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金 南 一 慶熙大 韓醫大 醫史學敎室
학문 전달방법의 다변화를 위한 노력
과거 전통시대의 학술 전달방법은 醫書라는 매개체를 통한 도제식 교육이라는 단선적 방법이 주종이었다. 학술 전달에 있어서 책을 읽어 이를 개인적으로 활용하는 사람에서부터 선생에게서 개인적으로 사사받아 일가를 이루는 방법까지 다양하지만 그 중심에는 醫書가 있었다. 史崧이 ‘黃帝內經·靈樞’서에서 “무릇 醫學을 하는 것은 醫書를 읽는 데에 달려 있을 뿐이다. 醫書를 읽고서 醫學을 하지 못하는 경우는 보았지만, 醫書를 읽지 않고 醫學을 할 수 있는 경우는 없다(夫爲醫者, 在讀醫書耳, 讀而不能爲醫者有矣, 未有不讀而能爲醫者也)”라고 한 것처럼 醫書는 의사들에게 중요한 지식 전달 수단이었다.
서양의학이 이 땅에 들어오게 됨에 따라 한의학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의학의 교육방법에 관한 문제를 포함해서 이론체계, 치료법, 약물 등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어 새로운 전달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서양의학의 거센 도전이 한의학에게 변신을 강요하게 된 것이다.
학술잡지를 간행하게 된 것은 학문 자체에 대한 자성이라기보다는 학문의 전달방법에 대한 고민 속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학술잡지를 간행한 것은 학술적인 노력을 통해 한의학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자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일제시기 초기 무렵부터 학술잡지를 간행하려는 시도는 이미 시작되었다. 朝鮮醫師會의 발족과 全鮮醫會의 성립, 그리고 醫學講習所와 東西醫學硏究會의 설립 등 일련의 과정 속에서 학술잡지는 그 중심에서 구심점이 되었다.
일제시대에 나온 한국 최초의 학술잡지는 ‘漢方醫學界’이다. 이 잡지는 최초의 한의사 단체인 朝鮮醫師會에 의해 1913년 10월부터 발행되었다. 洪鍾哲이 발행인으로 기록되어 있는 동잡지는 1914년 1월에 제2호를 내고 폐간되는데, 이것은 全鮮醫會가 새로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1915년에는 새로 全鮮醫會라는 한의사 단체가 결성되면서 학술잡지의 간행은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 1916년 1월1일에 전선의회에서 창간한 동의학 학술기관지인 ‘東醫報鑑’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잡지는 全鮮醫會가 해체됨에 따라 1916년 3월1일에 제2호까지만 발간되고 폐간되었다.
‘東醫報鑑’이 폐간되자 洪鍾哲, 趙炳瑾 등이 全鮮醫會의 자금을 인수하여 ‘東醫報鑑’의 이름을 ‘東西醫學報’로 고쳐 1916년 6월에 다시 속간하여 1917년 6월까지 8회에 걸쳐 간행하였다. 이 잡지에서는 한의학의 기본적인 이론들과 서양의학설들을 모두 싣고 이의 회통에 힘쓰고 있다. 본 잡지는 公認醫學講習所에서 발행한 잡지로서 公認醫學講習所에서 강의된 내용을 싣고 있는 강의록 형식의 잡지이다.
그 후에 趙炳瑾이 1918년 3월에 ‘東西醫學報’의 이름을 ‘朝鮮醫學界’로 고쳐 다시 속간하였다. 이것은 ‘東西醫學報’의 제9호가 되는 셈이다. 이 마저도 1919년 9월까지 제11호를 끝으로 폐간 되었다. ‘東西醫學硏究會月報’는 東西醫學硏究會에서 발행한 잡지이다. 1923년 12월31일에 창간호가 간행된 후 1925년 10월18일에 혁신 제1호가 발간되기까지 모두 7회 발간되었다.
이 외에도 지방에서 발행한 잡지가 있다. 1914년 6월에 金壽哲, 池昌奎 등이 平南醫會를 조직하고 의약강습회를 개최하면서 발행한 ‘醫藥月報’가 그것으로, 1916년 5월까지 15호를 발행하였다. 그리고, 1935년 8월에 成周鳳이 창간한 ‘忠南醫藥誌’는 1942년까지 50여호가 발행되었다.
일제시대부터 축적된 한의학 학술잡지의 전통은 이후 해방후에 ‘東洋醫藥’(1947년, 1955년 창간), ‘醫林’(1954년 배원식 창간), ‘東洋醫學’(1975년 김정제 창간), ‘大韓韓醫學會誌’(1963년 창간)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