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基洪의 濟世寶鑑論
“사회에 봉사하고 후학을 깨우쳐주는 것이 濟世이다”
1931년 文基洪(생몰년대 미상)은 『濟世寶鑑』이라는 제목의 의서를 간행하였다. 文基洪은 호가 濟世堂으로서 뛰어난 의술로 일제시대에 이름을 날린 名醫였다. 부산을 중심으로 각 도를 순행하면서 진료를 하여 수많은 병자들을 완쾌시켜 가는 곳마다 공적비가 서기도 하였다. 그의 공적비는 浦項, 甘浦, 경주석굴암, 울산, 언양, 양산통도사, 동래좌수영, 마산봉화령, 漆原龜山 등 경남북 일원 9군데에 달한다고 한다.
1931년 11월18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貧者無料治療’라는 제하에 文基洪이라는 한의사의 선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본적을 부산에 두고 지금 울산읍 옥교동에 와서 일반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濟世堂 醫師 文基洪씨는 일찍부터 鍼灸術을 연구하여 마산, 창원, 포항, 경주 등 경상남북도를 다니며 보통병원에서 고치지 못하는 중병을 많이 고치는 중 특히 빈한한 환자에게는 약까지 무료로 써가며 친절히 고쳐주었다.”
또한 다음 해인 1932년 11월6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의술로 유명한 文基洪씨. 예나 지금이나 병을 잘 고치는 사람을 편작이라고 한다. 濟世堂 文基洪 선생은 부산을 위시로 각도와 여러 군에서 그 의술로 불치의 병을 완전히 고친 환자들이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아서 문 선생이 간 곳마다 공적비가 서고 그 명성이 자자하다. 특히 침구술이 능숙하여 한번만 문 선생에게서 시술을 받으면 어떤 어려운 병이라도 쉽게 치료되어 일반인들의 신임이 매우 두텁다고 한다.”
“1932년 음력 4월 상순 남평 문기홍이 제세당에서 쓰노라(昭和七年壬申淸和月上瀚南平文基洪書于濟世堂)”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濟世寶鑑序라는 저자서문은 다음과 같다.
“한의학은 황제,신농씨 이후부터 거듭 저술이 계속 이어져 내려와 더 이상 저술할 여지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은 옛과 지금이 다르고 강약이 다르다. 또한 백초의 영험한 효과도 다르다. 따라서 지금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면 옛 것을 참작하면서 현재의 것에 통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다음에 근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돌아보건대 내 비록 재주는 없지만 감히 이에 널리 수집하고 깊이 연구하여 혹은 줄이고 혹은 상세히 하여 더하기도 하고 덜어내기도 하였고 침구 등의 방법을 첨가하여 이에 책 한권을 만들어 『제세보감』이라고 하였다. 참람되이 주제넘는 것이 죄를 피할 바가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지만, 의학계의 만분의 일의 보탬은 있을 것이라.”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저작을 기리기 위해 “소지(小識)”라는 제목의 글을 적은 것은 아래와 같다.
“이 『제세보감』은 오직 우리 제세당 문 선생이 지으신 것이다. 선생께서는 고방을 다 공부하시고 새로운 방법도 널리 모으셨으며 또 그의 경험도 덧붙이셨는데, 조리가 분명하고 맥락이 관철되니, 바라건대 의학계의 모범으로 삼았으면 한다. 이러하니 선생이 세상에 끼친 공이 어찌 크지 않겠는가. 선생을 흠모하는 마음으로 붓을 잡는다.”
이 글 말미에 이어서 그의 제자임을 밝히고 있는 인물들은 金容澤 金正來 李雨成 金實根 劉公珍 李元弼 李龍洙 李壽良 金正鎬 韓正鎬 金秀經 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文基洪 先生의 한의학자로서의 삶은 사회봉사와 후학들과의 교감을 모색해온 선배 한의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