’ 코너를 통해 한의학 교육의 발전 방향을 소개하고자 한다. 교육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대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집중한다. 어떤 내용을 교육과정에 포함할 것인지, 어떤 교수법을 사용할 것인지, 무엇을 평가할 것인지가 교육 논의의 중심이 된다. 그러나 의학교육 연구자들은 오래전부터 조금 다른 질문을 던져왔다. 학생들은 정말 우리가 가르치려는 것만 배우는가. 의학교육에서 ‘숨은 교육과정(hidden curriculum)’이라는 개념이 주목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Hafferty라는 학자가 의학교육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제기한 이 개념은 공식 교육과정과 별개로, 조직 문화와 제도, 인간관계 속에서 암묵적으로 전달되는 가치와 규범을 의미한다. 그는 숨은 교육과정이 학생들의 전문직 사회화에 매우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쉽게 말해, 교육자가 의도적으로 가르치지 않았음에도 학생들이 학교 문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의료인이 되어야 하는가’를 학습 의학교육에서 숨겨진 교육과정을 분석한 최근 연구들은 학생들이 공식 강의보다 실제 교육 현장의 분위기와 상호작용 속에서 전문직업성을 강하게 학습한다고 보고하고 있다. 특히 공감 능력, 의사소통 능력, 윤리적 민감성, 팀워크, 임상적 판단 태도와 같은 요소들은 공식 교과목보다 숨은 교육과정을 통해 더 강하게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최근 JMIR Medical Education에 게재된 체계적 문헌고찰 연구에서도 숨은 교육과정은 단순한 비공식 학습이 아니라 학생들의 전문직 정체성 형성(professional identity formation) 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 환경으로 설명하고 있다. 학생은 단지 의학 지식을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의료인이 되어야 하는가를 환경 속에서 학습한다는 뜻이다. 의학적 지식만 갖춘다고 의료인으로 완성되지 않기 때문에 숨은 교육과정이 중요하다. 환자를 대하는 태도, 동료와 협력하는 방식,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판단,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자세 같은 것들은 교과서 몇 장이나 수업만으로는 익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교육 환경 속에서 오랜 시간 체화된다. 학교라는 조직 안에서 학생 문화를 형성 그러나 숨은 교육과정은 긍정적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연구에서 숨은 교육과정은 위계적 문화, 질문을 억제하는 분위기, 감정 소진을 당연시하는 문화, 냉소적 직업관을 재생산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숨은 교육과정은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는 셈이다. 겉으로는 환자 중심 의료를 말하면서 실제 교육 현장에서는 환자를 질환명으로만 지칭한다거나 효율적 처리의 대상으로 다룬다면, 학생들은 무엇을 배우게 될까. 비판적 사고를 강조하면서 학생의 질문을 번거로운 것 혹은 수업 흐름을 방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학생들은 어떤 태도를 내면화하게 될까. 협업을 강조하면서 다른 직역에 대한 편견 섞인 언급이 자연스럽게 오간다면, 학생은 그것을 현실의 규칙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학생들은 생각보다 예민한 관찰자라 할 수 있다. 교수의 강의 내용을 받아 적는 동시에, 그 강의 내용이 실제 행동과 일치하는지를 본다. 환자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지, 학생의 서툰 질문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다른 직역을 언급할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바쁜 일정 속에서도 존중을 잃지 않는지를 지켜본다. 그리고 그런 경험은 종종 강의 내용보다 더 오래 남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숨은 교육과정이 교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학생들끼리 공유되는 문화 역시 강력한 교육적 힘을 가진다. 2015년 『의학교육논단』에 실린 「의과대학의 잠재적 교육과정과 학생문화」에서는 숨은 교육과정을 단순히 교수 개인의 무심한 태도로만 보지 않는다. 