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방관의 부임 기피 지역이었던 당시의 진해 지역에서 애민정신 등 경세학을 펼쳤던 동무 이제마의 생애와, 그의 삶을 지역사적 의미에서 재조명하는 심포지엄이 지난 20일 창원시립마산박물관에서 개최됐다.
창원시와 부산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한의과학연구소는 이날 ‘동무(東武) 이제마의 삶과 창원’을 주제로 △이제마의 삶과 인물 연구(김종덕 사상체질의학회 부회장, 사당한의원장) △이제마의 저술과 학문세계(황민우 경희대학교 한의학과 교수) △이제마와 창원 지역의 연계성 검토(최성운 경희대학교 한의학과 박사) △문화콘텐츠 발굴 및 성공사례(문관규 부산대학교 예술문화영상학과) 순서의 심포지엄을 진행했다.
권영규 부산대 한의전 원장은 개회사에서 “2008년에 건립된 부산대 한의전은 100년 만에 국립대의 맥을 이어간다는 자부심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사상의학을 전공하는 분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만든 창원시에 감사드린다”며 “이 자리가 국민건강 증진을 돕고 한의학을 세계화할 수 있는 사상체질의학의 의미를 되새기고, 이제마를 세상에 알리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황규종 창원시 문화체육관광국장은 환영사를 통해 “최근 들어 사상의학 창시자 이제마에 대한 다양한 조명이 창원시에서 이뤄지고 있다”며 “권 원장님의 말처럼 이제마 선생은 이 지역을 빛낸 훌륭한 분이다. 21일 이제마의 현감부임 행사를 여는 등 창원시에서 열리는 이제마 선생에 대한 다양한 행사에도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먼저 김종덕 부회장은 이제마의 생애, 사상의학 창시 계기에 대해 소개하고 새로 발굴된 사료에 나온 무관 경력이 당대 현실에 대한 그의 가치관을 이해하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김 부회장은 “현재 상당히 많은 한의사가 사상의학 기반의 치료를 하고 있고, 사상의학을 연구하는 일반인이 있을 만큼 이제마는 영향력 있는 사상의학자”라며 “철학자이면서 무관, 문인이기도 했던 이제마 선생은 서구열강의 침탈 등 격동하는 조선시대를 살아낸 선각자”라고 평가했다.
1837년 3월 19일에서 태어난 이제마는 23세에 첫째 부인 사이에서 소음인 용해를, 36세에 둘째 부인 사이에서 소양인 용수를 뒀는데 두 아이의 성격과 기질이 달랐다. 김 부회장은 "이제마 선생은 슬하에 둔 자식도 성격과 기질이 다를 수 있음을 보면서 사상체질의학에 뜻을 두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전했다. 39세에는 육미탕•백호탕을 처방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57세에는 동의수세보원 집필을 시작했다.
1874년부터 1882년에 무위소에서 쓴 업무일기인 '지구관청일기' 기록을 보면 이제마는 40세이던 고종 13년(1876)에 무관직인 ‘별선군관’에 특별 채용됐다가 4개월 만에 모친상으로 2년 여 기간 동안 휴직을 냈다. 42세에 복직한 그는 이듬해 과거급제를 하고 50세가 되던 1886년에 진해현감이 됐다. 그의 근무일지를 보면 ‘정사를 세심하게 처리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뜻을 품고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60세 고원군수를 임명받고 61세에 부임했지만 62세에 면직됐다.
황민우 교수는 격치고, 동의수세보원 사상초본권, 동의수세보원 갑오본(구본), 동의수세보원 신축본(신본), 동무유고 등을 저술한 이제마가 유학자에서 의학자로 변모한 과정을 설명하고 사상철학·사상의학 등 학문세계를 통해 한의학에서 사상의학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제언했다.
1880년부터 1893년까지 집필된 ‘격치고’는 유략, 반성잠, 독행편 등 이제마의 유학 철학을 확인할 수 있는 저서다. 이중 ‘독행편’에서는 사람을 성인군자인 '인의예지자'와 소인인 '비박탐나인'으로 나누고 있는데, 이런 성인과 소인의 4가지의 구분이 태소음인양인인 사상체질의 밑바탕으로 삼았다. 즉 사덕으로 비롯된 사단의 개념이 사상체질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 된 것이다.
이제마의 학문세계는 선진유학의 계승, 역도, 태극•양의•사상, 명선록의 영향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황 교수는 “진나라 때 분서갱유로 유학의 명맥이 단절됐다고 본 이제마는 분서갱유 이전 유학의 모습인 ‘공맹지학’을 계승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며 “자신의 저서에서 공자, 맹자에 대한 계승 의지와 격물치지, 사물이라는 사서삼경에 담긴 철학 주제를 언급한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황 교수는 또 사상의학의 특징에 대해 “전통적인 한의학과 달리 유학이라는 철학적인 관점을 인간에게 투영해 사단, 호연지기 등 여러 유학적인 주제를 의학에 적용했다. 동의보감의 형상의학 정신을 계승한 것"이라며 "병증이 발현하기 이전에 ‘소증’이라고 하는 사상인의 특성을 기준으로 진단, 치료가 이뤄진다는 점도 특징”이라고 말했다. 전혀 다른 병증인데도 ‘사상인’의 관점으로 접근해 동일한 방식으로 진단, 치료를 하는 ‘동출일속’ 개념도 소개했다. 병증의 이해를 높여 치료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자 한 사상의학 고유의 정신이라는 설명이다.
◇진해현, 이제마의 '애민정신' 실현한 지역
최성운 박사는 진해 현감을 지냈던 이제마와 창원지역사 연구를 연계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현감을 지내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진해현감직의 의미에 대해 설명했다.
