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02 (월)
김은혜 임상교수
(강동경희대한방병원)
<선생님, 이제 그만 저 좀 포기해 주세요> 저자
[편집자 주]
화가 베이먼은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죽는다고 믿던 이웃을 위해 나뭇가지에 직접 잎새를 그렸다. 이웃은 이 잎새를 보며 생의 의지를 다잡았다. 오 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 이야기다. 본란에서는 죽음을 눈앞에 둔 말기 암 환자에게 한의사로서 희망을 주고자 한 김은혜 임상교수(강동경희대한방병원)의 원고를 싣는다.
연이 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내 직업이 한의사라고 말을 했을 때 의아해 보이는 듯한 표정을 읽은 적이 종종 있었다. 지난 긴 시간 동안 한의사에 대한 매체들이 많았음에도 2000년대부터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건지, 지금은 누군가의 지인이 ‘한의사’라는 직업을 가졌다는 사실이 익숙하지 않다는 분위기를 느끼곤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말을 덧붙이며 ‘암 환자를 보는’ 한의사라고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의아한 ‘듯’한 표정은 바로 명백한 궁금증을 띄는 얼굴로 바뀐다.
“한의사가 암 환자를 어떻게 봐?”
다양한 의미가 담긴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의대와 마찬가지로 한의대도 6년 동안 다니며, 인턴 레지던트라는 수련 제도가 있고, 전문의 즉 분과 개념이 있다는 사실을 한의계 종사자가 아니면, 심지어 같은 의료인조차도 모르는 현실에서 저 반문을 무겁지 않게 받아들여도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때때로 문장 속에 가득 담긴 불신이 느껴질 때는 씁쓸한 감정이 밀려온다.
지금이야 그 씁쓸함이 몇 년 동안 쌓여오면서 오히려 긍정적인 동기가 되어 알을 깨고 세상에 이런 역할을 하는 한의사가 있음을 외치고 다니는 힘을 주지만, 과거에는 몇 번의 불신으로 내 정체성이 흔들리기도 했다.
◇한의사의 전문성 회복과 신뢰회복 중요
한의사가 암 환자를 어떻게 보냐는 질문을 ‘한의사가 암 환자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라는 뜻으로 해석했을 때, 암 환자가 투병하는 모습을 몇 달만이라도 옆에서 지켜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호하게라도 필요성은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그 필요성이 한의사(한의학)가 혼자 힘으로 암을 완전히 없앨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여담으로 간곡히 요청하건대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모든 분들도 병원 가운을 입고 암 환자에게 이런 희망을 주지 않았으면 한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을 악용해서 최대의 이득을 취하려는 일부의 행태에 피해를 받고 찾아오는 암 환자들을 보면서 억장이 무너졌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앞서 ‘2000년대부터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건지’로 축약한 내외부적인 분란들을 지금에서 다시 이을 수 있는 방법은 한의사의 전문성 확립을 통한 신뢰 회복 뿐이라고 생각하는 필자의 입장에서, 적어도 21세기에도 여전히 난치병으로 분류되는 암이라는 질환만큼은 한의사들 또한 진심으로 접근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
다시 원래의 글로 돌아가, 암 환자를 도울 수 있는 한의사의 영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크게 2가지의 체계를 이해해야 한다. 한 가지는 항암치료, 방사선치료, 수술 등 암을 ‘치료’할 수 있다고 ‘공인’된 표준 암 치료의 체계이며, 다른 한 가지는 암 환자에게 있어 ‘치료’라는 개념이 ‘종양의 완전 소실’로 일관화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먼저 전자부터 말하자면 평균 1~3일 소요되는 표준 암 치료만큼이나 그 다음 주기의 치료를 준비하는 평균 2~3주의 기간 또한 암 치료를 견디는 데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가진다는 점을 짚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의료체계상 준비 기간으로 설명한 그 2~3주의 시간까지 의료진이 암 환자에게 정성을 쏟을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다. 즉 다시 말해 결국은 표준 암 치료와 관련된 필수 의료인력 부족의 문제로 연결되는 것이며, 이는 암에 있어 한의사가 비록 필수 의료인력은 아니나 전문성을 인정받은 한의사라면 그 바통을 이어받아 관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현재 암 요양병원의 명칭으로 한의사를 비롯한 많은 의료인들이 표준 암 치료의 보완지지 요법으로서 관련 의학적·한의학적 치료를 수행하고 있다.
두 번째로 암 환자의 ‘치료’에 대한 정의로 이어가자면 상술한 난치병의 치료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가장 쉬운 사례로 신약 항암제가 보험급여에 등재되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된다. 표준 암 치료를 받지 않은 4기 췌장암의 기대여명은 약 6개월로 보고된다. 이 때 현재 공인되고 있는 항암제로 치료받으면 기대여명은 약 11개월로 연장된다.
그러던 중 모든 임상시험을 통과하여 새롭게 발표된 신약 항암제의 기대 효과는 약 13개월로 보고되었으며 그 해 해당 약은 표준 권고치료로 등재된다.
◇암 치료 영역서 한의사의 역할 존재
이런 과정에서 혹자는 말한다. “6개월 사나, 13개월 사나 어차피 죽으니 크게 다르지 않다”고. 그러나 또 다른 이는 말한다. “그렇다고 선고받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앞으로 6개월을 죽을 날만 기다릴 수는 없다”고. 두 대사는 모두 내가 직접 각기 다른 암 환자에게서 들었던 말이다. 이 경우에서 암 치료의 목적은 ‘생존기간 연장’으로 정립된다.
다른 경우에서의 치료 목적으로는 ‘삶의 질 완화’와 ‘신체적 고통이 없는 임종 준비’가 있으며, 물론 종양 세포가 완전히 사라지는 ‘완전 관해(또는 완치)’ 또한 일부의 경우에서 적용되는 암 치료의 목적이다.
따라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암이 여전히 난치병이기에 병의 소실만큼이나 중요한 비중을 가지는 ‘삶의 질 완화’와 ‘신체적 고통이 없는 임종 준비’의 영역에서는 한의사와 한의학이 표준 치료의 도움을 받아 높은 효용성을 보일 수 있다는 점이며, 이것이 바로 암 환자에게 우리가 신뢰를 보여야 할 한의사의 역할이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필자가 서술한 개념들이 이미 한의암치료에 대한 논문과 표준 권고 지침에 높은 수준의 자료를 레퍼런스로 상세히 보고되어 있다. 하지만 요즘 실태를 보면 약간은 생소한 이 진료 개념이 글과 임상 사이에서 큰 괴리를 만들고 있는 것 같다.
그렇기에 더욱, 곳곳에서 암 환자에게 한의사와 한의학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크고 작은 움직임을 만들고 있는 분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뿐만 아니라 막막한 길을 앞두고 있는 암 환자분들에게는 당신들의 손길을 언제든지 잡을 준비가 된 의료인이 있다는 것을 알리며, 그 의료인들 또한 보다 건강한 의료체계를 지켜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 또한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