학생들은 학교라는 조직 안에서 학생 문화(student culture)를 형성하며, 그 안에서 선배의 행동을 모방하고 집단의 암묵적 규칙을 내면화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식적으로는 협력과 성찰을 강조하더라도 실제 학생문화가 경쟁과 침묵을 장려한다면, 학생들이 배우는 것은 전혀 다른 가치일 수 있다. “이 과목은 이렇게 공부하면 된다”는 학습 전략뿐 아니라, “질문은 괜히 튀는 행동이다”, “실수는 들키지 않는 것이 낫다”, “힘든 것은 원래 참는 것이다” 같은 암묵적 메시지들도 학생 문화 속에서 전해진다. 공식 교육과정이 지향하는 가치와 학생 문화가 충돌할 때, 학생들은 종종 후자를 더 현실적인 규칙으로 받아들인다. 숨은 교육과정은 한의학교육에 중요한 화두 이러한 숨은 교육과정은 한의학교육에도 매우 중요한 화두가 된다. 한의학은 인간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환자의 개별적 맥락을 중시하는 철학 위에 서 있다. 그 발전 과정에서 진단과 치료의 기술만이 아니라 환자를 대하는 태도와 의료인의 품성 또한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 그렇다면 한의학교육은 이러한 가치를 학생들에게 충분히 전달하고 있을까. 더 정확히 말하면, 공식 교육과정뿐 아니라 숨은 교육과정을 통해서도 그러한 가치가 일관되게 전달되고 있을까. 교육자는 흔히 강의안을 통해 교육을 설계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오로지 강의를 통해서만 배우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무심코 보인 태도, 조직이 용인하는 문화, 선배 집단이 공유하는 규칙까지 모두 교육이 된다. 한의학교육이 정말 인간 중심 의료와 전문직업성을 지향한다면, 우리는 교육과정 개편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교육 문화 자체를 돌아봐야 한다.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만큼, 학생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를 묻는 일이 필요하다. 강의 내용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수 있지만, 교육 환경 속에서 학생이 반복적으로 경험한 태도와 문화가 더 강한 교육 효과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숨은 교육과정은 이름 그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영향까지 작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교육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우리가 가르치지 않았던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 -
“돌봄에서의 한의사 역할 알리는 객관적인 자료로 활용되길”[편집자주] 지난 3월 돌봄통합법이 전국적으로 시행된 가운데 한의계에서도 방문진료 및 재택의료센터 참여를 통해 통합돌봄 체계 내에서의 한의사 역할 확대를 위해 매진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양천구한의사회가 양천구와 함께 진행하고 있는 ‘Y한방 주치의 사업’에서는 보다 원활한 사업 수행을 위한 전용 플랫폼을 도입해 눈길을 끌고 있다. 본란에서는 ‘양천구 통합돌봄 한의약 플랫폼’을 개발한 주지영 양천구한의사회 부회장으로부터 플랫폼을 개발하게 된 계기 및 활용 현황, 향후 계획 등에 대해 들어봤다. Q. 통합돌봄 한의약 플랫폼을 개발하게 된 계기는? “급속한 고령화 등의 이유로 건보재정이 조만간 고갈될 것이라는 우려가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정부에서는 지난 3월부터 전국적으로 돌봄통합법을 시행하고 있다. 즉 어르신들이 자기가 살던 곳에서 생을 자연스럽게 마무리할 수 있는 의료체계 구축을 통해 사회적 입원비용을 자연스럽게 감소시킴으로서 의료비 급증을 줄이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보건의료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중요한 사업에서 한의계는 자꾸만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는 기분은 한의계 모든 구성원이 가지고 있는 생각일 것이다. 이런 고민 중 통합돌봄 체계에서 한의사가 해나가고 있는 역할을 보다 객관적으로 투명하게 정부측에 제시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한의약 플랫폼을 개발해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Q. 개발된 플랫폼이 현장에서도 활용되고 있는데. “양천구에서는 통합돌봄 신청자 가운데 한의 의료서비스를 희망하는 주민을 대상으로 한의사와 간호 인력이 가정을 방문해 진료와 건강상담을 제공하는 양천구 특화사업인 ‘Y한방 주치의 사업’을 지난달부터 진행하고 있다. 일선 한의원에서 통합돌봄 사업에 참여하는 경우 가장 어려운 점이 대상자를 발굴하고, 한의원과 연계시키는 것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하지만 이번 사업에서는 구청이 대상자를 발굴하면, 이를 양천구한의사회에 통보해주며, 양천구한의사회에서는 대상자와 한의원을 1:1로 매칭하고 있다. 