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흐림속초6.5℃
  • 안개1.1℃
  • 흐림철원1.2℃
  • 흐림동두천2.7℃
  • 흐림파주2.5℃
  • 구름많음대관령0.8℃
  • 구름많음춘천1.9℃
  • 구름많음백령도6.4℃
  • 구름많음북강릉5.6℃
  • 구름많음강릉6.9℃
  • 흐림동해7.3℃
  • 흐림서울5.2℃
  • 흐림인천4.4℃
  • 구름많음원주3.0℃
  • 흐림울릉도9.8℃
  • 구름많음수원5.0℃
  • 흐림영월2.7℃
  • 흐림충주4.1℃
  • 구름많음서산5.9℃
  • 구름많음울진7.4℃
  • 구름많음청주7.3℃
  • 구름많음대전6.4℃
  • 흐림추풍령3.5℃
  • 구름많음안동1.3℃
  • 구름많음상주2.5℃
  • 구름많음포항7.6℃
  • 흐림군산5.4℃
  • 흐림대구5.7℃
  • 흐림전주7.2℃
  • 흐림울산7.9℃
  • 비창원7.3℃
  • 맑음광주7.4℃
  • 비부산9.4℃
  • 구름많음통영7.9℃
  • 구름많음목포7.9℃
  • 구름많음여수8.2℃
  • 구름조금흑산도9.8℃
  • 흐림완도8.0℃
  • 구름많음고창7.7℃
  • 구름많음순천4.8℃
  • 구름많음홍성(예)7.5℃
  • 구름많음4.7℃
  • 비제주14.2℃
  • 흐림고산15.5℃
  • 흐림성산12.6℃
  • 구름많음서귀포14.1℃
  • 구름많음진주4.6℃
  • 구름많음강화3.4℃
  • 구름많음양평3.1℃
  • 구름많음이천3.0℃
  • 흐림인제1.5℃
  • 구름많음홍천1.5℃
  • 흐림태백3.4℃
  • 흐림정선군1.2℃
  • 구름많음제천2.6℃
  • 구름많음보은3.6℃
  • 구름많음천안5.3℃
  • 구름많음보령7.6℃
  • 구름많음부여3.5℃
  • 흐림금산5.8℃
  • 구름많음5.6℃
  • 구름많음부안6.8℃
  • 흐림임실5.7℃
  • 흐림정읍7.8℃
  • 구름많음남원5.9℃
  • 흐림장수7.2℃
  • 구름많음고창군7.4℃
  • 구름많음영광군7.5℃
  • 구름많음김해시6.8℃
  • 구름많음순창군5.6℃
  • 흐림북창원6.6℃
  • 구름많음양산시6.9℃
  • 구름많음보성군6.3℃
  • 구름많음강진군6.4℃
  • 구름많음장흥6.0℃
  • 구름많음해남7.0℃
  • 구름많음고흥5.5℃
  • 구름많음의령군3.2℃
  • 구름많음함양군4.4℃
  • 구름많음광양시7.5℃
  • 구름많음진도군6.3℃
  • 흐림봉화1.5℃
  • 흐림영주2.3℃
  • 구름많음문경1.9℃
  • 흐림청송군1.2℃
  • 구름많음영덕5.0℃
  • 흐림의성3.2℃
  • 흐림구미4.1℃
  • 흐림영천3.9℃
  • 흐림경주시4.8℃
  • 흐림거창3.0℃
  • 흐림합천5.0℃
  • 흐림밀양5.1℃
  • 구름많음산청4.3℃
  • 구름조금거제7.6℃
  • 구름많음남해6.7℃
  • 구름많음6.1℃
기상청 제공

2025년 12월 17일 (수)

김남일의 儒醫列傳 13

김남일의 儒醫列傳 13

B0112006042138823-1.jpg

金南一

慶熙大 韓醫大 醫史學敎室



조선 최고 전염병치료전문 儒醫



조선시대의 학자들은 기본적으로 醫學에 조예가 깊었다. 당시 통치이념이었던 성리학은 조선 식자층들의 관념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특히 의학이 성리학적 이념상 아버지인 군주가 자식인 백성들을 건강한 삶으로 이끌어주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 도구라고 생각하였기에 널리 권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金安國은 본래 趙光祖, 奇遵 등과 함께 金宏弼의 문인이었으므로 사림파의 선도자였다. 그는 1501년에 생진과에 합격하고 2년 후에는 별시문과에 합격하여 승정원의 박사, 부수찬, 부교리 등을 역임하면서 관료로서의 길을 달렸다. 그가 일반 백성들의 경제생활과 교양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실천적인 성리학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하는 것은 1517년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면서부터이다.



그는 이 때에 각 향교에 ‘小學’을 권하고, ‘農書諺解’, ‘蠶書諺解’, ‘二倫行實圖諺解’, ‘呂氏鄕約諺解’, ‘正俗諺解’ 등 백성들의 경제생활과 교양을 위한 한글판 언해서를 출간하고, 백성들의 건강을 지키는 데에 도움을 줄 ‘벽온방’, ‘瘡疹方’ 등의 醫書들을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였다. 비록 그가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잠시 경기도 이천으로 가서 후진양성에 힘쓰기도 하였지만, 1532년에 다시 등용되어 중앙 요직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는 1542년에 함경도에서 瘟疫이 크게 유행하자 왕명을 받아 朴世擧, 文世璉, 柳之蕃, 李倜, 鄭樞, 洪世河 등과 함께 瘟疫에 대해 나온 여러 醫書 내용 가운데 이용하기 쉬운 처방들과 상비약들을 중심으로 ‘分門瘟疫易解方’을 편찬하였다. ‘分門瘟疫易解方’은 1525년에 편찬된 ‘簡易·瘟方’의 60여개의 처방에 40여개의 처방을 첨가하고 이를 鎭禳, 不相傳染, 服藥, 勞服 등 4門으로 나누고, 여기에 藥名과 採取法을 첨가하고 언해를 붙여 간행한 것이다.



이렇듯 金安國은 당시 사회문제였던 전염병을 퇴치하기 위해 醫書를 편찬하고 이를 보급하는 데에 힘썼다. ‘分門瘟疫易解方’은 조선중기 전염병을 퇴치하기 위해 조정에서 간행하여 전국으로 유포시킨 의서이다. 한글로 언해를 단 것은 일반인들이 쉽게 응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이것은 전염병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것이 매우 실제적일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醫師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만만치 않은 요즘 시기에 金安國과 같은 儒醫가 했던 전염병 퇴치를 위한 노력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할 것이다.
 

관련기사

가장 많이 본 뉴스

더보기
  • 오늘 인기기사
  • 주간 인기기사

최신뉴스

더보기

뉴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