최 박사는 “이제마가 경세학을 실현했던 현장이 바로 진해현”이라며 “통리기무아문, 무위소 등 국가기관에 몸담으며 형성해온 이제마의 경세학이 비로소 백성들을 만나 애민정신으로 빛날 수 있었던 곳”이라고 강조했다. 1888년의 가뭄과 대기근 속에서 당시 애민정신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았던 진해현감 이제마가 백성들 구제를 위해 노력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에 대해 지역사료를 통해 접근해볼 수 있다. 또한 가뭄과 이로 인한 대기근은 유행병을 동반하는 경우가 흔한 탓에 창원지역사의 전염병 관련 내용으로 이제마의 저술 속에 나타난 전염병 내용에 접근해볼 수도 있다.
최 박사에 따르면 진해현은 현재의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직북면·진전면에 해당한다. 진해현감을 지닌 이제마에 대한 사료는 극히 적은 사실만 알려져 있어, 그의 생애 중 업무평가와 일치하는 모습을 찾아 역추적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이제마가 진해현감에 재직하던 19세기는 임술민란, 갑오농민전쟁 등 민란의 시대이자 제너럴셔먼호,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제국주의 조선침략이 시작된 시대로 조선역사상 처음으로 '국가의 생존'을 중시했던 시기다. 이제마는 이런 시대적 요구를 바탕으로 개인의 질환을 치료하는 정도를 넘어 몸과 마음에 대한 개인 및 사회적 차원에서의 수양론을 강조했다.
이제마는 또 장군이 되기를 꿈꾸며 그에 맞는 국가경영기술인 ‘경세학’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진해현은 1478호 인구 5454명의 작은 고을이었는데, 진해현 등 남쪽 바닷가 지역은 풍토병이 유행해 관리가 어려운 부임 기피지로 알려진 지역이었다.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승정원에 보낸 문서를 수록한 '통제영계록'을 보면, 복수의 감사나 통제사가 현감직을 수행중인 이제마에 대해 ‘업무수행능력’과 ‘관리로서의 그릇', '애민정신’이 뛰어나다고 평가한다. 최 박사는 “복수의 감사나 통제사가 한 명의 지방관에게 공통적으로 업무수행력을 언급한 예는 없었다”며 “이런 표현은 이제마가 현감직보다 높고 중요한 직책에 걸맞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의 애민정신은 1896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시행을 이유로 일어난 함흥민란 당시 빛을 발했다. 민란으로 발생할 함흥주민들의 생명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모친상 중에 함흥민란 진압에 나서면서다. 민란 진압 후 그는 고종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일부 사실관계를 누락해 함흥민란과 지방관 살해로 사형에 처해질 함흥 백성들을 보호하고자 했다.
최박사는 “이제마는 서재 속의 고독한 철학자나 진료실의 한의사가 아니었다. 현실 속으로 몸을 내던져 시대적 난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군지휘관이자 행정가”라며 “ '기효신서'나 '무비지' 등의 군사학 서적, '태상감응론'이나 '경신록' 등의 도교 권선서를 읽은 이유도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대동사회 향한 이상, 현실에서 모색하다
발표에 이어 진행된 종합토론 순서에서는 임병묵 부산대 한의과학연구소장이 좌장을 맡고 이강재 시흥희망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희망한의원장, 신강원 부산대 한의전 교수가 참여했다.
처방전 등 이제마의 친필을 통한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강재 원장은 “동무 공에 대한 여러 연구가 있었지만, 친필에 대한 연구 성과는 없었다”며 “2000년대 초반에 '향부자팔물탕' 처방전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자료를 찾다가 1962년 8월에 나온 ‘한국사상’ 잡지를 찾았는데, 여기에 ‘동무 공이 최린에게 적어준 친필로 알려진 처방전이 최린이 받아 적은 글씨였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 이후로 친필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으로 생각된다”고 설명했다.
또 이 원장은 “그렇다고 해도 동무 공이 고향인 함흥에서 최린을 만난 것처럼, 현감으로 재직할 때에도 개인적인 친분을 맺은 사람의 기록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한국전쟁 때 창원 지역은 다른 곳만큼 피해가 크지 않았으므로, 추가적인 사료를 발굴해 볼 수도 있다”고 제언했다.
원전학 분야에서 동의수세보원에 대해 연구해 온 신상원 교수는 “6년간 창원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번 학술대회가 갖는 학술적, 문화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여러 감정이 떠오른다. 개인의 역사에 대한 감회를 느끼는 한편 공적인 토론의 장이기 때문에 사적인 감정을 느끼는 게 옳은가 싶기도 했다”면서도 “이제마 선생은 사사롭지 않은 공적인 영역에 대해 강조했는데, 이런 세계를 지향하는 출발점은 지금 우리 개인의 마음과 몸으로 느끼는 내밀한 희로애락에 있다고 강조했다. 살아있는 인간에게서 생동하는 감정을 직시하는 출발점을 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 교수는 이어 “이제마 선생은 도덕적 이상주의에 치우친 당시의 풍토에서 사적인 감정의 중요성을 깨달은 분”이라며 “대동사회를 향한 이상을 품으면서도 구체적인 방안을 현실에서 모색하고자 하는 방향성과 일치한다. 결국 제가 느낀 감정도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논의 주제와 만나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고 덧붙였다.
임병묵 소장은 마무리 발언으로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최중기 창원시한의사회장의 발언을 전하면서 “문화콘텐츠사업 일환으로 창원의 이제마와 밀양의 허준을 연계할 때 지역내 한의사회와 협업과, 지역내 한의사들의 공감과 동참이 필요하다. 더불어 허준, 이제마 선생 등 두 분의 한의학 업적과 대외적 이미지를 고려할 때 중앙회 차원의 협조와 지원도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