초기 플랫폼 개발과정에서는 재택의료센터에서의 활용을 염두에 두고 개발을 진행했지만, 이 사업에서 활용됐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수렴해 통합돌봄 사업으로 수정 개발하게 됐다. 플랫폼에서는 대상자와 한의원의 연계는 물론 사전체크리스트를 통한 환자의 기초정보 확인, 방문진료 전·후의 환자 상태의 변화 확인, 청구 등에 적극 활용되고 있다.” Q. 플랫폼 개발 과정에서의 어려움 및 중점을 둔 부분은?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플랫폼 개발에 대해 전문가도 아닌 상황에서 처음부터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만들어야 했던 점이다. 한의원을 운영하면서 ‘AI를 활용하면 행정업무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플랫폼 개발이었지만, 어느 순간 나 혼자가 아닌 다수의 사람이 활용하는 플랫폼 개발로 확장되면서 이에 대한 책임감 또한 무거웠었다. 진료 이후에 시간을 활용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개발된 플랫폼에 대해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고 적극 활용할 뜻도 전해줄 때마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구나’라는 어려움을 보상받는 듯한 느낌이 든다. 플랫폼 개발에서 중점을 둔 부분은 먼저 대상자들에게는 질병정보가 가장 민감한 개인정보인 만큼, 이에 대한 유출 방지를 위해 의료법·개인정보보호법 등 관련 법령들을 살펴보면서 법에서 위배되는 부분은 없는지, 유출 위험은 없는지 등을 꼼꼼히 살폈다. 또한 대부분 개원가 회원이다보니 한의원 진료 및 운영 이외의 단순한 행정부담을 최소화하는 데에도 중점을 뒀다. 이를 통해 발굴된 대상자의 한의원 연계는 물론 환자 등록, 청구시 필요한 행정업무, 공문 발송 등을 플랫폼 안에서 모두 가능하도록 했다.” Q. 플랫폼 개발을 통해 기대되는 효과는? “이번에 개발한 플랫폼은 양천구만이 아니라 서울, 나아가 전국의 각 지자체의 한의사회에서 활용 가능하도록 확장을 염두에 두고 개발을 진행했다. 아울러 한의사뿐만 아니라 의사, 치과의사들의 사업에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 플랫폼에서는 사전체크리스트를 통해 △보행 △인지 △통증 등을 평가해 총점 7점이 넘어야 대상자로 선정되며, 매 방문진료 시에도 간단한 체크를 통해 환자의 전반적인 상태를 현장에서 직접 체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방문진료에 따른 환자상태의 변화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이를 종합적인 자료로 취합·변환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이는 플랫폼 개발의 취지인 돌봄 체계 내에서 한의사의 방문진료 효과를 객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플랫폼 내에서 도출되는 치료결과는 물론 만족도 조사 결과까지의 데이터를 모아 보고서 형태로 정부에 제시한다면 통합돌봄 체계 내에서의 한의사 역할을 보다 명확히 보여줄 수 있는 실증적인 근거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양천구만이 아닌 전국 기초자치단체에서의 데이터를 모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확대 가능성을 염두에 둔 플랫폼 개발에 나서게 된 것이다.” Q. 그 외 하고 싶은 말은? “최근 서울시 기초자치단체 통합돌봄사업 담당 공무원 및 각 서울시 분회 사업담당 임원이 참여한 플랫폼 설명회를 개최한 가운데 동작구 등 일부 자치구에서는 큰 관심을 보였다. 앞서 설명한 대로 플랫폼을 통해 축적된 자료들은 국가의 보건의료 정책에서 한의사가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설명하는 근거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만큼, 관련 사업의 효율적인 운영은 물론 한의계의 미래를 함께 한다는 생각을 갖고 플랫폼이 서울 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확산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의사는 항상 국민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의료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온 만큼, 앞으로도 보다 다양한 국가 보건의료정책에 반드시 참여해 의료인의 역할을 수행해 나갔으면 한다.” -
나와 한의신문···서관석 회관이전건립 추진위원장(명예회장)□ 1994.4.27. ‘회관이전건립 추진위원회’ 결성 기억은 휘발되지만 기록은 영원하다. 기록은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이다. 한 시대의 생생한 현장 분위기를 응축시킨 그 때의 기록을 찾아 떠나본다. 1994년 4월27일···. 대한한의사협회가 제기동의 낡고 협소한 회관에서 탈피해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해 ‘회관이전건립 추진위원회’를 결성한 날이다. 위원장으로 선출된 서관석 명예회장(대한한의사협회 제31대 회장)은 투명한 백지 위에 한의사회관의 밑그림을 그리고, 회관건립기금을 모으기 위해 전국을 순회했다. 중앙회 및 지부 임원, 동문회, 개원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는 한의사 회원 등 회관건립 기금을 내줄 수 있는 여지가 있으면, 어디든지, 언제든지, 누구든지 연락해 성금 납부를 호소했다. 이 당시 한의신문은 서관석 위원장과 보조를 맞춰 건립기금을 쾌척한 회원들을 매주 마다 인터뷰해 소개했다. 이와 함께 회관건립부지 매입부터 시작해 터파기, 설계, 시공, 건축, 감리, 완공, 개관식에 이르기 까지 회관 완공의 전 과정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와 관련 서관석 명예회장(사진)은 “회관이전건립 추진위원회가 출범한 이후 가장 큰 과제는 ‘회원들의 마음을 어떻게 하나로 모으느냐’였다. 제기동의 좁고 오래된 회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당위성은 있었지만 정작 건립기금을 마련하는 방법은 막막하기만 했다. 한약분쟁으로 지쳐가고 있는 회원들의 마음을 결집해줄 구심점이 절실했는데, 그때 핵심적 역할을 한 게 한의신문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한의신문의 헌신이 없었다면 현재의 한의사회관도 없었을 것이다. 회관건립 추진위원들도 백방으로 뛰었지만, 실제 회관건립 기금의 모금 운동에 불을 붙인 게 한의신문이었고, 너도나도 회관건립에 동참해야겠다는 분위기를 확산시키는데 너무 큰 공을 세웠다”고 밝혔다. □ 한의신문, 매주 마다 성금 납부자 릴레이 인터뷰 큰 도움 그는 또 “한의신문에서 매주 마다 보도한 회관건립기금 성금 납부자 릴레이 인터뷰는 엄청난 파급력을 불러 일으켰다. 어떤 분은 소액을 내놓고는 왜 자기는 인터뷰를 하지 않느냐고 불만을 제기한 사례도 있었다. 한의신문에 얼굴이 실리고 이름이 난다는 것은 단순한 자랑이 아니라, 한의사회관 건립이라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된다는 자부심을 주기에 충분했다”고 말했다. 회관건립 추진위원들의 발품과 한의신문의 솔선 덕분에 회관이전건립 추진위원회가 출범하여 기금을 모으기 시작한지 4개월 만에 45억 여 원이 걷히는 놀라운 성과를 올렸고, 7개월 만에 서울 마포구 상수동 354번지 일대의 부지를 24억6020만 원을 들여 매입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마포구청의 도시계획변경으로 인해 상수동 시대를 열겠다는 회관건립의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회관건립의 희망을 잃지 않고 지속적으로 대체 부지 물색과 모금 운동을 펼친 끝에 2002년 5월 강서구 가양동 26-5 번지의 대지 4000㎡를 25억6000만원에 매입하게 됐고, 이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회관 건축 공사가 시작됐다. 서관석 명예회장은 “한의신문은 한의사회관의 조감도를 매번 신문 1면에 배치해 한의사 회원들이 큰 꿈을 갖고 회관건립에 나설 수 있는 디딤돌이 돼 줬고, 이후 기공식을 시작으로 터파기 공사, 거푸집 작업, 철근 대란에 따른 건축자재 확보 등 회관건립이전 추진위원회가 하고 싶었던 말을 그때, 그때 효과적으로 전달해 줬다”고 덧붙였다. □ 건추위 결성 11년 만에 2005.5.27 한의사회관 개관 1994년 4월, 회관이전 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된 이후 2003년 12월16일 대망의 회관 기공식이 열렸으며, 숱한 우여곡절 끝 11년이 지난 2005년 5월27일 드디어 한의사회관의 개관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이는 강서구 가양동에서 대한한의사협회의 새로운 역사가 열린 분기점이었다. 서관석 명예회장은 “시작이 반이라고 회관건립 의지를 갖고 전면에 기꺼이 나서 준 당시의 허창회 중앙회장과 회관이전건립 추진위원회 김봉기 부위원장, 박순환 간사, 경은호 감독위원장을 비롯한 건추위원들의 헌신과 노고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 한의신문, 적합한 대안 제시하는 언론으로 발전하길 그는 특히 “가양동 회관의 벽돌 한 장 한 장은 회원들의 지극한 정성과 한의신문의 진한 잉크로 쌓아 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면서 “가양동 시대를 열기까지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소명을 다한 한의신문은 회관건립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앞으로도 한의신문이 인공지능이라는 급격한 시대의 변화에 맞춰 한의약이 국민의 신뢰를 듬뿍 받을 수 있도록 보건의료 현안을 심층 분석하고, 적합한 대안을 제시하는 언론으로 한층 더 발전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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